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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Oct 10. 2019

잠자는 땅, 시비리
3화 - 지옥에서 온 사냥꾼

때는 바야흐로 1622년. 시베리아가 변하기 시작했어요. 동물에게는 공포스러운 변화였어요. 절대로 좋은 의미의 변화는 아니었죠. 마치 세상의 모든 인간이 악마로 바뀐 것 같았어요. 분명 착하기만 했던 인간들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시베리아의 동물들을 마구 죽여대기 시작했어요. 전에 없이 우리의 먼 친척이 갑자기 죽기도 했고, 아빠의 친구들이 실종되는 일도 종종 있었어요. 물론 예전에도 사냥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갑자기 사냥꾼이 많아지기도 했고 그들의 사냥 목적 자체가 달라진 것 같았어요. 사실 우리 동물들도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인간이 생계를 목적으로 사냥하는 것은 우리 동물들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어요. 슬픈 일이긴 하지만요. 아빠는 인간들에게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고 싶으시다며 한동안 마을을 떠나 있었어요. 사냥꾼들을 감시하신 거죠. 딱 그렇다고 정해진 건 아니었지만 아빠는 우리 마을을 지키는 대장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숲 속 동물들이 너무 불안해하는 걸 보다 못해 인간들을 감시하기로 한 거예요. 인간들의 전설로만 알려진 사실이지만 은빛여우는 우리의 오랜 조상 때부터 인간과 가깝게 지내왔어요. 그래서 인간들이 동물을 사냥하는 게 두렵긴 해도 그들의 천성을 믿는 구석이 있었어요. 하지만 다른 동물들은 그렇지 않았죠. 게다가 당시에 우리 숲과는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상한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어요. 어떤 숲은 동물들이 인간들에게 잡혀서 죽었고 간신히 살아남은 동물들은 다른 숲으로 도망갔다는 거예요. 완전히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소식을 듣고도 인간들을 두둔하던 아빠는 상당히 부담스러우셨을 거예요. 특히 인간과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로 은빛여우를 이상하게 보는 동물들까지 있었거든요.






