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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부엌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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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Oct 08. 2021

이곳은 회사인가, 식당인가? 아홉 번째 이야기

동서양의 이상한 만남, 이런 요리를 보았니?

오늘 기발한 발상으로 요리를 개발했다. 앞으로 이 요리는 매우 자주 해서 먹을 것 같다. 꼭 한우가 아니어도 좋을 것 같다. 야채와 버섯만 있어도 맛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이 요리는 소스의 환상적인 궁합으로 화룡정점의 꽃을 피웠다고 자찬해 본다.



그동안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메뉴를 만들어 먹곤 했는데 이건 오늘 아침 코코넛 밀크로 라떼를 만들어 먹다가 떠오른 아이디어를 실천한 거다. 동남아 여행을 가면 코코넛 밀크를 어지간히 빨고 다녔는데 며칠 전 인터넷을 둥둥 떠다니던 녀석을 주문해 드디어 캔을 땄다. 이렇게 캔으로 유통이 되는지 알았다면 진작에 주문해 먹었을 텐데... 아무튼 앞으로 자주 주문하게 되겠지만.



마침 사무실로 식사 초대를 했는데 이 기발한 요리를 최초로 선보이게 됐다. 나는 냉동실에 곤히 잠들어 있던 한우 투쁠 채끝을 꺼내 찬물에 담갔다. 이렇게 해동하면 생고기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오늘은 식수 인원이 많지 않아 한우는 절반도 쓰지 않았다. 사진으로 봐서 모르겠지만 엄청 두툼하게 썰었다. 그릇이 절대 작지 않은데 몇 덩어리 없어 보이지만 엄청난 양이다. 여기에 코코넛 밀크를 반 통 정도 넣었다. 물 대신 이걸 쓰는 거다. 코코넛 밀크에 재운 것 같은 느낌이다.



한우가 코코넛 밀크가 친해지는 동안 같이 어울릴 녀석들을 도마 위에 올렸다. 마침 냉동실에 제주도에서 공수한 브로콜리를 한 덩어리 찾아냈다. 소고기엔 브로콜리가 딱이지. 여기에 양송이, 통마늘, 청양고추, 양파를 준비했고 왼쪽 끝에 있는 마라 소스가 이 요리의 핵심 요소 중 하나다.

* 호박은 된장찌개용이다. ㅎ



속이 깊은 냄비라 쌓아도 티가 안 난다. 때깔이 아주 곱다.



야채 위에 마라 소스 두 봉을 넣었다. 좀 더 넣을까 싶었지만 너무 자극적인 맛을 목표했던 게 아니라 자제하기로 했다. 그리고 참깨 한 무더기, 후추 적당량, 참기름 눈대중 양, 생강즙, 레몬즙을 넣고 불을 올렸다. 너무 오래 끓이면 채끝의 맛을 잃으니 적당하게 익혀야 했다. 그래도 투쁠인데 체면은 지켜 줘야지. 안 그래도 정체불명의 요리로 한우의 위상을 망가뜨리고 있으니.




회사 탕비실의 열악한 환경이 이 사진 하나로 드러난다. 2구짜리 인덕션과 냄비 몇 개로 별 걸 다 만들어 먹는다. 야채만 넣고 끓인 된장찌개다. 여긴 양송이 대신 표고버섯을 넣었다. 야채와 버섯 한 뭉텅이로 두 요리를 동시에 진행했다.



어느 정도 익었다 싶었을 때 냉동실에 있던 모차렐라 치즈를 한 움큼 던져 넣었다. 고소한 맛을 배가시키기 위함이다. 보통 떡볶이에도 모차렐라 치즈를 넣는데 이게 이런 류의 요리에 환상적인 궁합을 만든다.



내가 만들고도 의도하지 않은 애매한 비주얼에 실망스러웠다. 이렇게 국물이 많을 줄은 몰랐는데... 물은 한 방울도 안 넣었건만 왜 이렇게 수분이 많은 걸까 싶었다. 비주얼도 영 맘에 들지 않고...



그러나!

예쁜 접시에 담고 보니 꽤 쓸만한 녀석이 되었다. 게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맛에 탄복하고 말았다. 적당하게 익은 한우도 그렇지만 밉상이었던 국물 맛이 기똥차서 할 말을 잃었다. 이런 맛이 나올 줄이다.

고소하고 매콤하고 보드랍다. 마라, 코코넛 밀크, 모차렐라 치즈의 찰떡궁합 앙상블이다.

국물을 밥에 비벼 먹으니 세상에 이런 맛은 없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나의 이 발명품을 누가 갖다 쓰는 건 아닐까? ㅋㅋ

다음에 또 만들어 먹어야겠다. 이 맛을 잊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기껏 식사초대를 받은 손님께 정체 모를 퓨전요리를 맛 보여 드려 실망하실까 걱정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가시는 길에 쇼핑백에 태추 단감을 한 아름 담아 보냈다.


태추 단감은 이맘때만 먹을 수 있는 귀한 단감이다. 원래 껍질째 먹어야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데 나처럼 씹는 게 귀찮은 사람은 믹서에 갈아서 먹어도 맛있다. 이렇게 먹으면 꼭 단호박죽 비슷하다. 달달한 게 무한 흡입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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