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그대로일 뿐인데.
내 학창시절의 끝까지 함께 했던 친구는 딱 3명이다.
그 친구들과 스무살 무렵 멀어지고.. 정확히는 내가 피하기 시작하면서 난 그 뒤로 "친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관계를 못 만들었다. (물론 사회생활을 일찍 하게 되며 만났던 선배, 형, 언니들은 친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인간관계가 없는 지금의 내게는 친구보다도 더 소중한 인연들이다.)
내 학창시절을 추억하면 당연하게도 그 세친구만으로 꽉 차 있는데, 아마 보통의 학창시절을 추억할 때 떠올릴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을 준 존재들이다. 멀어졌지만, 여전히 특별하다. 하지만, 다시 다가갈 수도 가까워질수도 없을 것 같다. 아마도 그 친구들은 서운하거나 화가나거나 아니면 새로운 친구들이 있기에 아무래도 상관없거나겠지만. 그 친구들이 나에 대해 서운함등은 부디 없이, 나보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 아무래도 상관없이 지내길 바라는 게 이기적인 내 가장 큰 바람이다. 내가 너무 변해버려서, 친구들이 생각하고 알던 아름이라는 친구로는 어울릴 수 없음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이전의 나를 표방하고, 속으로는 점점 일그러지고 곪는 두 가지의 나자신에게 괴리감을 느꼈다. 나보다 더 평범하게 공감해주고 같이 아무렇지않게 어울리고 연례행사에 어울릴 수 있는 친구들이 많을 녀석들이라, 친구로써 나는 보다 부족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못난 생각에 먹혀갈 때였었다. 한창 외롭고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들고 슬플 때. 친구들이 있음에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이야기를 나눌때마다 나는 외면하고 싶은 내 현실과 그들의 현실이 다름을 자꾸만 비교하며 스스로 상처를 만들어갔던 것 같다.
그 나이 또래 흔히들 하는 말이다.
우리 엄마 아빠 너무 짜증나.
아, 이번에 그 옷 갖고 싶은데 어떡하지? 아빠한테 뭐라고해서 돈 받지?
이거 어디껀데 예쁘지않냐.
대학교 과제 하기 싫어!
이번에 뭐하고 놀까? 어디가서 쇼핑할까?
얼마전 TV프로그램 동상이몽에서도 나왔던 장면인데,
친구의 집에 가면 평범한 가정환경을 접할 수 있다. 친구의 가족들과 함께 차려진 밥상을 먹을때면 나도 모르게 울컥하게되고 부러워하게 되었는데, 그런 나 자신이 몹시 싫었던 것 같다.. 친구의 당연한 권리와 행복조차도 부러워하고 어느때는 시샘까지 하게되는 그런 나 자신이 어찌나 한심하고 속상했었던지-
친한 친구중 한명은 대학교에 진학하여 전공을 내가 가고싶었던 디자인과로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나는 고등학교 3학년 겨울에 스타트업에 조기취업하여, 첫번째 회사에 출퇴근을 하느라 정신없을 때였다.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친구들이 불러서 친구네 집에 갔었다.
학교다닐때도 그랬듯, 미술과제, 디자인과제를 내게 도와달라고 했다. 제출이 코앞인데 못 하겠다는 것이다. 학교다닐때는 내가 나서서 "대신 해줄까?"하며 어떤 때의 수행평가때는 다섯명분의 홈페이지를 디자인하고 코딩도 했을 정도로 불편하지 않았었는데. 수업도 제대로 안 듣고 놀기만 하다 벼락치기해도 그냥 다같이 웃어넘기며 열심히 도와주었고, 정작 내 과제는 미완성으로 제출하거나 점수가 더 낮아도 친구에게 도움이 되었단 생각으로 뿌듯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슬펐고, 화났고, 씁쓸했다. 그 뒤에 만났을 때는 "교수님이 아름이 니가 해 준 내 과제를 학교 어딘가에 걸어두신대!" 라고 기뻐하는 친구를 보며, 역시 나는 무언가 답답함을 가슴으로 느끼게 되었고, 아직도 어렸던 나는 도망치는 법밖에 몰랐다. 단지 디자인만 하고, 나같은 아이도 회사에 도움이 되고, 그 보상으로 받는 얼마의 급여로, 동생들과 배달음식도 종종 먹을 수 있는 그 작은 행복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따금씩 돈도 버는 네가 사! 같은 대학생인 친구들의 말에 당연하듯 계산을 하면서도, 나는 머릿속으로 생활비와 급여중 한달 내 개인 용돈인 20만원을 계산하기 바빴다. 친구사이에 그런 것이야 당연한 것인데도, 그렇게 계산하기 바쁜 나는 속이 피곤했다.
