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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 대신 걸레, 고백.

'이 모든 것들은 어쩌면 내가 ...해서'

by 흔한사람




늘 그랬듯

아빠는 반복하고 있었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사회에서 도태되고 있는 자신의 건강상태와 학력, 경제력에 깎이고 깎여 자신이 제일 사랑하는 아내를 죽지 않을 만큼 때리고, 그 아내가 죽은 듯이 쓰러져서야 끌어안고 우는 짓을.


보다 어릴때는 바들바들 떨며 잠을 못 이루는 채로 생생하게 그 소리를 온몸으로 느꼈다.


쿵. 쿵. 쿵.


짝- 소리같은 건 없다. 맞는 쪽의 애원도 없다.

그저 묵직한 소리와 때리면서도 자기 분의 못 이기듯 온갖 된발음의 욕들로도 때리고 있었다.


중학생쯤 되자, 이따금씩 그 소리에 깨곤 했지만-

미간에 깊은 주름 몇개 세우고 잠들어 외면하고 도망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저건 못 멈춰.”


119도 경찰도 다른 친척들도 주변 이웃들도 나서는 걸 봤었지만, 여전히 변한 건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는

멀쩡한 청소기를 두고도 매일매일 걸레 한 장을 들고 바닥과 창문들을 구석구석 닦았다.


아빠에게 욕 한마디 대꾸 안 하는 것.

아빠는 우는 여자를 싫어해서 폭주하곤 하니까, 맞으며 울지 않을 것.

집안일을 내가 보았던 어느 친구의 집보다 완벽하게 하는 것.

냉장고에는 항상 육류 반찬을 비롯하여 새 반찬이 가득할 것.

쓰레기와 설거지는 절대 쌓이지 않을 것.

"어떤 상황에서도" 폭언하거나 폭력적이지 않을 것.

누가 보아도 예쁘게 긴 생머리에 단정하게 다림질한 코트, 굽높은 구두를 신는 것.

돈을 벌어서 어떻게든 가계를 묵묵히 이끌 것.


그게 피멍 위로 새 피멍이 덧칠되는 엄마의 일상을, 자신을,

스스로 지키게 하는 일이었던 것 같다.


거실에 등을 돌리고 작은 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집안일도 경제활동도 여자로써의 외모관리도 완벽해 보였던 엄마는 그 날도 쭈그리고 앉아 걸레질을 하다 내가 컴퓨터 하고 있는 방까지 왔다.


“아름아”


컴퓨터를 향한 채 고개만을 돌려 엄마를 보았다.



그 인간.. 엄마 때리고 세상 편하게 코골고 자는 걸 보는데
오늘 정말 망치로 때려 죽이고 싶었어.
엄마 진짜 때려 죽이고 싶었어..



라고 말하며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는 것을 보았다.

엄마가 나에게 호소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엄마는 흐느끼고 있었고, 쭈그린 채 걸레를 움켜 쥔 손 아귀에

증오와 절망과 깊고 깊은 출구없는 고독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고,

고개만 돌렸던 그 자세 그대로 아무것도 못 했다.

하다못해 의자를 박차고 몇걸음 달려가 엄마를 껴안아주지도 않았다.


아마-

엄마가 거의 끝까지 몰려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내게 외친 외마디였을 것이다.

마지막 신호였을 것이다. 엄마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에 두려움이 쌓이던 것이

이제는 확신이라는 괴물이 되어 집어삼켜지고 있다는 신호.

오로지 살기 위해 자신이 바라던 자신이길 포기하게 될거라는 신호.


나는 엄마가 어떻게서든 지켜주고 싶던 딸이자,

이 모든 것의 최측근 방관자, 무기력한 존재였다.


나도 맞아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아빠한테 맞아서 허리까지 평생 안 좋은 마당에도

아빠가 한바탕 저지르곤 미안해서 뻔뻔하게 웃고 있을때에나

겨우겨우 용기를 내서 날이 선 핀잔 한두마디 던지는 걸로 가슴 졸이던 겁쟁이였다.


그리고 얼마 뒤 엄마가 구속되고

법의 심판을 받는 와중에도 그저


“네 제가 그랬습니다. 저 혼자 그랬습니다. 네..”


라며 엄마가 지키고 싶었던 것의 꽤 큰 부분이었던 삼남매에 대한 의지를 비롯,

모든걸 포기하고 체념한 채 무기징역을 받고서야 알았다.


엄마도 역시 결국 망치는 못 들었구나.

아빠의 사망보험금을 담보로 깡패라는 두 명의 청년을 구해 힘을 빌렸구나.

엄마가 들 수 밖에 없었던 망치라는 건, 그마저도 자신의 힘이 아닌 환상이었구나.






소외된 피해자, 약자라는 건 그런 거다.


절대 죽기 전엔,

혹은 법적으로 가해자가 완전 격리 당하기 전엔


되지도 못 할 가해자의 탈을 어설프게 쓰는 것만이 탈출이자

나락으로 곧장 떨어지는 출구이다.


대부분은 계속해서 약자로 살며 폭력을 혼자 외롭게 감당하는 것.

그 와중에 남들처럼, 남들만큼 멀쩡해 보이게 살아야하는 것.


그런게 약자의 삶이고, 피해자의 삶이다.

피해자 답지않게 멀쩡하거나 행복해서도 안 되지만,

어떤 역경속에서도 남들만큼은 해내고 버텨야 하는.


나에겐 이젠 경계가 모호하다.

내가 받았던 크고 작은 숱한 "나와 다름"과 편견으로인한 차별과 딱지.

묵묵히 겪어야 했던 일상적이고 나만 안 웃긴 괴롭힘, 유머.

그들은 다 가해자일까? 강자였을까?






아빠는 분명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낙오된 피해자였다.


아빠는 분명 직장에서 남자 선배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군복무 시절 사고로 인해 장애급수까지 생긴 국가유공자였다.


아빠는 분명 남았을 삶마저 허리 수술과 입원을 반복하고,

병약하고 떳떳하지 못 한 돌팔이로써 무능한 아빠와 남편으로 살아야 했을 것이다.


여군이 꿈이었던 엄마는 삼촌은 대학까지 갔지만,

딸, 그것도 딸중에 막내라는 이유로 국민학교만 졸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자라서 아빠를 만나 말 한 번 꺼내 볼 여지 없었던 집안에서 벗어나게된 엄마는

사회적 약자이자 낙오자가 되버린 아빠의 가정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빠는 결국 아내에게 청부살인당한 피해자가 되었다.