인간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지 꽤 오래된 마을이 있다. 얼마 전 그곳에 커다란 선착장이 생겼다. 새벽 일찍부터 선착장이 부산하다. 사냥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태 볼 수 없었던 많은 배 안에 짐을 옮겨 싣고 있다. 선착장에 있던 짐을 다 싣자 남자들이 줄지어 배에 올라탄다. 가족으로 보이는 여자들과 아이들은 남자들에게 키스를 하거나 포옹을 했다. 어떤 남자들은 아이들을 꼭 안아주기도 했다. 먼 길을 떠나려는 것 같다. 마을에 남은 남자는 아이들과 허리가 굽어진 사람들밖에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목발을 짚고 있는 사람도 있다. 팔이 하나 없는 사람도 보인다. 그들은 얼마 전 시베리아로 건너온 러시아인 사냥꾼이다. 이 마을은 얼마 전만 해도 열댓 가구 정도의 인간들이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이었다. 동물의 가죽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가난하고 소박한 인간들이었다. 그들이 비록 동물을 사냥을 하긴 했지만 생계유지를 위한 목적에 불과했기 때문에 맹수들 외에는 동물들에게 위협을 당하는 일도 없었다. 그런 마을에 얼마 전부터 상당히 많은 인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부 사냥꾼과 그들의 가족이다. 여자와 아이들은 동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새로 이사 온 사냥꾼들은 무시무시한 인간들이다. 최근 사냥꾼이 설치해 놓은 올가미에 다리가 묶여 사냥꾼에게 사로잡혔던 경험이 있는 은빛여우가 있다. 그 은빛여우는 인간들이 사는 마을로 끌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살아서 도망쳐 나왔다. 한쪽 눈두덩이만 검은 털이 나 있어서 좀 웃기게 생기긴 했지만 귀여운 은빛여우다. 그의 이름은 왼쪽눈만검둥이다. 그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냥꾼 마을의 실상을 듣게 된 동물들은 일제히 대책을 찾기 시작했다. 대책을 세운다고 해서 딱히 대단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전에도 인간 마을에서 도망쳐 나온 동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은빛여우라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왼쪽눈만검둥이가 인간 마을에 사로잡혀 갔을 때 인간의 영혼을 만났다고 했다. 왼쪽눈만검둥이는 인간은 죽어서 영혼이 되면 태어날 때처럼 착하고 순수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왼쪽눈만검둥이는 인간의 영혼에게서 사냥꾼들이 어떠한 목적으로 동물의 땅, 시베리아로 모여들게 된 것인지 듣게 되었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했다. 그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동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왼쪽눈만검둥이가 알려준 인간 영혼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의 가죽을 벗겨서 어딘가로 팔아버린다고 했다. 왼쪽눈만검둥이도 까딱 잘못했으면 가죽이 벗겨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은빛여우의 먼 친척이 있는 유럽에서는 동물의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이 유행이라고 했다. 유행이 뭔지 몰라도 인간들은 동물이란 동물은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인다고 했다. 이미 유럽에 살던 동물들은 거의 멸종하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사냥꾼들은 동물이 많은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시베리아의 동물 가죽이 인기가 좋아져 값도 비싸졌다는 것이다. 사냥꾼 마을에 인간들이 모여든 것도 돈을 벌기 위해 러시아의 사냥꾼들이 모여든 것이라고 했다. 인간 영혼의 말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이 있었다. 인간들이 입는 모피코트 한 벌을 만들기 위해서는 친칠라 백 마리 정도가 필요하고 밍크는 쉰다섯 마리, 여우로는 스무 마리나 필요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조그만 다람쥐마저 잡아서 모피코트를 만드는데 수백 마리의 다람쥐가 필요하다고 했다. 매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동물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공포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동물들 모두 입을 쩍 벌리고 경악했다. 단지 식량 문제 때문에 사냥을 하던 인간들만 해도 약한 동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왼쪽눈만검둥이에게 들은 이야기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공포였다. 그는 인간의 손에서 도망쳐 마을까지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것도 말해 주었다. 우연히 인간 마을의 항구를 지나치게 되었는데, 마을 주변 땅은 물론이고 마을 앞에 흐르는 강에도 동물들의 가죽과 피로 물들어 있었다고 했다. 마치 지옥을 보는 것 같았다는 거다. 가죽을 말려 쌓아 둔 창고 주위에는 헤아릴 수 없는 동물의 영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갔다. 어떤 영혼은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 채 창고 주위를 헤매고 있었다고 한다.




꽝~ 꽝~ 탕~ 타당~ 탕~

호수 근처 숲 어딘가에 날카롭게 귀를 파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시베리아 땅에 태곳적부터 이런 소리는 없었다. 천둥소리보다는 작지만 날카로운 파공성이 기분 나쁘게 들렸다. 귀가 뾰족해서 뾰족귀라는 이름을 가진 은빛여우가 근처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기 위해서다. 뾰족귀가 언덕 위에 도착했을 때는 기분 나쁜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뾰족귀는 언덕 위에서 다시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렸지만 더 이상 기분 나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뾰족귀는 햇빛에 익어 따듯해진 넙적한 바위에 배를 붙이고 엎드렸다. 피곤하던 차에 잘 되었다 싶었다. 오랜만에 낮잠을 한 숨 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금세 잠이 든 뾰족귀는 꿈속에서 두 아이들과 너른 잔디밭에서 뛰고 뒹굴며 한가롭고 평화로움을 즐겼다. 꿈에 취해 있던 뾰족귀는 누군가 풀을 헤치는 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떴다. 유난히 뾰족한 두 귀가 쫑긋거렸다. 누군가 언덕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뾰족귀는 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수풀 사이로 몸을 옮겨 자세를 낮추었다. 뾰족귀는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오는 누군가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특히, 매큼한 냄새는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다. 정말 불쾌한 냄새가 아닐 수 없었다. 뾰족귀는 언덕으로 다가오는 것의 정체가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두 네 명이다. 뾰족귀는 혹시라도 인간의 눈에 띌까 걱정이 되어 숨을 죽인 채 그들을 지켜보기로 했다. 네 명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인간은 나머지 세 명에게 손가락으로 방향을 지시하는 것 같았다. 북쪽의 빙하지대와 동쪽의 강과 늪지대 그리고 늪지대의 좀 더 위쪽에 있는 뾰족귀의 마을을 지시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그들의 언어로 한참 동안 대화를 하는 듯싶더니 이내 언덕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뾰족귀가 숨어 있는 수풀 쪽으로 걸어왔다.

