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 16
봄이 오면 냄새로 안다. 촉촉하게 녹은 흙냄새, 막 돋은 연둣빛 풀냄새, 새그러운 꽃냄새. 그리고 코에 닿으면 웃음이 나버리는 동동주냄새.
나는 80년대에 지어진 주공아파트에서 나고 자라 직장생활까지 했다. 오래된 동네에 살다 보면 아름드리나무에서 새 잎이 돋고 꽃이 필 때, 그 아래 벤치에서 딱 두 분의 아저씨들만 참석하는 작은 술판이 열린다. 동동주 한 병에 두런두런 별 흐름도 없이 이어지는 말 한마디가 안주다.
우리 동네에는 벚꽃나무가 많아서 봄이면 동네 벚꽃축제가 열렸다. 아이들 그림대회와 주민 노래자랑이 열리고, 단지 관리사무소 옆 공터에는 전을 부치고 떡볶이를 끓이는 장터가 섰다. 그리고 알큰한 냄새를 솔솔 풍기는 동동주 코너도 있었으니, 다들 꽃그늘 아래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노는 거다. 아파트 사이사이의 잔디밭이 곧 한강공원 부럽지 않은 피크닉 장소가 되는 것이다.
제일 인기 있는 자리는 등나무 지붕으로 꾸며진 벤치다. 은은한 등꽃냄새를 맡으며 앉아 기분 좋게 막걸리 한 잔씩 걸치다 보면 고개를 젖힐 때마다 포도알처럼 탐스러운 꽃이 보이고, 그 조롱조롱 달린 모습에 그만 그 상태로 고개를 들고 가만히 지켜보게 되는. 아 꽃그늘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그래서 아기는 개나리 꽃그늘 아래 신을 벗어두고 갔나, 그냥 하염없이 예쁘고 좋은 생각이나 늘어놓게 되는 그 여유가 좋다.
아직도 나무가 커다란 오래된 동네를 걸을 때 꽃냄새를 깊이 마시며 코를 킁킁거릴 때면 문득 바람에 실린 동동주 냄새가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 따뜻한 봄볕으로 데워진 벤치와 사늘한 바람, 그 아래서 펼쳐지는 작고 조용한 술자리가 떠올라 괜히 정겹다. 세상 모든 것들이 아른하게 녹아내리고 연해지는 계절. 겨우내 못했던 볕바라기를 위해 골목골목 잠시 거둬두었던 작은 앉을 거리를 가지고 나오게 되는 계절. 사람 마음을 다 풀어지게 하는 향그러운 꽃냄새와 출처모를 알큰한 동동주냄새가 있는 봄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