그랬던 엄마는 이제 사회에서 격리되어 마땅한 중범죄자이자,

아까운 세금 도둑, 무기징역수가 되었다.


언론과 군중들은 그 애비에 그 애미라고 했다.

그 아래 자식들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그도 아니면 아무도 읽지 않는, 아무도 관심없는 지나가는 기사에 불과했다.


[기사링크]`폭력남편' 청부살해 40대여성에 무기징역


[기사링크] 남편 청부살해 일당 5명 검거

이 뉴스 영상에 처럼 리포터나 기자가 현관문을 돌리는 일.

나는 수도 없이 겪었고, 혼자 있을 때마다 나는 현관문에서 난 것같은 작은 소리에도

여전히 늘 신경이 곤두서고 무섭고 괴로워진다.


[기사링크]"바람 피운다” 폭력… 남편 청부살해

바람, 바람, 바람.. 당시 대부분의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무서운 아내, 바람피워서 맞아놓고 남편 죽인 년. 그게 우리 엄마였고, 우리 집 이야기였다.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은 17년이었고, 그 중 10여년을 엄마는 맞고 살았고,

우리 자식들은 아빠라는 무법자에게 늘 거스르지 않으려,

엄마만큼 맞지 않으려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런 중에 가까워지고 여자로써 사랑받고, 어디에도 기댈 곳 없던 엄마를 보듬어준게

그 내연남..이라는 아저씨인 것 안다. 그 아저씨의 대한 기억이 별로 없지만 기억한다.

온화하고 친절한 인상과 행동, 주렁주렁 딸린 우리 셋에게도 말을 건네고 하던 아저씨.

결국 엄마는 수감되서 한동안 그 아저씨와 연락이라도 닿길 기대하고 바랬었지만, 그는 없다.

서로 이혼하고 합치자고 달콤한 말로 위로하고 품어주던 아저씨는 언제라도 버릴 것 같던 가정을 지킨 채 숨어버렸다. 당연한 이치다. 그는 끝나지 않는 폭력의 피해자도 아니었고, 범죄자도 아니니까.

엄마는 그 아저씨와 합치기 위해, 아빠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법적으로 이혼을 어렵사리 진행하고

이혼에 성공도 했었지만, 결국 아빠와 법적인 재혼을 해버렸다. 이혼하고 이 집을 도망쳐도 아빠의 폭력은 엄마와 우리 자식들을 포함한 엄마 주변에 닿았기 때문에.

엄마는 그저 미련하고 멍청한, 바람피워놓고 감히 남편을 죽인 무서운 아내-가 되었다.



언론에선 아내가 남편을 청부살인한 사실만 조명했다.

거기에 엄마의 삶과 아빠의 삶. 미성년의 삼남매의 삶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당연했다.






그 후로 친척인 고모부에게 5년간 매달-

우리 삼남매따위 누가 기억할까.. 0원을 보게 될까 무서워 덮어뒀던 후원금,

우리가 수령하는게 가능한지 몰랐던(아빠는 죽었고, 엄마는 살인자니까)
군복무시절 사고로 장애 판정을 받고 평생을 아파했던 아빠를 위한 국가유공자 연금으로
적게는 90만원에서 많게는 120여만원의 연금

아픈 몸으로 서투르게 일해가며 믿고 바쳤던 얼마 안되는 2년치 내 급여와 알바수입.

을 쭉 횡령 당한 일.

하다못해 미성년이던 우리 세 명분 앞으로 나왔던

결식 아동을 위한 복지 식권 조차도 같이 썼다. (현 푸르미카드)


이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그 일도 아무 일이 아니다. 당연했다.

우리는 절망하고 고통받았지만 옆집에게도, 내 친구에게도 아무 일도 아니었다.

입 밖으로 말하면 위로 몇마디와 날 위해 울어주는 친구를 볼 수 있을지야 모르겠지만, 그런 일을 하면 더더욱 나는 보통에서 멀어지겠지. 나를 배려하는 다정한 손길이 종종 나를 상처입혀도 고마우니까, 미안하니까, 이런 내 삶이 문제인거니까, 내 안으로 내 안으로 파고들겠지.


우리 이름의 통장에 월마다 5년간 적게는 200여만원에서 많게는 350여만원의 돈이 들어왔지만, 400원짜리 공책에 우리끼리 적어가며 채운 수년간의 가계부에는 한 달에 30만원에서 40만원으로 아이들끼리 살고 있었다.


[기사링크] 은인인줄 알았던 고모부가 이럴수가...

관련 기사 대부분이 사라진 것 같다. 네이트판의 기사나 네이버에 났던 기사에는 제법 댓글이 달려있었다. 제목과 내용만 보고 바로 고모부를 비난하는 발언과 사회복지의 빈 구멍을 지적하는 댓글이 있었다. 그런 댓글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삼남매가 진짜 호랑이 새끼일수도 있지."라며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댓글 하나로, 문장 하나로 나를 절망 시키기도 했었다. 수많은 고모부를 향한 비난의 글자들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진 몇 안 되는 댓글들이었다. 그래.. 일부. 일부만을 보지 말라고 하는 말에 내가 절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시 이혼을 당하고 아이까지 잃었던 막내고모가 시장에서 호프집을 운영하고 있던걸

남자친구의 카드도용으로 인해 다 잃고 파산까지 한 후, 우리 집에 함께 지냈던 적이 있었다.


우리는 당연했다.