‘큰일 났다!’

뾰족귀는 초긴장 상태로 그 인간을 주시했다. 인간은 몸에 걸친 옷을 벗어 내리더니 흉측하게 생긴 것을 꺼내어 오줌을 싸는 것이다. 뾰족귀는 난생처음 인간이 오줌을 싸는 모습을 보았다. 앞으로 찌익 하고 나가는 것이 일반적으로 동물들이 하는 행동과는 상당히 달랐다. 냄새도 지독했다. 뾰족귀는 억지로 숨을 참으며 오줌 냄새를 맡지 않으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은 오줌을 다 싸고는 흉측한 그것을 앞발로 탈탈 털기 시작했다. 누렇고 냄새나는 오줌 방울들이 여기저기 튀었다.

‘욱!’

콧잔등에 떨어진 인간의 오줌 한 방울에 짜증이 나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인간에게 발각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꾹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다시 옷을 다리 위까지 올리더니 긴 막대기 하나를 집어 들고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그가 오줌을 싸는 동안 다른 인간들은 언덕을 떠나버린 것이었다. 뾰족귀는 이제 인간의 냄새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근처에 인간이 있다면 그들보다 먼저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뾰족귀는 인간들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언덕 위에 머물기로 했다. 꼬르륵~ 배가 고파 오기 시작했다. 어제 들쥐 한 마리를 잡아먹고 난 이후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한 인간들과 기분 나쁜 소리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뾰족귀는 다시 바위 위에 올라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뾰족귀의 가족이 살고 있는 마을과 반대 방향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뾰족귀는 연기가 나는 곳을 보며 킁킁거렸다. 숲이 타는 게 분명했다. 바람은 뾰족귀 쪽으로 불어오고 있었다. 불안한 상황이란 걸 인지할 수 있었다. 여차하면 불길에서 말려 빠져나갈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 빨리 언덕을 벗어나야 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뾰족귀는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뾰족귀 자신도 산불을 피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뛰어 언덕을 내려서자 갈색곰 두 녀석이 뾰족귀 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산불을 피해 뛰어오는 게 분명했다. 곰들은 뾰족귀를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당신들. 지금 불이 나서 도망가는 건가요?”

뾰족귀가 먼저 물었다.

“안녕하세요? 은빛여우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군요. 지금 저쪽에서 큰 불이 나서 모두 피하고 있어요.”

남자 곰이 대답했다.

“지금은 산불이 날 계절이 아닌데 이상하네요.”

뾰족귀가 말했다.

“맞아요. 우리 숲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산불이 난 적이 없었어요. 이상한 일이에요. 어쨌든 당신도 빨리 피해요. 이미 불이 많이 번져서 조금 있으면 다른 동물들도 몰려올 거예요.”

“네~ 고마워요.”

탕~ 탕타타타탕! 멀리서 다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작게 들리기는 했지만 언덕을 오르기 전에 들었던 소리가 분명했다.

“혹시, 저 소리가 무슨 소린 지 아시나요?”

뾰족귀가 갈색곰에게 물었다.

“네? 여우씨는 아직 저 소리를 모르나요?”

“네. 제가 아직 이 숲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요.”

“저 탕 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디선가 동물 한 마리가 쓰러져 죽거나 피를 흘려요. 쓰러졌던 동물은 얼마 못 가서 죽어버리고요. 인간들은 이상한 막대기를 가지고 다니는데 거기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 무시무시해요. 벌써 우리 마을 곰들도 네 마리나 죽었어요. 힘이 약한 동물은 더 많이 죽었고요.”

“인간들은 원래 그런 걸 가지고 있지는 않았잖아요. 왜 갑자기 그런 걸 가지고 우리를 죽이는 거죠?”

“여우씨는 잘 모르시나 보네요. 지금까지 우리 마을 동물은 벌써 절반 이상이 죽거나 잡혀갔어요. 여우씨도 저 소리가 나면 빨리 자리에서 피하세요. 큰일 납니다. 인간이 여우씨도 죽일 거예요.”