당시 실수령액은 월 100만원정도로, 그 중 내 용돈 20만원으로 나는 강서에서 강남까지 출퇴근비와 밥값등을 충당하고 있었다. 용돈을 제외한 돈은 생활비에 보탰고, 고등학교 재학동안 아마도 후원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고 생각되었던 생활비를 친척중에 한 분이 조금씩 충당해주셨다는 추측으로 그 분께 월급통장째로 드렸었다. (..추후에 써내려갈 예정이지만, 이 분과는 6년뒤 횡령사건으로 형사, 민사 소송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친구들보다 빨리 돈을 벌었지만, 가난했다. 중학교때 넉살좋은 연년생 동생이 부모님께 졸라서 샀던 운동화와 카라티, 카고바지만 반복해서 입고 주머니속에는 티머니교통카드 하나만 달랑 넣고 스무살의 나는 출퇴근을 했었다.
한 번은 막내딸이던 친구A가 스무살이 넘어 가출을 하게 되었다.
어릴때 그렇듯 약간의 방황이나 반항은 해도 가출은 처음이었던 친구A는 자신도 학생때 안 하던 가출을 스무살이 되어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집안일이라던가를 성실히 도맡아 하던 막내딸이었는데, 부모님의 훈육이 지나치다 느껴 서운함을 토로하기위해 가출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 친구가 당연히 비행때문에 하는 가출도 아니고, 얼마 안 가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친구B와 같이 지내거나 근처 찜질방 같은 곳에서도 지내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부모님들은 당연히 걱정하고 큰 일이었지만,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저 "가출이란 것도 할 수 있구나. 곧 돌아가면 사이가 다시 좋아질까? 이번엔 화내시지 않고 반겨주시겠지.." 정도 생각한 것 같다. 그게 내 잘못이겠지.
며칠 뒤 평소 오래 뵈었던 친구A의 어머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어머님은 당연히 부모로써 걱정으로 가득하여 나에게 친구A의 안부를 물어왔고, 나는 그런 어머님께 곧 돌아갈꺼라며, 친구와 입은 맞춰야했기때문에 걱정 너무 하지 않으시면 좋겠다, 이상한 곳에는 안 갔을 것이며 아마 친구네 있는 걸로 안다-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 때 내 음성 톤이 "다 잘 될겁니다. 토닥토닥."하는 긍정적인 톤이었던 것이 문제로, 어머님은 "너는 친구A 걱정도 안 돼? 어? 지금 재밌어? 웃겨? 네 부모님이 그리 가르치시든?"하며 다소 흥분하시어 말을 하기 시작했었는데, 그동안 내 기억속에 친구A의 어머님은 "우리 망나니같은 딸이랑 친구해줘서 고맙다, 반찬같은거 얻으러 오렴."의 이미지만 가득했던 분으로.. 그저 딸의 안부가 걱정된 엄마 입장에서 하신 말들이, 내게는 글자 그대로 상처가 되어버렸다. 내가 어떻게 비춰질지가 무서운 겁쟁이가 될 때마다 이 말이 자꾸만 맴돈다.
더이상 통화할 수가 없을 것 같다며 죄송하단 말을 드리고 통화를 종료한 후, 통화로는 나도 가슴이 너무 뛰어 대화가 불가능할 것 같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박박 지워내며, 문자로 이어갔다.
사실은 친구가 어딨는지 알고 있다. 분명 얼마 못 가 돌아갈 것이다. 처음 가출한 것이고, 본인도 가출까지 하게될 줄 몰랐다 했으며, 이래이래서 친구가 서운함으로 가출한 것이다. 금방 돌아올 것이니 부디 너무 화내시지 말고 안아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릴때부터 저를 봐와서 잘 아시는 어머님께 그렇게 지금은 계시지도 않는 부모님 얘기까지 듣게 되어 솔직히 좀 충격이 크다. 이렇게 걱정하게 되지않게 친구에게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셨으면 좋겠다.