초등학생이던 막내는 50원짜리를 모아서 50% 할인하는 25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먹는게 행복이었고, 나는 차비가 아까워서 학교까지 1시간씩 걷기도 했지만 그런 일로 당시에 울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우리한테 주어진 당연한 거였으니까. 친구들이 하교길에 군것질을 하면, 안 먹고싶은 척을 해야 나를 지킬 수 있었고, 그런 나를 배려해 내 몫까지 사서 내미는 친구의 손을 잡을 때마다, 친구는 천사로 나는 1000원짜리 군것질만도 못 한 내가 되는 것 같았다. 고마운데, 그 친구가 너무나 고마운데도 고마움이 넘칠수록 스스로를 비참히 여겼다. 엄마아빠가 계실때 사주셨던 낡고 헤진 단벌의 운동화, 책가방, 유행지난지 오래일 옷 몇벌. 소풍때는 아무 구차한 말 없이 “아름아 나랑 가방 바꿔 메자!”라는 착하고 마음 깊은.. 예쁜 친구도 있었다. 이 친구와도 멀어졌지만-


막내고모는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몰래 고모부한테 가서 따졌다고 나중에서야 알았다. 애들 집에 들어와 살아보니, 본인이 알고 있기론 죽은 오빠의 연금에 애들 앞으로 들어오는 후원금과 정부보조금까지 분명히 돈이 부족하지 않을텐데 당연하다는 듯 너무 없이 살고 있다고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곧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고모 자신의 처지도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기에, 힘이 있지도 않았기에, 큰 일로 키우지 못 했다고..


나는 고등학교 재학 ~ 사회 초년생 2년여 내내

생활비가 떨어지면 쭈뼛대며 고모부 집에 방문해 멋쩍게 웃으며 생활비를 공손히, 감사히, 두 손 모아, 송구스럽게 받았다. 한 번 받을때마다 5만원 10만원 정도였다. 주기는 보통 일주일 내외였다. 모든 통장은 당연히 고모부 수중에 있었고, 고3때 내 힘으로 여기저기 면접보고 취직한 후 만든 첫 급여 통장도 체크카드 하나를 만들어 통장째 당연하게 고모부한테 드렸다. 이제야 도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후원금은 부족하지만, 우리 딸들 위해 어쩌겠어!
자! 근데 아직도 많이 아프냐 딸? 일 할 수 있을 것 같아?
동사무소에서 알바로 써줄 것 같던데 그정도면 할 만하지 않겠어?
내 조카 ㅇㅇ이도 너처럼 허리가 아픈데 걔는 엄청 밝아.



라는 사람 좋은 얼굴의 우리한텐 유일했던 어른인 고모부에게 보다 효도 하고 싶어서 진통제를 매일 습관적으로 먹으며 일하고, 사실은 절망적이지만 어떻게든 남들만큼, 때로는 남들보다도 착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고모부의 조카도 내가 가진 지병중의 하나인 척추측만증을 앓고 있었고, 고모부는 종종 그 아이 이야기를 했다. 밝고 긍정적이고 무엇이든 잘 해낼 아이라고. 그럴때마다 묵묵히 들으며 사실은 '그 조카는 부모님도 멀쩡히 있고, 돈을 벌어야할 이유도, 오늘 내일 뭐 먹을지 고민할 필요도, 병원비는 커녕 약값도 걱정 안 해도 되는 애잖아!'라고 약한 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서운했지만, 서운해 하기엔 고모부는 유일한 고마운 사람이었다.)






한 번은 어린 막내를 데리고 갔을 때, 고모부에게 두 손 공손히 고개 숙여 생활비 몇만원을 받고 현관쪽을 돌아보니, 어린 막내가 고모부네 식구들이 먹고 현관 쓰레기통 위에 쌓아둔 빈 피자박스들을 하나하나 들춰보고 있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당장에는 막내에게 "뭐해!"라고 작게 호통치고 그 작은 손을 획 빈 상자에서 거칠게 떼어냈다. 그리곤 집에 돌아왔다가 서글픔에 밖에 나와 나를 안고 혼자 쭈그리고 울었다. 그 때 확실해 졌다. 어떻게서든 피자나 햄버거 먹고싶지 않을 때까지 먹게 해주자. 누군가 나눠주길 입벌리고 기다리지 말고, 그런 누군가는 있지도 않은게 당연한 것이고. 제 힘으로 남들만큼 과대포장일지라도 비슷해 보이게라도 살자.


국선 변호사 분의 도움으로 2년간 법정 공방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했지만, 결국 법원에 서야했던 건 부모님과의 일을 겪고, 우리끼리 사는 법 밖에 모르던 우리 뿐이었다.


고모부, 그의 곁엔 대기업에 다니는 딸과, 공기업에 다니는 딸, 덩치 큰 손으로 우리집 현관문을 두들기거나 주먹으로 때려죽이겠다는 말을 똑바로 응시하며 할 수 있는 남자, 군대에선 사람 때려서 영창가는 게 일상이던 아들이 있었고, 사비를 들인 변호사가 함께 였다. 그들은 얼핏보기엔 맨얼굴에 아무 머리끈으로 대충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으로 법정에 출석했다. 그렇다하더라도 모든 옷들과 신발을 우리는 약자처럼 보이게 입을 때조차도 두를 수 없는 백화점 옷가지였다. 알고 있는, 진짜 투쟁을 해야하는 내 눈에도 그들은 투쟁하는 억울한 약자처럼 보였다. 여동생과 나는 고모부 손에서 벗어나, 일을 하고 받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쪼개어 만원짜리 옷들로 최대한 예쁘게 입었다. 어린 얼굴에 서투른 화장을 했다. 누군가의 눈에 우리는 피해자, 약자로는 안 보였을 것이다. 정작 우리는 최대한 "약자스럽게", "피해자스럽게" 가고싶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그 자리에서 강해져야했고, 싸워야했고, 증명해야했고, 떳떳해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절대적으로 정황상 우리는 돈이라도 되돌려 받을 수 있을 거랬다.

이 불공평하고 무서운 싸움을 버티기만 하면 말이다. 나는 고모부의 얼굴을 볼때마다 눈물 콧물 범벅에 입이 안 닫히고 침을 못 삼켜 입안 가득 침이 찬 채 안면이 마비가 되고, 내 손가락 발가락들은 제 멋대로 구부러지며 공황 상태가 되었다. 그런 나를 대신해 내 여동생은 최대한 단신으로 법정 싸움에 투쟁했다. 막내는 이 과정에 고작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을 넘나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법은 우리 편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미성년이었거나 가난중에서도 가난한 우리의 통장에서 “자동차세”나 고모부의 새 애인에게 명품 가방을 사 주기 위해 몇백만원씩 연속으로 출금한 기록이 있었다. (이 부분은 내가 후에 서술할, 새 애인과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자랑스레 했던 자랑으로 아는 것이라 사실증명이 어려웠다. 대기업에 속하는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오래 해왔고, 현재는 택시기사를 업삼고 있던 고모부는 영수증을 날조해가며 무고함을 주장했지만, 우리는 그가 현금으로 뽑아 쓴 그 돈을 부당하게 썼다는 증거를 찾아내고 보여줘야했다. 이길 수 있는 싸움 같은게 아니었다. 5년이 지나 슬슬 자립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을 한 후, 처음으로 우리 통장들을 조회했을 때 잔고는 0원이었다.)


