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 곳은 여전해. 어쩌면 이제 틀린 것 같아.
안녕, 아빠.
우리 정말 애틋하고 친한 것 같이 편지를 쓰고 있어.
만약 아빠가 여전히 살아있었다면,
난 분명 여전히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고 증오했겠지.
만약 아빠가 간경화로 정해진 시한부 2년을 채우고 자연스럽게 떠났다면,
아마 엄마랑, 동생들이랑, 아빠 보험금 덕에 빚도 좀 줄고 넷이서 힘내서 살았겠지.
하지만,
아빠는 너무나 사랑한다는 이유로 때리고 또 때리던 예쁜 엄마에게
나까지 때려서 평생 아프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삶을 끝내게 되었잖아.
부검결과로는 분명 아빠는 더 살고 싶었던 것 같아.
끝까지 싸웠잖아. 아빠 힘 쎈 건 알아준다니까- 볼링 전국 아마추어 2등에 키도 크고 팔 다리 길쭉하고 평생 자기 마누라, 자식들 때리며 키운 힘, 왜 그 땐 못 발휘했어?
사실은 아빠도 결국 포기한거지?
그래 이만큼 노력하고 아픈 몸 이끌고 살아봐야 바뀌는 것 없고
점점 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만 되고 해코지만 하게 되고 악역이 되어가고
날 바라보는 눈빛에 사랑이 죽어버리는 그 시선들로부터 도망간거지?
아빠,
잘 지내고 있는거야?
아니다.
차라리 응답도 못 할만큼 무의 세계인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죽어서도 세계와 사회가 있는 것이라면, 마지막 탈출구마저 사라져버리는 거잖아.
아빤 그냥 그대로 대답하지 말아줘.
아빠.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내가 열일곱일때 화난 아빠의 얼굴이었는데 기억나?
난 아빠가 금방이라도 날 때릴것 같던 얼굴이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야.
아빠한텐 그렇게 사실은 예뻐하던 큰딸의 마지막이 눈마주치기 바쁘게 도망친 얼굴이지?
있잖아.
나도 몸이 너무 아파.
그리고 마음도 너무 아프고,
난말야,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해서 버티는 것도 싫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때리는 것도 미움받는 것도 싫어.
내 힘듦을 누군가와 나눈다고 해도
이 힘듦이 사라지거나 줄어들지 않을 것을 알아.
그래서 그런 무의미한 고통을 기꺼이 내 힘듦을 덜어주고 싶어하는 사람에겐
더더욱 드러내고 싶지가 않아.
아빠.
그럼 도대체 누구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누구와 살아갈 수 있어?
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있지-
할만큼 해본 것 같아.
나 어느덧 서른두살이야 아빠.
아빤 지금의 내 나이때부터 사랑하는 아내를 때리고
아무것도 알지 못 하는 어린 우리들에게 그 마음에 터져버릴 것 같은 분노를 던졌지?
내 어릴적 기억은 말야.
행복했던 기억은 거의 안 나.
심지어 유일하게 내 앨범 속 빼곡했던 당시의 소꿉친구와의 기억도 아무것도 안 나.
단지,
아빠가 밥 먹다가 반찬통을 내 얼굴에 던져서 내 시야에 빨간 반찬들이 흘러내리던 것과
아빠가 현금이 터질만큼 채운 지갑을 내 얼굴에 던져서 만원짜리 종이들이 방바닥에 흩날리던 것과
엄마가 아빠한테 맞아서 피흘린 채 쓰러졌던 날들과
나보다도 어렸던 여동생이 그렇게 힘쎈 아빠로부터 엄마를 지키려고 달려들었다가
베란다의 화분위로 내동댕이쳐져서 다리가 찢어졌던 기억과
아빠가 무서워서 방문을 닫았더니 그깟 방문 주먹과 발로 한두번 치면 부셔지고
이내 열려서 그 커다란 손과 화난 얼굴로 우리 뺨을 때리던 소리,
아빠가 멋대로 나와 장난치고 싶어서 잠자던 내 팔을 꺾고 깨워 괴롭히다가
내가 울면서 소리지르자 바로 씨발새끼라며 내 허리가 휘고 돌아갈때까지 때렸던거라던가
화해하자고 내밀던 2만원이라던가
아빠.
아빠는 어때.
그 곳에선 그 많던 화도 분노도 슬픔도 외로움도 고통도
조금은 잔잔해졌어?
아빠, 난 그 감정들이 정말 너무너무 지긋지긋하고 끔찍해.
그런데 계속 자라.
내 안에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과 공포가 가득해서 다른 것들이 버티질 못 해.
아빠는 어때.
이제 다 죽었어?
아빠가 견딜 수 없었던 감정들, 고통들,
아빠 안에서 다 죽었어?
아빠는 죽고 싶을 때,
죽기 직전에
엄마랑 내 얼굴, 우리 얼굴 떠올렸어?
그래서 살고 싶었어?
있잖아.
난 이미 핀이 뽑힌 불발탄인 걸 알아.
내가 너무너무 위험하고, 죄없는 누군가를 가해자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걸 알아.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그만 혼자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늘 그 다스림 끝엔 아빠랑 엄마가 낳은 예쁜 동생들 얼굴이 떠올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띠가 둘러진 내 어색한 웃는 사진 옆에서 커다란 것들이 빠져나간 채
주저앉아있는 일을 또 다시 하게 하고싶지가 않아.
나 그 장례식 근처는 도저히 못 가겠어서 거의 15년을 안 갔거든.
가족의 장례식은 늦을 수록 좋잖아.
하다못해 정말 죽을 병에, 누가 보아도 이길 수 없는 자연재해 사건사고로 떠나는게
남은 이들의 마음에 죄책감도 그리움도 덜 할 것 아냐.
나는 이렇게 하찮은 나와 관련된 어떤 감정도 남겨두고 싶은 것이 없어.
그래서 더더욱 스스로 채비하는 일은 최후의 최후가 되더라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있잖아 아빠.
내 바람은 정말 죽고 싶은 걸까?
내 바람은 사실은 살고 싶은 걸까?
이젠 아무렴 어떤가 싶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내 뜻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
아빠,
삶의 너머에 뭔가 있어서 여전히 고통받고 있길 바라진 않아.
그런데 만약,
정말 만약,
여전히 고통받도록 마음이 있고 아빠가 어딘가에 존재하는거라면,
나 좀 도와주라.
나 정말 살고 싶지가 않고,
나 정말 죽으면 안 되거든.
둘 중에 아무거나 제발 도와주라.
아빠 딸한테 하나만 해주라.
이런 부탁 할 수 있는 사람, 아빠밖에 없거든.
죽이든 살리든 도와주라.
난 정말 이제 아무것도,
한발자국도 내딛지를 못 하겠어 아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유리처럼 위태롭고 무엇보다 찬란하고 끔찍한 괴물처럼 보여.
그리고 그 중에 가장 끔찍한 사람이 난데,
그런 나랑 단 둘이 이렇게 오래오래 있다보니까..
너무너무 힘들어.
아빠,
나 말야.
나랑 살아야 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두렵고 끔찍해.
아빠는 아빠를 버렸잖아, 떠날 수 있게 됐잖아.
어때?
끔찍한 나를 떠난 지금은 어때?
아빠는 정말로 자유로워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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