갈색곰 두 마리는 그 말만 남긴 후 급히 자리를 피했다. 뾰족귀는 갈색곰들이 뛰어가는 방향으로 가려다 멈춰 섰다. 아직은 인간들과 이상한 막대기에 대한 비밀을 파헤칠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산불이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온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뾰족귀는 갈색곰이 달려오던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미 산불을 두 번이나 경험해 봤기 때문에 어지간한 산불은 무섭지 않았다. 게다가 뛰는 데는 특히 자신이 있었다. 한참을 뛰어가자 숲이 타는 냄새가 점점 더 강해졌다. 도망쳐오는 동물도 많아졌다. 동물들 모두 뾰족귀를 걱정하며 가지 말라고 했지만 뾰족귀는 어떻게든 인간들이 들고 다니는 막대기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잠시 후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이번 산불은 규모가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 때문이다. 아쉽지만 뾰족귀는 다시 반대방향으로 뛰었다. 역시 뾰족귀는 매우 빨랐다. 정신없이 뛰다 보니 다른 동물보다 한참 앞서 뛰고 있었다. 산불의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달린 후에야 조금 안도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인간의 냄새와 동물의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뾰족귀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가 나는 곳의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산불 때문에 냄새가 너무 복잡했다. 냄새가 나는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의 낑낑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의 죽어가는 듯한 신음소리였다. 뾰족귀는 소리가 나는 방향의 수풀 더미를 헤치고 뛰어갔다. 수풀 너머에는 갈색곰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아까 만난 갈색곰이었다. 뾰족귀는 갈색곰 옆으로 폴짝 뛰어갔다. 갈색곰 중 말이 없던 여자 곰이었다. 거의 죽어가는 것 같았다.

“혹시 말할 수 있어요?”

“네에~”

뾰족귀의 질문에 갈색곰은 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친구는요?”

뾰족귀는 갈색곰을 돕고 싶었지만 자신이 달리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다른 갈색곰이 살아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

“인간이 막대기로 우리를 해쳤어요. 제 친구는 사냥꾼을 잡으려 뛰어갔어요. 인간을 조심하세요. 그리고 혹시 제 친구를 만나게 된다면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갈색곰은 이미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던지 힘겹게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뾰족귀는 아까 만났던 갈색곰의 냄새를 기억해보려 했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인간의 냄새가 났다. 아까 뾰족귀의 콧잔등에 오줌을 튀긴 인간의 냄새였다. 뾰족귀는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그 인간의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 킁킁거렸다. 까딱 잘못이라도 하는 날엔 자신도 갈색곰처럼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움직임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뾰족귀는 살금살금 인간의 냄새가 나는 곳을 향했다. 멀지 않은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길게 자란 풀을 헤치고 코를 얼굴을 내밀자 이미 죽어 있는 인간의 몸과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 망연자실해 보이는 인간의 영혼이 보였다. 뾰족귀는 인간의 영혼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뾰족귀가 인간의 영혼과 대화를 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당신은 이미 죽었어요. 후회해도 소용이 없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인간의 영혼은 아직까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내가 죽은 게 맞는 거군요. 여우씨는 내가 보이나요?”

