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엽서

고 박완서 작가님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으며

by 루파고
나는 마모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게 기를 펴고 싶었고, 성장도 하고 싶었다.



책을 읽는데 이 엽서가 툭 떨어졌다. 한참 빠져들고 있었는데 마치 하나의 선물 같았다. '나는 마모되고 싶지 않았다'는 한 줄의 글이 나의 가슴 아주 깊은 곳에 꾹 눌러 봉인해 뒀던 뭔가를 푹 찌르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마모된다는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민족의 격변기를 겪으며 복잡한 심경을 문학적으로 소환해 낸 박완서 작가님의 심경을 어느 누가 느낄 수 있을까? 마모되고 싶지 않았을 거다. 가족이 하나둘 줄어들고 살고픈 인간적 본능과 안 죽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본능을 이 소설에서는 복잡한 심경을 통해 표현하고 있었다. 마모되고 싶지 않았을 거다. 한창 꿈을 펼치고 살았을 그녀는 사회적 환경에 의해 마모되고 싶지 않았을 거다. 그 환경 자체도 성장통의 일부라고 받아들였던 그녀였지만 어린 시절 억눌린 삶의 무게에서 자유롭고 싶었을 것이고 꾸었던 꿈을 향해 도전하고 성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엽서에 적힌 짧은 글은 너무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반문하고 있다.


너는 이미 마모되었는가?
자유롭게 기를 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생명을 잇기 위해 한 끼 식사를 걱정하고, 삶과 죽음 앞에 정면으로 섰던 당대의 사람들이 감당했을 고통을 어찌 영화나 소설로 모두 표현될 수 있을까. 다시 느끼지만 이 시대에 살고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지 하는 다짐을 재차 해본다.





박완서 작가님 1955년 사진이란다. 결혼 후 집 앞에서 촬영한 사진,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소녀 같은 밝은 표정은 머릿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직접 만나본 건 아니지만 나이가 들어 찌글찌글한 주름이 늘어났을 뿐, 깊고 검은 눈동자와 밝은 미소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소설을 쓰고 있다는 작가로서, 진정 처음으로 저런 작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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