법원에서 대질을 하는 날에도 우리는 둘이서 마지막으로 한 번더 법원 복도에 놓인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여동생은 이미 정신이 나가기 시작한 나에게 "괜찮아, 언니. 말은 내가 다 할께." 라며 가는 팔로 나를 지탱해줬다. 대질 내내 고모부측은 억울하다, 호랑이 새끼들을 키웠다. 라며 누가보아도 억울해 보이고 피해자처럼 호소했다. 고모부 쪽 사람들을 쳐다보기 무서워서 내가 앉은 탁상을 내려다 본 채 그 긴 주장들을 하나하나 꽤 오랜 시간 듣고 있었는데, 그 때 재판장이 말을 끊고 내게 발언권을 주었다.


"하고 싶은 말 있지 않습니까? 말해보세요."


나는-


"저는 고모부를 엄마아빠도 없고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우리에게,

우리밖에 없는 우리에게 자처해서 나서준 새 아버지라 생각했어요.

붙임성이 부족하고 소심해서 딸이라고 불러줄때에도 그저 어설픈 태도밖에 못 지었지만, 그래도 효도하고 싶었어요. 우리까지 신경쓰느라 몸이 더 안 좋아지신 것 같아서 죄송했어요. 그런.. 그래서.."


라는 정도의 말밖에 못 했다. 눈물 콧물 범벅에 손가락과 얼굴근육이 제멋대로 덜덜덜 마비되고 꼬여갔다. 대질은 서로의 주장을 비교하고 증명하는 자리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비교해서 하나의 사실로 맞춰가는 자리. 나는 그 자리에서 겨우 생긴 발언의 기회에 저런 말 밖에 못 했다. 그마저도 끝까지 못 했다.


그리고 마법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검사, 재판장 등 우리는 알 수 없는 우리에겐 강자처럼 보였던, 고모부 편을 굳이 들어주지 않아도 우리에겐 무서웠던 그들은 깊은 한숨을 쉬어주었고, 내 이런 모습에 고모부가 "저거 저거!!!"하며 까무러치려 들자, 재판장은 다소 격앙된 어투로 고모부에게 외쳤다.


"정말 느끼는 거 없어요? 당신?"


긴 대질이 끝나고 나서, 그 공간에 있었던 어떤 역할인지 나로선 모르는 법조인들 대부분은 진정 못 하고 벌벌 떠는 내게 음료를 건네거나 "괜찮아"라는 말을 해줬었다. 한 마디도 제대로 못 한 나였지만, 여동생은 고맙다고 잘 했다고 말하며 이제 괜찮다고 했고, 2년여간의 공방 중 하루는 잔잔히 끝이 났다.



나같은 것에게 그건 감히 마법이었다.

아무 변화나 나아짐이 없어도 말이다.






여동생은 22살때부터 단신으로 부딪혀내며 싸웠음에도


“언니 우리 이제 돈 되돌려 받을 날 멀지 않아.

진짜 잘 살자. 막내는 아직 어리니까 각자 명의 통장에 3등분해서 잘 보관해두자!”


라며 의지를 다졌다.

여동생은 우리에게 유일한 22살의 계란 하나 움켜쥐고 돌산 앞에 선 투쟁자였다.

그럼에도 떳떳했고, 용감했고, 당당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고모부 측에선 교도소에 있는 엄마를 몰래 찾아가 유리한 증언을 받아왔다. 엄마는 교관들과 함께 자기같은 범법자들과 죽을때까지 살아야한다. 쫓기는 면회 시간 15분동안 엄마는 예전에 고모부와 서로 차용증 없이 돈을 주고 받던 사이였는데, 고모부에게 돈을 빌린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고모부는 그 증언으로 뱉어내야할 1억을 저멀리 날려 버렸고, 우리 삼남매는 1600여만원을 받고 긴 싸움의 종지부.. 합의를 보았다.


체급차이가 말도 안 되는 외롭고 긴 싸움에 여동생은 지쳐있었고, 우리는 그 돈을 3등분 하여 나눴다. 그마저도 애초에 법정 싸움 무리일꺼라 생각하고 포기했던 우리를 알던, 잔고를 확인해보고, 자립하겠단 말을 해보라며 의문을 던져준 사람이 있었다. 우리를 설득하며 사회적 어른이고 강자인 자신이 도와준다고 나선 그 사람 때문에 2천만원을 손해보았고, 여동생은 그 사람이 명의를 맘대로 가져다써서 300여만원을 물어야했다.



2천만원의 경우,

그 분이 고모부에게 횡령 사실을 알고 있고 법정 공방을 하겠다고 통보하러 갔을 때 고모부가 놀래서 '사실 애들 돈 제대로 있다. 잠깐 친구 빌려준거고 봐라, 2천만원' 하며 그 사람에게 줬다. 그리고 그 사람은 우리 편에 서서 투쟁할 것처럼 전쟁터에 나서라고 북돋아 준 후, 공방이 진행될 수록 우리 자매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왜 사랑해주지 않냐, 내가 이렇게까지 너희들 편인데 라고 집착하고 스토킹하고 자해한.. 띠동갑 위의 어린 딸아이가 있는 유부남이 되었다. 그런 "사랑"에 응할 수 없었던 우리는 결국 그 돈을 받지 못 했고, 그 없는 싸움을 계속했다.





이렇게 싸움이 길어지고 이런 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이유.


통장은 모두 고모부 수중에 있던 5년 이었고,

사회복지단체나 후원 관계에서도 고모부가 법정 대리인이었다.

엄마가 믿고 맡긴게 시작이었다. 그래도 한 때 같이 호프집도 했었고, 서로 돈도 빌려주고 받기를 하고, 윗 집 아랫집 이웃사촌이기까지 했으니까. 그리고 친인척 모두 엄마의 구형외엔 아무도 관심없을 때, 유일하게 우리 삼남매의 안위를 물어봐 준 사람이니까.