뾰족귀는 인간 영혼의 말에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인간은 자신이 죽게 된 경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방금 언덕에서 내려왔어요. 다른 동료들과 산불을 내서 동물들을 한쪽으로 몰아넣은 후 사냥하기로 했어요. 나는 약속했던 장소를 향해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갈색곰이 나타난 거예요. 그것도 두 마리나. 먼저 내려간 동료보다 늦게 내려온 나는 동료들보다 조금 뒤처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갈색곰에게 발각됐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동료들이 모두 갈색곰에게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나는 재빨리 총을 조준해서 갈색곰 한 마리의 심장을 쐈어요. 그 곰은 으르렁거리면서 두 팔을 하늘로 뻗쳤어요. 동료들을 공격하려는 거였죠. 그래서 나는 총을 더 쐈어요. 이번에는 곰의 목에 정확하게 맞았어요. 곰이 쓰러지자 동료들은 그때를 이용해 도망치기 시작했어요. 그들도 총이 있었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갈색곰에게 총을 쏠 생각을 하지 못한 거죠. 갈색곰에게 총을 쏘려면 그 자리에서 죽여야만 해요. 한 번에 죽이지 못하면 오히려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높거든요. 그런데 다른 갈색곰이 나를 발견하고 말았어요. 그 갈색곰은 총에 맞아 쓰러진 곰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세 보였어요. 갈색곰은 괴성을 지르면서 두 다리로 일어섰어요. 머리 위로 펼친 두 팔은 하늘을 가릴 것 같았어요. 그 모습은 꼭 자기한테도 총을 쏴 보라는 것 같았죠. 나는 놀라서 큰 갈색곰에게 총을 쐈어요. 긴장해서 그랬는지 총알은 빗나갔어요. 다시 총을 쏘려고 했지만 고장이 난 건지 전혀 작동하지 않았어요. 큰 갈색곰은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뛰어오기 시작했어요. 정말 무서웠어요. 갈색곰이 내 앞까지 오는 건 불과 몇 초에 불과했어요. 나는 총을 집어던지고 칼을 꺼내 갈색곰에게 대응할 준비를 했어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 짧은 칼을 가지고 어마어마하게 크고 힘도 센 갈색곰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건 꿈같은 이야기죠. 내 눈앞에는 순식간에 갈색곰이 꽉 차 버렸어요. 갈색곰이 휘두른 긴 팔에 내 머리를 정통으로 맞았어요. 그리고는 이렇게 된 겁니다.”

뾰족귀는 사냥꾼의 말을 듣고서야 고약한 소리가 나는 막대기의 정체가 총이라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인간들은 공포스러운 막대기를 가지고 동물들을 학살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인간들은 동물을 더 쉽게, 더 많이 잡기 위해 동물들이 모여 살고 있는 숲을 모조리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뾰족귀는 인간들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던 인간들은 그렇게 나쁜 무리가 아니었다. 잘 생각해 보니 방금 만난 인간은 전에 만나왔던 인간들보다 덩치가 좀 더 크고 흰 피부를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외모가 조금 다를 뿐 별다른 점은 없었다. 뾰족귀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다. 할아버지 역시 인간에 대해 나쁜 감정은 없었다. 뾰족귀가 아는 인간들은 선하고 욕심이 없었다.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숲의 일부로서 동물들과 크게 다른 점도 없었다. 인간들이 왜 갑자기 험악하게 변해버린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곧 떠나야 해요. 더 이상 알고 싶은 게 없다면 나는 이만 갈게요.”

인간 영혼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깨우치고 현실을 인정한 것인지 자신의 몸 주위에서 떠나려고 했다. 인간들의 영혼이 모여 산다는 곳으로 가려는 듯했다.

“아뇨. 잠시만요.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뾰족귀는 뒤로 돌아서려는 그를 급히 불러 세웠다. 인간 영혼은 아까보다 편안해진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죽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인간들은 왜 이렇게 무서운 짓을 하는 거죠? 우린 친구였잖아요. 게다가 당신들은 우리들이 살고 있던 집, 숲을 모두 태워버리고 있어요.”

뾰족귀는 제법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사실 화가 났다. 인간들이 이런 식이라면 이곳과는 제법 먼 곳에 있긴 하지만 뾰족귀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숲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죽기 전에는 몰랐어요. 동물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 역시 가족을 위해서 사냥을 했어요. 다만 부자가 되고 싶어서 더 열심히 일을 했던 거예요. 그런데 살아있을 땐 미처 몰랐었네요. 이렇게 여우씨와 말을 할 수도 없었고요. 동물은 그저 바보 같고 아무 생각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동물에게도 포근한 집이 있었고, 그저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뿐인데 우리 인간들이 동물들을 마구 죽여 버린 건…… 우리 인간들의 무리한 욕심 때문이었던 거예요. 여우씨. 나는 아마도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겠죠? 이제 여기를 떠나면 지옥으로 가게 될 거예요. 그렇더라도 부디 나를 용서해 주세요. 미안해요.”

