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 17
비가 또 왔다. 요즘 비가 잦다. 봄이 오려나 하다가도 또 매섭게 찬비가 내린다. 비 오는 날 젖은 흙냄새가 좋다. 나는 이 냄새로 곧 비 올 날씨와 비가 지나간 날씨를 안다. 비 온 뒤 아직은 묵직한 구름들 사이로 파란 하늘이 나올 때, 그 하늘은 오랜만이라 참 맑고 깨끗해 보일 때. 그러면서도 여전히 남은 무거운 구름들이 언제 비를 쏟아 내릴지 알 수 없을 때. 그럴 때 바닥을 보면 또 새로운 세상이다.
좋아하는 영화 중에 '무지개여신'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의 한 장면에서 비 온 뒤 무지개 뜬 하늘을 물웅덩이에 비춰보는 앵글이 등장한다. 나는 그 영화가 좋아서 곧잘 비 온 뒤 생긴 물웅덩이를 거울삼아 하늘을 들여다보게 된다.
좋아하는 노래 중에는 '밤의 공원'이라는 곡이 있다. 최정훈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도입부의 '비가 왔었나 봐'를 들으면, 나는 비 오는 공원의 젖은 땅을 밟고 서 있다. 곳곳에서 나무와 풀이 숨 쉬는 촉촉한 냄새가 밀려든다. 비가 왔던 공원에는 곧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비춰 보이는 물웅덩이가 생길 것이다.
비는 내리고 구름은 떠있고, 하늘과 물웅덩이는 만날 수 없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희한한 캔버스는 오히려 내 눈으로 직접 들여다보는 하늘보다 한결 운치 있고 맑고, 물결이 일고 흐르고 마른다. 다시 해가 모습을 드러내고 땅이 마르면, 풀냄새와 흙냄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쨍한 햇볕 아래 몸을 숙여 숨는다. 나는 그 웅덩이 속 하늘을 보면서 막연하게 생각한다. 또 날이 금세 개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