또, 나는 생활비를 받으러 갈때마다 현금으로 받았다. 또, 나는 아팠다. 고모부와 의부 비슷한 관계로 지내며 단 둘이 큰 병원을 5번 정도 갔었다. 한 번 갈때마다 병원비는 100만원은 그냥 빠졌다. 오로지 검진 비용이었다. 수술은 수천만원 돈이란 말을 들었고, 고모부는 내가 원하면 나중에 꼭 받게 해준다 했다. 유일하게 내가 아픈 걸 직접 말 하지도 않아도 되는 분의 그 말이라도 감사했다. 나아질 것이다, 수술 시켜줄 것이다- 같은 기대나 짐을 드리지 않으려 했다. 왜냐면 나는 진짜 부모님에게조차도 비싼 수술대신 착용하게 된 50만원짜리 보조기 착용에 눈칫밥을 먹는 딸이었으니까.


나같은 건 원래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아빠가 때려서 결정적으로 더 아프게 된거고,

피해자였던 엄마를 범죄자로 만들어버린 방아쇠니까.


내가 안 아프게, 덜 아프게 되는 것과 아픈 걸 아프다고 말 할 수 있는 환경이나 입장따윈 아무 곳에도 없었으니까. 그런 유일무이한 고모부니까, 굳게 믿었다.


첫 직장에서 건강문제를 비롯 가장으로써 어설프게 동생들을 신경쓰는 동안 근태가 엉망이 되가고 있었고, 나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일하기 위해" 비싼 치료대신 척추 신경계에 통증 마취주사 시술을 받는게 어떠냐는 고모부의 권유에 응했다.


고모부가 시키는대로 새 애인이 소개하는 불법침술원에서 3만원짜리 피맺히는 침술을 손에 꼽게 받거나,

(이마저도 시술이 끝난 후에 새 애인은 "뭐해? 돈 안 내고."라고 해서

고모부 사비도, 고모부 수중의 우리 돈도 아닌, 내 급여중에 일부였던 20만원에서 내는게 당연했다.)

대개는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고 내게는 듣도 않는 보통의 진통제나 우루사.. 같은 걸 먹었다.

제대로 된 치료나 소견은 감히 도움받고 소외된 내가 바랄 것이 아니었으니 주워들은 얕은 믿음으로 먹었다.

고모부 측은 이런 내 상황과 병원을 갔던 기록들을 근거로 내세우며,


"나는 큰 애 병원도 보내줬고, 얼마나 큰 돈을 들였는지 모른다.

그 때 기록을 다 제대로 안 남겨서 그렇지 치료를 도왔고 많은 사비를 사용해야 했다"


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 법정에서 조차도 내 이 병약함과 몸뚱아리를 저주했다.

이 힘든 싸움에 내 존재 자체가 발목까지 잡는 걸까-라고 절망했다.


통증마취 시술도 한번 이었다. 우리 형편에 수십만원씩 하는 주사를 매번 맞을 수도 없고, 그 주사는 내가 일하기 위해서 응한 시술이었지만, 맞고 나서는 2주를 강렬한 통증과 몸살로 신음하며 꼼짝도 못 했고 결국 해고 되었다는 문자를 받게 한 시술이었다. 나는 경제적/현실적 이유에서 차선택이었던 시술조차도 꿈꾸지 않게 되었다. 불법 침술은 애써 배려해주고 권유해준 고모부..의 의중을 상하게 할까봐 조심스레 피했다.


새 애인을 따라가면 나는 엎드린 채 등에 침이 가득 꽂히고,

내가 모르는 아줌마들과 장차 새 고모가 될 그 여자는 내 남편을 고르고 있었다. 당시 21살이었다.


그 남자, 나이는 좀 많아도 돈은 있어.
넌 아직 어리지만 몸이 이러니까 지금 뿐이 기회가 없어.
너네 때문에 다 늙어서 고생하는 고모부한테 효도해야 할 거 아냐?



나는 멋대로 날 후려치는 경매에 올라서도 묵묵히 미소 지으며 “효도해야죠..” 맞장구치며 들어야했다.

그렇게 믿고 따르던 고모부에게조차도 아프단 말을 더 금기시하게 되었다.


아픈 몸에 바닥난 마음으로 엉망인 사회 초년생으로 첫 취직 후 첫 실직을 경험했다.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해고는 진즉에 당해도 쌌다.


근태가 남들보다 엉망일테니까 미친듯이 일하고 실적을 내야했고 몸과 정신이 축나면서까지 버텨도, 또 첫 직장처럼 결국 실직 될까 두려워, 나를 보는 시선들을 피해 내가 일을 잘 한다는 소문을 듣고 제안해오는 새로운 사람들이 있는 회사로 이직을 반복했다. 아무리 일을 해도 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은 나오지 않았고,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야. 살아있어도 돼."라며 안도하고 잘 수 있는 날은 드물었다.


어떻게든 이대로의 나로도.. 가치가 있어야했다.

어떻게든 나를 보는 시선들 앞에서 당당해지기가 힘들었다.

새로운 곳에 가서 새 사람들을 만나는 건 힘들었지만, 기대했다.

이번엔 덜 아플지도 몰라. 그래서 혼자 어긋나는 직원이 안 될지도 몰라- 라며.


그 와중에 겪었던 회사생활에서의

왕따, 오해, 소문, 먼 상사로부터의 스토킹과 기쁨조로서의 소비는 역시 오롯이 나 혼자만의 몫이었다.


감사하게도 좋은 분들, 능력있는 분들도 많이 만났다. 때로 나 혼자 엇나가는 이상한 태세에 아픔에 선뜻 손 내밀어주는 분들이 있었다. 쟤는 왜 저래?에서 그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 기울어 주겠다고 자처하는 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분들이 아무리 아름씬 디자인을 잘 해, 아무 잘못 없어, 이해해, 등의 감사한 말로 격려해 줘도 결국 내 매일은 아프고 아무것도 해소, 해결되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격려해주고 믿어주는 그 분들에게 변함없이 병약하고 한심한 심리적 약체의 모습을 보이는 건 더더욱 실례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나한테 귀 기울여주고 가치를 부여해주고 좋아해준 사람들인데..! 그리고 그럴수록 마음과는 반대로 지쳐갔다. 더 좋은 디자이너, 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진 내가 필요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보다 많은 통증과 따르는 질병과 후유증들이 생겨갔고 장점이었던 습득력과 발전도 더뎌졌다. 그리고 그런 되고싶던 이상의 나는 없는 걸 체감하는 과정도 괴로웠다.