인간 영혼은 눈물을 흘리며 뾰족귀에게 용서를 빌었다. 뾰족귀는 그의 용서를 받아주고 싶었지만 자신은 그럴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그럴 권한도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도 죽으면 태어날 때처럼 다시 착하게 돼요. 지옥 같은 것은 없어요.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살아있을 때 잘해야 하는 거예요. 다시 인간으로 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가세요~”

뾰족귀는 인간 영혼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갈색곰의 영혼은 벌써 어딘가로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산불이 조금 약해졌는지 나무 타는 냄새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뾰족귀는 인간들을 따라간 갈색곰을 마냥 기다려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줄 상황이 아니었다. 빨리 마을로 돌아가서 가족과 동물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은빛여우보다 백 배는 되는 덩치를 가진 갈색곰은 은빛여우 무리들과 그다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물론 갈색곰은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난폭한 편은 아니었다. 무서운 시베리아 호랑이에 비하면 다들 연약한 동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우라는 동물은 영특하고 꾀가 많아 대부분의 동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갈색곰들 역시 고민이 생기거나 하면 여우를 찾곤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더 영리한 은빛여우들을 찾아다닌다고 들었다.

마을을 향해 한참을 달리던 뾰족귀는 갈색곰의 부탁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발길을 돌린 뾰족귀는 이미 죽어버린 갈색곰 옆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갈색곰이 되돌아올 때까지 계속 기다려 보기로 작정하고 꼬리를 감고 바닥에 앉았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갈색곰이 나타나지 않았고 배가 고팠던 뾰족귀는 졸음에 겨워 눈이 스르르 감겨버렸다.


뾰족귀는 두 아들과 함께 고향 숲 속을 뛰고 있다. 이게 꿈이라는 걸 뾰족귀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마냥 기분이 좋았다. 이제 제법 덩치가 커지기 시작한 두 아들은 영리하고 잘 생겼다. 작은 녀석은 또래들보다 덩치가 많이 작은 편이었지만 대신 마을에서 제일 똑똑한 녀석이다.

킁~킁킁~그르르르~

킁킁거리는 소리가 꿈속에서 들리는 게 아니란 걸 인지한 뾰족귀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차갑게 식어버린 갈색곰 옆에서 울고 있는 다른 갈색곰이 보였다. 기다리던 갈색곰이 찾아온 것이다. 뾰족귀는 갈색곰의 아픈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슬픔에 잠긴 갈색곰은 뾰족귀가 옆에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슬픔이 잦아든 걸 확인한 뾰족귀가 기척을 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깜짝 놀란 갈색곰이 동그란 눈으로 뾰족귀를 쳐다보았다.

“여우씨는 아까 그~”

“네. 맞아요. 지나가던 길에 친구를 만났어요. 전해 달라는 말이 있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갈색곰은 친구의 곁에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던 것이 마음이 불편한 것 같았다.

“사랑한다고 전해 달래요. 그리고 인간을 조심하라고. 그건 저한테 말한 것이긴 하지만요.”

갈색곰은 뾰족귀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우~우~ 하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뾰족귀는 이제 갈색곰에게 인사만 남기고 떠날 생각을 했다.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뾰족귀의 눈에 갈색곰 오른쪽 앞발 뒤쪽 날갯죽지에 굵은 나뭇가지 하나가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거기서 피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저기요~”

뾰족귀는 갈색곰을 불렀다. 갈색곰은 비통에 찬 울음을 잠시 멈추고서 뾰족귀를 쳐다보았다.

“저기…… 음~ 당신 등에 나무가 하나 꽂혀 있어요. 피도 나고 있고요.”

“그래요?”

갈색곰은 등 뒤를 살펴보고 싶었지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인간들과 싸우던 중에 다친 것 같네요. 아프긴 하지만 버틸 만해요. 늦었지만 우리 인사나 해요. 제 이름은 무지큰발입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친구 하기로 해요.”

갈색곰이 먼저 친구를 제안했다. 하지만 뾰족귀는 빨리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만 가득했다.

“아~ 그렇군요. 나는 뾰족귀라고 해요. 그런데 나는 최대한 빨리 마을로 돌아가서 이 소식을 알려줘야 해요. 저 먼저 가야 할 것 같네요.”

“음~ 마을이 어디죠?”

