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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Nov 26. 2021

46.육즙이 제대로 느껴지는 돼지, 송파 인생돼지

주차장 수준의 퇴근길을 뚫고 간 보람이 있었다

난 줄 서는 걸 매우 싫어한다. 30분 전에 미리 전화를 해서 예약 아닌 예약을 했음에도 자리가 없어서 기다려야 했지만 요즘 같은 시국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꽉꽉 찬 걸 보니 맛집이 맞긴 한가보다 싶었고 어차피 먼 길을 달려온 걸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나를 이 먼 곳까지 끌고 온 녀석은 십수 년 전 내게서 돼지고기의 참맛을 깨우쳤다고 했다. 그리고 몇 달 전 우연히 알게 된 인생돼지라는 식당에서 내가 캠핑장에서 구워준 돼지고기에 버금가는 수준의 맛에 반해 소개하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워낙 음식에 까다로운 나를 꼬셔 왔다가 허튼소리가 나올 것이 고민되어 쉽사리 결정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번에는 자기가 살 거라며 초반부터 설레발을 떨며 이곳을 향했다. 문제는 7시 퇴근길 강남은 주차장이나 다를 바 없는데... 삼성동에서 송파까지 가는 길은 보나 마나 뻔했다.



흠~ 자리가 없었다. 이런~ 이런~ 아무튼 예약 걸어놓고 자리 날 때까지 식당 내부의 빈자리가 날 것을 기대하며 매의 눈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어떤 누구도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쨌든 기다리는 수밖에...






삼십 분 정도는 기다린 것 같다. 인내는 인내다. 손님이 가득한 식당이라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님이 많은 건 이유가 있는 거니까.


기다리는 동안 어떤 부위를 먹을지 고민해 결정한 게 바로 이 조합이다. 삼겹살, 목살, 항정살.

난 개인적으로 목살을 즐긴다. 돼지고기 먹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다. 항정살이든 삼겹살이든 그 부위가 가진 특색이 있지만 목살은 잘만 구우면 소고기 못지않은 육즙과 식감을 즐길 수 있다.

난 직화구이용으로 구기를 구울 때 최소 2.5cm 이상으로 잘라 굽는다. 적절하게 불 조절하면서 육즙이 새지 않게 이리저리 돌려가며 굽는 게 핵심이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일이...

직원이 고기를 구워준다. 이거 참~ 어찌나 황송했는지... 요즘 게을러져서 고기 굽는 게 귀찮아진 상황인데 내 맘을 어찌 이리 잘 아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고기 두께도 만족스럽다. 좀 더 두꺼우면 좋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그래서 나를 이 식당으로 끌고 왔구나 싶었는데 설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여기 와서 돼지고기를 먹었는데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일반 고깃집에서 내가 구워줬던 고기 수준을 느낄 수 있었다고.



드디어 고기가 익기 시작했다. 남이 구워주는 고기를 보노라니 손이 할 일이 없어서 사진을 열심히 찍어댔다. 가끔 고기 구워주는 식당에 가면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고기를 잘 굽는다 해도 이 분들보다 더 잘 구울 수는 없는 법이기에 그들의 여유로운 손길을 감상할 뿐이다.

노릇노릇 잘 익어가는 항정살이 1번이다.

그다음은 촉촉한 육즙이 가득한 목살. 목살은 너무 구우면 본연의 식감을 맛볼 수 없으니 어느 정도 익었다 싶으면 후딱 입으로 가져가야 한다. 너무 바삭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절대 안 된다.



계란찜을 받고 보니 산더미다. 잊고 있었지만 뚝배기에서 열기가 나와 부풀어 있는 건데 깜짝 놀랐다. 요즘 통 먹지 않았던 걸 기억할 수 있었다. 몇 년 전 계란 대란이 났을 때 서래마을 입구에 있는 육갑식당에 줄기차게 다녔던 드나들었었다. 자전거 동호인들 데리고 자주 가기도 했었고... 그때 육갑식당이 좋았던 건 한창 유행했던 이베리코 맛집이기도 했지만 그 비싼 계란찜을 무한 리필해 줬던 과감한 서비스 정신에 반했던 거다. 너무 자주 가서 너무 친해져 버린 매니저들이 군대 입대하는 등 뿔뿔이 흩어져 나도 발길이 뜸해졌는데 아무튼 그때 기억이 솟아났다.



이제 먹기 좋을 만큼 익었다. 두툼한 고기들이 아주 맛깔스러워 보인다. 역시 숙련된 구이 솜씨를 인정하게 한 건 전혀 질기지 않은 식감에 있다. 요즘 치아가 신통치 않아 걱정이었는데 전혀 무리 없이 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하던 참이었으니 말이다.



사진에 자꾸 병뚜껑이 나오는데... 아무튼 초반이라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칼칼한 된장찌개는 해장을 시켜주는 것만 같았다. 밥 한 그릇 말아먹으면 좋겠지만 아직 고기가 많아 그런 불필요한 모험은 하지 않기로 했다. 요즘 양이 점점 줄어가는 편이라 많이 먹지도 못한다.



역시 손이 쉬니 사진이 많다. 하지만 사진을 촬영하기 위한 아무런 짓은 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ㅎㅎ



소금을 보니 좋은 소금을 쓰는 게 분명하다. 소금에 전문지식이 없어 안타깝지만 예사 소금은 아닌 듯.

옆 테이블에서 김치말이 국수를 주문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었는데 이 집으로 나를 끌고 온 녀석은 김치말이 국수는 꼭 먹어야 한다며 한 그릇 주문했다. 



나는 과연 이 많은 양을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고기를 그렇게 먹고도 이건 이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미치긴 했나 보다. 목살을 1인분 더 주문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좀 안타까운 게 있었다. 추가 주문한 목살의 두께가 눈에 띌 만큼 얇아져 있었던 것이다. 화력이 약해져서 그랬을 순 있겠지만 내가 초반에 반했던 이유가 무색해진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에 또 가보긴 하겠지만 초심이 변치 않는 식당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게다가 멀리 송파까지 가서 먹고 대리운전으로 돌아와야 하는 번거로움과 과다지출에도 불구하고 찾아가게 되는 이유는 '맛' 하나뿐이다.



벽에 붙은 돼지 일러스트가 재밌다. 종업원인지 알 순 없으나 주인으로 보였던 사람은 꽤 젊어 보였는데 넘치는 에너지로 초심을 부여잡길 원하면서 다음 기회를 기약한다.

정말 오랜만에 돼지고기 같은 돼지고기를 맛본 하루였다.

돌아오는 내내 내가 불만족스럽지 않은지 물어보던 녀석, 정말 맛있었다고 극찬해 주었다. 고기를 내게 배웠다 하니 더욱~~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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