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입대해서 자대 배치를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대가 GOP로 이동했을 무렵이다.
전역을 일 년 정도 앞둔 ROTC 출신의 소대장은 불현듯 내게 질문을 던졌다.
등정주의와 등로주의 중 어떤 걸 선호하는 편인가?
신상정보에 산쟁이로 적혀 있었을 나에게 관심 혹은 친밀함을 표시할 적당한 소재였던 거다.
그날 저녁 난 신문에 그런 기사가 있었던 걸 알게 됐다.
아무튼 소대장의 질문에 무슨 소린가 하며 눈만 멀뚱멀뚱 뜨고 그를 바라봤었다.
나름 미친 산쟁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겐 등산이라는 행위에 어떤 신념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입대 전까지 난 그저 벽을 오르는 행위 자체에 매력을 느껴 산에 다녔다.
등산이란 걸 목적으로 한 건 아니었지만 벽을 타기 위해서는 무거운 배낭을 지고 산속을 누벼야 했기에 걷는 등산이라는 행위를 하며 산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등산과 벽타기는 달리 분리할 필요는 없지만 같은 행위라고 할 수는 없는 분야라고 할 순 있다.
웃긴 얘기지만 걷는 걸 싫어하는 클라이머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날 소대장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던 난 며칠이고 두 개의 단어에 꽂혀 있었다.
정상에만 오르면 그만인 경우와 어떤 난이도의 코스를 선택해 오르느냐를 따지는 경우를 따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에베레스트 등정에 어떤 계절에 어떤 코스를 밟았는지 일반인들은 알 수 없다.
그저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거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산쟁이들은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신념에 가득 차 있다.
북한산 인수봉을 오르는 코스만 해도 다양하다.
단지 인수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기본기 없이도 오를 수 있는 코스를 선택할 수도 있고 가장 난이도가 높은 코스를 오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엔 내 실력이 어느 수준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나의 능력이 5.10a 수준이라고 가정하자.
훨씬 난이도가 높은 5.13c 정도의 코스를 오르겠다는 건 만용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성공에 훈련 없이 도달할 순 없다.
물론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사람이 있어 믿을 수 없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게 있어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거다.
노력한다고 다 이뤄지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나름의 목표에 성공이란 선을 넘었던 선배들은 또다시 목표를 재설정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하였던가?
그 후 많은 선배들이 산에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왔다.
내가 산을 등진 후에도 간간히 그런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그들은 자질도, 능력도, 노력도 넘칠 정도로 충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벽을 탄다.
왜 그 오르는 행위에 매달려 있었던가...
어쩌면 익스트림 스포츠는 마약 같은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며 살았던 기억을 되돌려 보면 말이다.
목표를 이루고 나면 허탈감을 느끼곤 했다.
나 같은 경우는 소설 한 편을 다 쓰고 나면 며칠이고 정신적 몸살을 앓아댔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 어떻게든 정상에만 오르면 되나 하는 생각에 멈췄다.
짧은 생각의 결과, 난 등정주의보다 등로주의를 추구했었던가 싶다.
정상에 발을 딛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코스(과정)를 타는가 하는가?
수단과 방법은 성공을 빛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한동안 그냥 정상에 머물러 보는 건 어떨까?
도태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면 말이다.
오늘도 잡설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