“『거친들판』. 우리는 『노란민들레숲』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요. 아무래도 『거친들판』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혹시 해가 뜨는 방향으로 호수 하나 건너고 강을 두 개 건너서 있는 큰 나무가 가득한 숲을 말하는 건가요?”

갈색곰 무지큰발이 뾰족귀의 고향을 알고 있는 듯했다. 뾰족귀는 여기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노란민들레숲』을 무지큰발이 안다고 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우리 숲을 아는 거죠?”

“우리 할아버지가 그 숲에서 태어났어요. 이 숲으로 온 건 아빠 때문이거든요. 우리 친척들이 아직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무지큰발은 뾰족귀에게 간청하듯 말했다.

“생각보다 멀어요. 아픈 몸으로 갈 수 있겠어요? 나는 지금 무지큰발씨를 기다려 줄 수 없어요.”

“이래 봬도 이 정도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 엄마가 몇 년 전에 사냥꾼과 싸울 때도 어린 내가 도와준 적이 있었어요. 엄마는 그때 다친 상처 때문에 죽긴 했지만. 나는 편식도 하지 않고 언제나 운동을 열심히 해서 힘도 좋아요. 뾰족귀 씨에게 부담을 주지는 않을 거예요.”

무지큰발의 말에 뾰족귀는 잠시 고민했다.

“그래요. 그럼 같이 가기로 해요. 그런데 이 숲의 가족들은 어떻게 하려고요?”

뾰족귀의 질문에 무지큰발은 침울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사냥꾼들에게 사로잡혀갔는데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요.”

“누가요?”

“내 친동생인데. 정말 예쁜 녀석이었죠. 이제 나는 여자 친구도 없고 동생도 없어요. 이제는 뾰족귀씨가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예요. 같이 가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은빛여우 뾰족귀와 갈색곰 무지큰발은 『노란민들레숲』으로 가는 길을 함께 걷기 시작했다. 무지큰발은 이 숲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와서 그런지 주변 지리에 대해서는 뾰족귀보다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무지큰발은 뾰족귀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잘 걸었고 오히려 그 덕분에 하루 정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뾰족귀는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걷는 내내 뱃속에서 끊임없이 꼬르륵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무지큰발은 아무 소리 없이 사라졌다가 큰 물고기 두 마리를 입에 물고 왔다. 무지큰발이 잡아온 물고기는 너무 커서 뾰족귀 혼자 먹기에 너무 컸지만 무지큰발은 한 마리를 통째로 넘겨주었다. 무지큰발은 예상외로 먹을 것을 잘 구해왔다. 특히 물고기를 잡는 실력은 여느 곰들보다 뛰어났다. 다시 며칠을 굶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뾰족귀는 배가 터질 때까지 물고기를 뜯어먹었다. 그들의 여행이 시작되고 이틀째 되던 날 호수 하나를 돌아서 건넜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숲과는 조금 떨어진 바위길로 접어들었다. 여기서부터는 뾰족귀에게 익숙한 지역이었다. 이제부터 3일 정도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노란민들레숲』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집채만 한 덩치의 갈색곰과 조그맣고 예쁘게 생긴 은빛여우의 동행이 나름 어울려 보였다. 그때였다.

“쉿!”

뾰족귀는 촉촉한 코를 벌름거리며 주변의 냄새를 맡았다.

“왜요?”

무지큰발이 물었다.

“근처에서 인간 냄새가 나요!”

“뭐요? 이제 어떻게 하죠? 요즘 인간들은 무시무시한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를 죽이고 있어요.”

“무지큰발 씨! 그건 총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요즘 인간들이 우리 동물들을 사냥할 때 쓰는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인간을 만나면 일단 피해야 해요. 이 근처에 내가 잘 아는 비밀의 장소가 있어요. 거기로 가서 잠시 쉬고 다시 길을 가도록 하죠.”

“나야 뭐! 이 지역은 아는 곳이 없으니 뾰족귀씨가 안내해 주는 대로 가겠습니다.”

날이 저물자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그들의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제는 인간들의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되었다. 한참을 더 걸었을 무렵 그들의 앞에는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우린 동굴 안에서 쉬면 돼요.”

무지큰발은 뾰족귀가 알려준 동굴이 제법 맘에 드는 것 같았다.