라고 건방지게 마지막 문장을 추가해버렸다. 이 일로 친구의 어머님이 딸의 걱정과 나에 대한 분노로 폭발하셨고, 친구는 곧 집으로 돌아갔으며, 우리 엄마를 화나고 슬프게 한 너랑 친구로 못 지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자기였다면 친구의 엄마에게 그런 말 안 했을 꺼라며.
내가 들었던 말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었고, 그저 내 대처에 대한 아쉬움과 질타만이 가득했던 친구의 말에 나는 그저 함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얼마 뒤 다시 친구A에게 연락이 왔고, 나는 반가움과 걱정, 무슨 말을 들어야할까 두려움으로 만나러 갔었는데,
나라면 너네 엄마한테 그렇게 전화 안 받고, 문자 안 해. 우리 엄만 너한테 너무 화났고 용서 안 하실꺼야. 너가 내 입장을 생각해서 그렇게 문자한 건 알겠어. 그치만 우리 엄마 생각도 해줘야지. 그래서 나도 너랑 친구로 안 지내려 했는데, 너가 보고싶더라. 내가 너 많이 좋아하나봐. 용서할테니 다시 우리끼리라도 잘 지내자, 응?
라는 얘기였다.
이 날의 대화 역시 나는 누군가 내 목을 꽉 쥐고 있는 기분으로 세어나갈듯한 말들을 꾹꾹 눌러담을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친구는 아름다운 대화와 교감으로 이뤄진 친구의 밤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날 불러냈겠지만, 난 친구의 바람과 달랐다. 나는 더욱더 그 친구를 다시 보기가 힘들어졌다. 나는 내가 친구들처럼 당연히 생각해야할 것들을 놓치고 있고, 친구들이 모르는 포인트에서 가슴이 답답해지게 된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는데, 결국 친구들로부터 도망치게 되었다.
얼마 뒤에는 친구A와 B가 함께 우리집에 와서는 자신들에게 소홀하거나 대처가 별로였다는 나를 용서하겠다며, 자기들이 용돈과 학교다니면서 주말알바를 할테니, 호텔방을 하나 잡아 여자들 셋이서 파자마파티를 하자 신나 있었는데- 나는 쭈뼛대며 그럴만한 자금적 여유도 시간도 없고 얼마전 친구A와의 일도 있었고 하며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런 내게 두 친구는
너는 아무것도 준비 안 해도 돼. 우리가 대신 해줄께!
하며 당당한 기세로 말을 해주었다. 그런데 난 여기서도 친구들의 기대와 바람과 달랐다. 그런 친구들에게 고마움으로 감동하기보다는 도움받는 친구가 되고 싶지도, 그런 파티를 할 시간도, 그런 마음도 여유도 없었고, 친구들에게 용서와 배려를 받아야하는 친구가 된 나 자신을 슬퍼하며 연락을 피하게 되었다.
그렇게 멀어졌다.
이렇게 쓰고보면 친구들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친구들을 잃게 된 것은 나와 내 환경이 변했고, 그 다름을 극복하지 못 한 내가 이유라고 생각하며 친구관계라는 것을 삶에서 포기하게 되었다. 그저 이따금씩 현실적인 걱정과 근심은 모르는 어릴 때의 친구들과 나눴던 즐거운 날, 바보같이 우스꽝스럽게 굴어도 되었던 날들을 회상할 뿐이다.
그들은 사건이 터졌을 때 제일 먼저 내가 갇혀있던 경찰청 강력계 형사반으로 쫓아와 나와함께 형사들의 눈총을 받으며 대리석 바닥에서 신문지를 덮고 뒤척이기 까지 해줬던 고마운 친구들이다. 입원했을 때도 하루가 멀다하고 내 병실에 찾아왔었고. 가끔씩 우리 삼남매가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방치한 라면먹고 남긴 설거지도 집에 놀러왔다가, 아무말없이 야무지게 쓱싹쓱싹 해주고 갔던게 친구A다. 친구A는 나를 119로 비교하기도 했었다. 언제나 부르면 달려와주는 친구고, 외향적이었던 친구A에게는 어울리던 고정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과는 별개로 같이 신나고 요란하게 어울리진 못 해도, 편하게 TV나 보며 뒹굴거릴 수 있는 친구라서 좋다고 말해줬었다..
