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한사람 Dec 14. 2019

재밌는 언니, 밥 잘 사주는 이모.

주민센터 민원 보조로 일했던 스무살의 기억과 꿈.



나는 부모님 없이 미성년인 삼남매 셋이서 살았지만,

서류상으로 여전히 엄마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기초수급자는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주택공사에서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전세대출 4천만원을 받지 못 했다면, 정말 고아원에 뿔뿔이 흩어지거나 거리를 방황할 뻔 했다.


서울에서 4천만원 전세는 15년전에도 빠듯했다. 또 주택공사에서 이런이런 이유로 전세대금을 대신 관리하고 내준다고 하면, 떨떠름해하는 주인분들이 많았다. 게다가 집 관리도 못 할 것 같은 아이들만 산다니 더 싫어했던 것 같다. 그래서 2년마다 집을 옮길땐 늘 급하게 허락해주는 집으로 이사를 갔다. 직접 포장하고 나르며 고모부의 지인의 트럭을 빌려서 이사를 했었다. 낡은 연립 베란다에 한칸짜리 컨테이너를 넣어서 화장실을 만든 곳이라던가, 무당집을 이웃으로 두고 현관문을 열면 세탁기와 푸세식 변기가 바로 보이는 집에서도 살았다. 당연히 해가 잘 드는 집은 없었다.


주민센터에서는 조건에 부합하는 불우이웃에게 작은 일자리를 제공하는데 내게도 제안해주셨다.

동네를 청소한다거나, 사무 업무를 보조한다거나.

스무살이었던 나는 컴퓨터를 할 줄 알기 때문에 민원부서 사무보조로 잠깐 일할 수 있었다.

평일동안 출근하여 월 80만원을 받을 수 있었고, 당시에 고스란히 고모부께 드렸었다.

또 이제는 기억도 흐릿하지만 다들 따뜻하게 대해주셨던 것 같다.

내가 쓸데없이 예쁘게 꾸민 엑셀이나 워드 문서를 빠르게 작성해서 보여드리면 다들 칭찬해주셨다.

 주민센터내에 출근해서 밥해주시는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덕분에 평일 하루 한 끼는 국과 반찬이 함께하는 식사를 먹을  있었다. 주민등록증도 있고 스무살이 되어 학교를 가진 않았지만, '진짜 어른들'사이에서 그분들의 '잘 했네'라는 칭찬에 목이 말랐고 간절했다. 그리고 그분들은 그런 내 어린 갈증을 매일 채워주셨다. 그 시절의 난 그게 정말 좋았다.


8 공무원이던 언니의 보조로 일을 했었는데, 민원 담당이다보니 매일 같이 자신이 어렵게 산다는 사람들이 찾아와 사정사정하거나 울거나 화를 내거나 욕을 했었다. 정해진 보조금이 부족하다는 얘기들이었다.

공무원 언니는 익숙하게 그들에게 불가한 이유를 설명해 준 후 외면한 채 업무를 보셨지만, 나는 그러지 못 해서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런 내 눈빛을 보고는 내게 달려들어 똑같이 울고 보채기 시작했다.


선생님같은 공무원분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나이도 많고 몸도 아프고 아들이 돈도 안 벌어다줘요. 이 돈 가지곤 살 수가 없어요. 아휴... 선생님은 좋겠어 이런대서 일하고.. 나는 진짜 사는게 너무 힘들어.


나는,

공무원도 아닐 뿐더러 몸에 지병도 많고 서류상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기초수급자도 될 수 없고 미성년의 어린 동생들이 있어서 진통제와 우루사에 의지하면서도 그 돈이 아까웠던 노동자였다. 스무살이었고.

뿌리치지 못 하고 계속 그런 하소연을 듣다가 나는 결국 울었고, 공무원 언니가 나서서 '이 학생이 더 힘들고 아픈데 여기 나와서 일하고 있는 거니까 괴롭히지 말고 가요 좀!'라고 하자 한발짝 물러서더니 몇시간을 더 '아휴.. 아휴.. 나도 진짜 아프고 힘들어어.'를 외치다 돌아가셨다. 나는 그 분이 갈때까지 울면서 문서들을 작성했다. 기초수급자로 등록된 후 생활 보조금을 받던 50대 아주머니셨는데, 나이때문에 팔다리가 힘들고 배운 것이 없는데다, 성인인 아들과 살고 계셨고 아들이 대리운전기사로 월 150 넘게 버는 것을 들켜서 보조금이 끊긴 이유로 오신 분이었다.




추운 겨울 후원물품으로 두꺼운 이불이랑 쌀, 라면, 직접 담근 김장김치들이 잔뜩 들어왔었다.

공무원 언니는 어디 창고에서 구르마를 꺼내오더니 양천구 신정동이라는 언덕 천지인 산동네였는데, 거기다 쌀이랑 이불을 싣더니 다녀온다고 하고 나가셨다. 맡긴 업무를 혼자 보고서 어디 다녀오셨냐고 물어보니까,

할아버지랑 초등학생 손녀가 단 둘이 사는 집이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맨날 소주 먹고 욕하고 때려서 그 손녀는 장롱에 맨날 숨는다고도 했다. 게다가 식권같은 건 중간에 고모가 가져가서 그 어린 여자아이 밥을 챙겨줄 사람, 여자어른이 아무도 없다고 말하며 내 얼굴을 보지 못 하셨다.


주민센터에서 주는 후원물품은 그걸 받을 수 있는지 아는 친구들만 받을 수 있다보니까, 오히려 영악한 주변 친척 어른들이 중간에서 챙겨가고 실제로 받아야할 사람들은 몰라서 못 받으니 맨날 잔뜩 남아서 공무원들끼리 나눠가지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그래서 구르마에 미리 챙겨서 그 여자아이한테 가져다주러 다녀왔다고.. 나 역시 소녀가장에서 막 벗어나서 성인이 되었던 시점이라 그 때 그 언니보면서 나중에 꼭 잘 살면 가까운 곳에 사는 어린 소녀들의 좋은 언니, 이모가 되어줘야지-라고 꿈을 꿨던 것 같다.


내가 만약 내 생각보다 오래 살게 되고 돈을 더 많이 벌게 된다면,

꼭 같은 동네에 사는 재밌는 언니, 밥 잘 사주는 이모가 되어야지-

라고.


서른두살 끝자락의 나는

집구석에서 나가기도 어려워하는 공황장애에 대인기피증까지 얻어서

다른 소녀들을 안아줄 수가 없다.


그래서 미안해.




Photo by Chau Luong on Unsplas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