나는 망치 대신에 시끄러운 가정안에서 날 자립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해줬던 포토샵을 시작으로, 코딩, 스케치로 프로토타입 제작으로, 성격 좋은 사람으로 일어서고 보통처럼 섞이고 싶었다. 군중속에 안도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게된 사람들 곁에 있고 싶었다.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건 비싼 병원대신

온갖 쉽게 살 수 있는 약국 시판용 약들과 꺼져있는 컴퓨터다.


꺼져있는 나다.



이제는 앞도 뒤도 구차했던 많은 이유와 노력들은 바래고 바래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만이 지배하는데,

절대 아빠같은 폭력자도, 엄마같은 범죄자도, 고모부처럼 남을 이용하는 사람도, 칼이 아니라고 남을 상처주는 일에 무감각했던 일부 사람들처럼 상처내는 것에 무디지도 못 한다.


그런 내 선택은 이제 피 한방울 안 보고 아무도 해치지 않아도 되는 내 머리카락을 마구 자르거나, 혼자 울거나, 내 손톱으로 내 팔뚝에 피부를 긁어서 벗기는 것, 그만 멈추길 바라는 머리를 벽에 들이받는 것.. 온전히 나인채로도 날 좋아해주는 고양이들 뿐이다. 그런 고양이들에게도 난 늘 미안하지만.. 더 잘 해주고 싶고 더 좋은 것 먹이고 싶어서 조금은 힘이 났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남은 게 지금이다.


뭘 더 해야할지 모르겠다.

난 낙오됐고 지쳤다.

그랬던 아빠마저 이루 말할 수 없이 그립고,

이제 실존하지 않는 아빠만이 날 일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빠처럼은 안 하겠지만,

아빠가 왜 그랬는지를 점점 더 선명하게 이 몸으로, 마음으로 이해하게 됐다.


더 할 수 있다는 스스로를 향한 격려나 질책도,

나를 위해서 건네는 “힘내”라는 말도 모두가 날 향한 돌팔매질 처럼 무서워졌다.

응원과 격려를 호의 그대로 담백하게 들을 수가 없다. 그런게 아님을 아는데도.


낙오될거라는 두려움에 앞뒤 안 가리고 해내며 안도의 한숨을 쉬 던 때도 있었지만,

결국 낙오되는 과정은 천천히 나를 침식해 왔다.


나는.. 내가 없다. 동시에 나밖에 없다.

나는 나와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


예쁜 척 남들처럼 멀쩡한 척 흉내내고 SNS도 했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은 거의 나 혼자였다. 싸이월드 때도, 페이스북 때도, 인스타그램 때도.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디자이너로, 여자로, 넷친구로 다가와준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 모습과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어느 시점부터 내 사진을 지우기 시작했더니, 더 이상 내 사진을 보는게 치가 떨렸다. 난 내가 지긋지긋하니까. 이런 나는 없는데.


이런 내가 움켜 쥔건

나다.


내 손엔 나 밖에 없다.

나는 나를 던지지도, 더 이상 있는 힘껏 발버둥치지도 못 할 뿐.

걸레처럼 더러움이 묻은 구겨진 나 뿐이다.


나는 내가 겪었던 일들 속 그 누구를 비난하지 않았지만,

사실을 적는 것 만으로, 입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비난하는 피해의식에 가득찬 사람이 된다.


그 흔한 "개새끼", "씨발"도 당사자의 얼굴을 향하는 것도 아닌 내 방에서조차 외치기를 주저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겐 불쌍히 여겨지고 싶어서 조심하는 약자, 피해자의 모습으로 보여진다.


나는 그 누구도 해칠 생각이 없지만,

나 하나 지키겠다고 쥘 어떠한 망치도, 그럴 용기도 체력도 남아있지 않다.

유난히 엄마의 마지막 외침과 그 절망적인 모습이 반복해서 그려지는 밤이 계속 된다.








글이라도 쓰면서 내가 왜 이렇게 복잡하고 구차하고 귀찮은 마음을 가지게 된건지, 스스로를 대면하고 덩달아 조금이라도 털어낼 수 있길 바라며 회고를 시작했었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서조차 아무것도 바뀌지도 바꿀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미완으로 지난 일, 열린 내일 처럼 "미완"이라는 글로 마무리하려 했습니다. 댓글로 몇 몇 분이 읽어주신 것도 모자라, 공감해주거나 응원해 주셨거든요. 여전히, 보다 더 어두워지는 나약한 모습을 솔직하게 서술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 글에서조차 적지 못한 아동 시절 어른들에 의해 당했던 성추행과 성폭력 사이의 어떤 것들, 사내 상대적 강자들에게 당당히 정면으로 저항할 수 없으니 빙빙 돌려 감내하던 스토킹, 성희롱, 성추행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게 이런거라 조금씩 간헐적으로 토해낼 것 같습니다. 다시 디자인만 움켜쥐면 다 극복해낼 것 같던, 고통도 통증도 슬픔도 사그러들 것 같던 시간이 돌아올까요?


어느새 내 경쟁 상대는 어렸던 나보다도 더 어리고 배움의 기회와 열정이 맞물린 전투력 높은 후발대들이고, 나와 비슷한 출발을 한 다른 이들도 묵묵히 버텨내며 각자 나름의 무언가로 단단해져 갑니다. 매년 대학교에서, 학원에서 디자이너는 쏟아지고, 가장 기본적인 근태조차도 동료애와 팀웍을 쌓을 여건도 더 건강한 이들입니다.