친구들은 그대로일 뿐인데.
나만 달라진 것일 뿐. 도망치고 함구했던 미숙하고 나약했던 내가, 아직도 미안하고 속상하다.
고등학교시절 나에겐 꿈과 미래 아무것도 없었다.
인터넷 서핑, 당시 대세였던 다음 카페등을 뒤져서 튜토리얼등을 따라하고 공부하며 피곤하고 외로운 것들 다 덮어두는 새벽에 나는 가장 살아있었는데, 그마저도 허리통증이 점차 심해져서 점점 어려움을 느껴갔던 것 같다.
내가 중3때 입원했을 무렵 내 병실 TV에서는 24시간 방송하는게 홈쇼핑뿐이었는데, 다정할 때의 아빠랑 통화하다가 새벽에 본 HP데스크탑세트 홈쇼핑 방송만 보고있다-라고 말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가 아프고 입원했을 때는 나는 참 못나고 부족한 딸이었는데- 아빠는 아빠이고 아빠여서, 자신이 겪었던 그 아프고 외로운 시간들을 딸인 나도 겪고 있다 생각하면서도 표현방법에 서툴러 아주 가끔씩 그렇게 불쑥 선물이나 용돈을 주셨던 것 같다. 당시 철없던 내게는 아빠는 평소엔 폭력적이다가 사과할때라던가 돈 한푼 두 푼, 선물 한번씩 주면 다 괜찮은 줄 아는 이상한 아빠로만 비춰졌었지만.. 회상할수록 아빠가 아프고 그립고, 그렇게만 생각했던 나 자신이 밉다.
아빠는 그 홈쇼핑방송이 한 번 더 나오면 퇴원선물로 사주겠다 하셨었고, 그 당시에는 꽤 고사양이어서 더없이 디자인을 혼자 공부하고 밤새며 행복해했었다. 그리고 몇년 뒤 우리끼리만 있게된 고등학교시절, 전학가서 새로 알게된 친구들과 빨리 친해져 평범하게 지내고 싶었던 내 바람으로 우리집에 우르르 놀러오게 한 적이 있었는데- 좁고 낡은 우리집에 놓인 그 컴퓨터를 나는 자랑스레 아빠가 사줬던 것이라 말했었지만, 친구중 한명이 별 생각없이 "뭐야, 완전 똥컴이네"라고 했던 말이 생각지도 못 하게 아직까지 상처가 되었다. 하하. 그래서 그렇다고 하긴 뭐하지만, 데스크탑이나 각종 기계들 욕심이 유난히 많은 것 같다. 게다가 그 날은 음식물쓰레기 처리에 미숙했던 상태로 현관에는 아침 등교할때까지 없었던 구더기가 현관을 도배하는 어마어마한 풍경이 있었던 날이다. 나는 전학가서 처음 알게된 친구들앞에서 울며 도망쳐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 땐 그 구더기들이 친구들에게 비춰지는 내 인생과 모습같아서 쪽팔리다는 어린 생각에 도망쳤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고 도망쳐버렸던 나 자신이 참 부끄럽고 그렇다. 그 때 정신차리고 보니, 도망쳐버린 나와는 달리 무리중 친구 두어명이 그 구더기를 치워놓았었다. 정말 미안하고, 고마운 기억이다. 친구들을 부르긴 했는데 내줄 것이 하나 없던 별것아닌 현실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던 날이기도 했다. 친구를 집에 데려오면 당연했던 것들이 없어졌구나. 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이 더 있구나. 엄마가, 아빠가 이런 일도 했었구나-하고 하나씩 알아가게 되었다.
글재주 없는 제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로 공감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하고 죄송하지만,
도와주시던 친척분들과의 일을 쓸 차례부터 어디서 어디까지 써야할지 막막함에 이어쓰는 게 늦어졌습니다. 저는 최대한 평범하게 잘 살아가려 하고 있어요. 누구나 그렇듯, 실패와 재기, 도전과 포기를 거듭하며 열심히 헤엄치고 있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