나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예시로 잘 살아야하고, 남들하는 만큼 해서는 도태됩니다. 심지어 그 남들하는 만큼을 끌어내는 것 조차 버겁지만, 모두들 그렇게 사는 거니까, 각자의 무게가 있는 것이니까 내 짐만 힘들다고 배려해달라 호소할 수 없습니다. 공평하게 근태가 부족하면 해고되어야 마땅하다 생각하며, 종종 무너진 정신상태가 되어 날 걱정하는 분들에겐 죄송한 에너지를 쓰게 만들고, 동료로써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염려를 끼치는 그런 예외적 케이스가 됩니다. 작지만 똘똘 뭉쳐 무언가를 이루어내가야하는, 생존하는게 제일 큰 일인 보통의 벤처회사에게 저라는 예외적 케이스는 팀웍과 소통에 체감상의 크기야 다를 수 있겠지만 확실한 어려움을 빚게 합니다. 그래서 비교적 큰 구조의 회사를 다니게 되었더니, 나를 향한 편향적인 오해나 너무 많은 시선이 의문도 없이 꽂혀 해명할 기회도 없이 내 자신이 벌집이 되버립니다. 실제로 나를 재단하고 평가하고 단언하는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애초에 나를 비난하고 소문으로 소비할 관심도 없는 다수의 사람들마저도 그럴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며 스스로 고통받는 자해를 합니다.


안 그런 이들과 놓고 보면 정작 그들은 정말 일부입니다.

모두가 그러는 게 아닌걸 아는데도 말이죠.

그런데 보이고 들려서 아는 것들이 아닌 온전히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는 '나'에게는

그런 일이 그저 '일부'가 아니고, 고통과 신음의 '전부'였습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기도 하고, 이런 일마저도 내겐 일부가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분명 모두가 그런 건 아닌데, 그렇다고 이해하는 내게

반복해서 '너는 그래', '너만 그래'가 되었습니다.


나와 다른 모양새의 아픔을 가진 이들, 저마다의 상처가 모두 있다는 말 또한,

점차 '너만 그런 건 아니니까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마'로 들리기 시작했고,

내가 접하는 다른 이들의 다른 고통들 또한 아팠고 부당하다고 느꼈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며 감히 완전히 공감한다는 무례를 저지르진 않아도,

고통이 어떤 것임을 뼈저리게 내 삶의 만듦새에 새기고 새겨졌기에,

나는 ㅇㅇ의 가해자인 누군가가 무섭다,

나는 ㅇㅇ사건의 피해자가 얼마나 힘들까. 아파할까. 얼마나 오래 신음해야할까,

라고 생각되며 내 입장까지 휘감아 멋대로 울고 아파했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배경시나리오와 작화가 있기에

어떠한 폭력이나 슬픔조차도 컨텐츠로 소비할 수 있게 해줬던 즐겨보던 각종 만화,

굳이 울어야할 포인트인가에서 매 회, 매 씬마다 울며 두통을 느껴야했고,

그저 현관에 물이 흐르는데 뭔지 묻기 위해 현관문을 두드린 옆집 할아버지,

매달 수도 계량을 해달라며 빌라의 총대를 매고 당연한 자기 할 일을 하는 이웃의 방문도,

필요한 생계물품을 사람많은 마트가 무서워서 인터넷으로 구매해놓고선 택배원 아저씨들의 두드림도,

택시 아저씨의, 세탁소 아저씨의, 지나가는 아주머니의 내 옷 매무새를 스캔하는 시선과,

사무적, 가벼운 호기심, 호의적 질문에도 늘 나는 '피해의식'과 '피해망상'에 찌든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 집안에 없는 척을 한다던가,

급하게 물을 틀어놓고는 샤워하거나 설거지하는 척 '문앞에 놓아주세요.'라는 말을 했고 그 뒤에는

혹시나 열심히 자기 일 할 뿐인 사람들의 맘을 상하게할까

밝은 톤으로 있는 힘껏 '감사합니다!'나 '죄송합니다!'를 외쳤습니다.


얼굴을 안 비춰서 계량하고, 수도세를 계산하는 일에 피로했을 아주머니에게도,

자주 우리 집에 택배를 가져다 주는 택배원 아저씨에게도,

지난 할아버지의 방문과 다소 호전적인 말투에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우는 나를 보고

대신 미안해하시며 김치를 나눠주기위해 현관문을 두드린 할머니에게도,

나는 설명을 해야 할까?..

그래도 납득 못 받았을때의 내 상처는?

그랬더니 혹시나 대단지 빌라인 이웃들끼리 수군대거나,

불쌍히 여기거나, 내 상태의 '진실성'을 논하게 되버리면?

어쩌다 한 번 용기내서 '남들처럼' 보이려고 치장하고 나가는 걸 보게 되면

그 의구심은 확신이 되진 않을까?

나는 이루말할 수 없이 구차하고 피곤한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정도는 갈수록 심해졌고,

호의와 적의를 머리로 구분할 수야 있었지만,

어떤 사소하고 일상적인 상황에 놓여도 발작과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했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매일을 통증에 시달리고 과거로부터 재생되거나

새롭게 피어나는, 겪게 되는 악몽에 도무지 맞설 뭔가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의 멱살을 잡고 힘들어하고 있는 걸까요.

이 멱살 또한 남같지 못 한, 아프다고, 대견하지 못 한 내 멱살인가 봅니다.


정신과에서는 자살 고위험군, 우울증, 공황장애, 대인기피, 외상후 스트레스, 뇌 신경검사까지 하여 실제로 육체가, 뇌가, 신경이 보통의 5~10배까지 예민하고 정신적으로 아픈 상태라는 선명한 진단을 받게 되어도 보는 건 나 뿐입니다.

비싼 MRI까지 찍어서 더 자세하게 오래전 디스크의 파열이나 탈출까지 알 수 있는 걸 덮어두더라도, 동네 병원에서 Xray, CT만 찍어도 알 수 있는 내 척추의 비정상과, 전신 적외선 체열검사로 전신에 만성처럼 퍼져있는 과열된 통압점들은 기계는 너무도 쉽게 찍어내지만, 가까운 사람에게조차도 내 입으로 말할 때 뿐인 네이밍, 병명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재활운동조차 독이 될 수 있을만큼 체력이나 섬유근골격이 너덜하다고 하지만, 나는 몇번을 나 혼자서 시도할 수 있는 방법들을 시도하고 생긴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회사에 눈치를 보았고, 사실상 병원에서도 불가능하다고 하며 딱히 명확한 제안을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극복하고 덜 아파지지 않으면 "나아질 노력도 하지 않고 비관하는 나약한 환자"로 가까운 측근들에게조차, 나를 격려하는 호의적인 사람들에게도 '노력에 대한 평가'와 '너의 고통이 허상이거나, 실제로 그렇게 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진정성 논의'를 받았습니다. 하다 못해 스트레스로 인해 생긴 두피 염증이 만성이 되고, 고작 이런 작은 후유증도 그저 '더러운 비듬', 자기 관리도 못하는 멀쩡하게 생긴 여자로. 내 끝없는 자존감의 밑바닥을 형성하는 하나가 됩니다. 나는 아픈 것 자체로 힘들어하고 자신을 부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옷을 입고 거울을 볼때도, 샤워를 할 때도, 누군가가 나를 쳐다볼때도 내 휜 척추의 비정상을 비롯해 '나'를 들킬까봐 무서움에도. 온전히 숨기는데는 번번히 실패하거나, 구차한 불쌍한 이를 자처하여 일순간 토해내 버립니다.


나는 내가 정말 괜찮아지길 바라는 만큼 절망하여 끝내고 싶어집니다. 그럼에도 또한 나는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크기로도 해를 끼치기 싫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일하는 것 자체로 남들보다 구차한 일이나 팀웍이나 통솔, 단합에 어려움이 생기고, 집에서 아파하는 것으로도 가족들에게 무거운 책임을 느끼게 합니다. 때로 발작하여 발광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서 최측간 가족들은 함께 피눈물을 흘리며 나를 지탱해주거나 보살펴야 되는 때가 생깁니다. 아마 끝끝내 자의로 해치게 되는 대상이 있다면, 나 자신이겠지요. 이런 내 모습을 나와 같은 일을 겪었고 딱 보통의 남들만큼 아파하고 행복하길 바란 동생들에게도 속편히 보일 수 없고 짊어지게 할 수도 없습니다. 새로운 일터에서 희망을 품고 노력하는 일, 민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시작하는 일. 그리고 단순히 걱정이 아니라 현실로 되는 일. 그만 겪고 싶고, 이런 나를 혼자 비난하고 끌어안기를 반복하는 이 바보같은 짓도 제어가 안 되네요.


내가 이렇게 느꼈다고 그들이 전부 가해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저들은 대부분 아무 악의가 없는 사람들이거나, 제 주변의 사람이었거나,

제게 호의적이었고 안타깝게 여긴 입장으로 건네 봄직한 따뜻한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걸 분명히 압니다.


하지만 내가 이런 것들에 일일히 상처받는 것만으로, 그들의 호의를 까맣게 변색시키는 배은망덕한 년같아서 그런 관심이 고마우면서도 생소해서 헤헤거리거나, 괜찮아요, '오늘은' 별로 안 아파요 같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나 같은 걸 위해 건낸 말이고 마음들이니까,

내가 고독해지고 슬퍼져도, 괜찮다고 해놓고 금새 눈에 띄게 아파해도.

결근하는 어제는 아파서 결근했다고 거짓말쟁이처럼 보이거나,

오늘은 사실은 어제보다 참을만 해서, 기합이 잘 들어가서, 멀쩡해 보이는 거짓말쟁이가 되기를 반복하며,

내가 말해야하는 진정성에 대해 나조차도 믿음이 가질 않았습니다.

누구라도 나를 거짓말쟁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쟁이로 보지 않아주더라도, 이렇게 들쭉날쭉한 나를 대체할 보통의 누군가가 더 편할 것이다-

라며 자신의 구차하고, 이질적인 면들과 들쭉날쭉한 근태 및 언행들이 부끄러웠습니다.

좋아해주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에게 조차도 어떻게 해야할지 공황상태가 되어갔습니다.


차라리 내 만듦새에 모든 기여자들을 그저 술먹고 외치듯 맘껏 비난이라도 해볼 수 있으면,

미친년에 독한년이 되어도 잠깐이나마 개운할텐데.


아빠가 왜 여러 선택지 중에서도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엄마가 왜 여러 선택지 중에서도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급우들이 왜 내가 싫었는지,

그 미움이 내겐 다수의 거대한 덩어리였지만 각 개개인에게는 작은 이유조차도 없을만큼 별일 아니었다는 것,

그 행동들이 내 삶에 지속적인 어떤 영향을 끼칠 거라는 생각/의도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든지,

정말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그들에게 마땅히 조롱받을만한 이유를 만들었다든지,

남자아이들은 그저 청소년기에 호기심으로 나를 대했을 뿐이라든지,

고모부는 어쩌면 처음은 진심으로 우리를 위했고 마지막까지도 그랬을 수도 있을거라든지,

단지 그 안에서 사람이니까 욕심을 조금 채웠을 뿐이던게 그렇게까지 커진거라든지,

고모부 슬하에 내 머리 끄댕이를 잡고, 주먹으로 때려죽이겠다고 노려보는 그 딸과 아들일지라도 한 가정의 아버지를, 그 가정을 몰락시키게 하는 게 내가 되어야한다는 거라든지,

내 허리는 결국 강남이나 인천공항에 위치한 유명한 병원의 비싼 원장 진료까지 받아가며

치료가 아닌 진실을 찾으려 해도 어느 곳은 선천적이라 하고, 어느 곳은 후천적인 것이라 한다든지,

아빠는 정말 내 허리를 망가뜨린 것인지, 엄마는 정말 나까지 아프게 되서 저지른 것인지,

나는 정말로 남들이 멀쩡하게 해내는 것을 해내지 못 할 만큼 아픈 것인지,

그저 내가 남들보다 뒤떨어지고 나약한 것인지,


모든 가능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할수록,

그 모든 가능성의 대상에겐 아무 일이 없지만, 나에게는 하나의 가설이 힘을 실어갑니다.


모든 화살은 하나씩 맹렬하게 내 안에서조차 나에게로 향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사랑하냐고 하는 말. 공감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이렇게 혐오하는데 누가 나를 혐오하지 않겠냐는 생각도 합니다.


내가 부족해서,

내가 이런 몸이라서,

내가 미움받을 만 해서,

내가 매 때마다 옳은 선택을 하지 않아서,

내가 아빠를 공감해 주지 않아서,

내가 엄마를 안아주고 말리지 않아서,

내가 여자라서,

내가 디자이너로 받은 신뢰를 지켜내지 못 해서,

내가 사실은 꽃뱀처럼 보일만큼 무능력해서,

내가 안 괜찮다고 해서,

내가 괜찮다고 해서,

내가 굳이 아프다고 말해서,

내가 굳이 아프단걸 말하지 않아서,

내가 ...해서,

내가 ...해서,

내가 ...해서,

내가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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