“저 동굴은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곳인데 우리 동물의 조상들이 무언가를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있다고 했어요.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에 와서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았지만 아직까지 찾아낼 수 없었지요. 입구는 작지만 동굴 안은 엄청나게 넓어요.”

뾰족귀는 동굴에 얽힌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뾰족귀와 무지큰발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동굴 속에 누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해가 저물고 있었지만 동굴 밖은 아직 환했다. 둘은 짙은 동굴 속 암흑의 세상 속에 온 몸을 맡겼다.

“어때요?”

뾰족귀가 물었다.

“정말 멋진데요? 기가 막혀요.”

무지큰발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동굴 속을 감상했다.

“이 동굴엔 입구가 세 개나 연결되어 있어요. 아버지께서는 입구가 다섯 개라고 하셨지만 나는 아직까지 세 개 밖에 찾아내지 못했어요. 지금 우리가 들어온 입구는 『흰나비가 춤추는 숲』과 연결되어 있고요. 하나는 내가 사는 마을 방향으로 나 있는데 『반짝반짝 돌멩이 마을』입구로 나가야만 갈 수 있어요. 또 다른 하나는 『산이 비치는 호수가 있는 숲』과 연결되어 있어요. 나머지 두 개는 나중에 다시 찾아보려고 해요.”

“그렇군요. 그거 되게 재미있겠네요. 그럼~ 나머지 두 개는 우리가 함께 찾아보면 어때요? 우린 친구니까 내가 도울 수 있어요.”

무지큰발은 신이 나는 듯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은 동굴 속의 넓적한 바위를 찾아 엎드렸다. 거기서 잠시 쉰 후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킁킁~ 킁킁. 뾰족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무지큰발은 뾰족귀가 호들갑을 떨자 억지로 일어났다. 무지큰발은 눈을 뜨자마자 코를 벌름거렸다.

“우와~ 맛있는 냄새다!”

무지큰발은 음식 냄새에 신이 났다.

“맛있는 냄새는 맡는 것 같은데. 대체 뭘까요? 처음 맡아보는 냄새 같지 않아요.”

뾰족귀가 말했다. 둘 다 코를 벌름벌름~ 킁킁거리며 맛있는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향했다. 『반짝반짝 돌멩이 마을』쪽 입구에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둘 다 배가 고팠는지 오로지 먹을 생각만 가득했다. 한참을 걸어서야 동굴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뛰다시피 한참을 걸어 입구 근처에 도착하자 무지큰발이 갑자기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뾰족귀 역시 무지큰발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뛰었다. 무지큰발은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꽤 빠른 곰이었다. 동굴 입구를 나서자 그들의 눈앞에는 인간 여럿이 모닥불을 피우고 뭔가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들이 사냥꾼이라는 사실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뾰족귀와 무지큰발도 인간을 보고 매우 놀랐지만 인간들 역시 그 상태로 얼어붙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인간들 중 한 명이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인간들은 바쁘게 후다닥 거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때 뾰족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냥꾼의 총이었다.

“도망가요! 어서!”

뾰족귀가 소리쳤다. 그리고 동시에 사냥꾼들의 총소리가 귀를 때리듯 울렸다. 바로 앞에서 들리는 총소리는 천둥소리 같았다. 뾰족귀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며 그곳에서 도망치려고 날뛰었다. 무지큰발은 얼마 움직이기도 전에 사냥꾼들의 총에 뒷다리를 맞았다.

크어어어~ 무지큰발의 비명이 들려왔다. 뾰족귀가 무지큰발을 돌아보았을 땐 무지큰발의 근처에 사냥꾼 세 명이 무지큰발의 공격에 쓰러져 있었다. 뾰족귀는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무지큰발은 곧장 사냥꾼에게 달려들었던 것이었다. 무지큰발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며 뾰족귀에게 다시 소리쳤다.

“도망가! 어서!”

뾰족귀는 다시 동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탕! 탕! 뾰족귀는 동굴의 입구에 닿기도 전에 등 뒤에서 천둥소리 같은 총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곤 눈앞이 깜깜 해지는 것 같았고 그대로 바닥을 굴러버렸다. 어딘가 엄청나게 고통스러웠지만 그게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뾰족귀의 눈앞에는 동굴의 시커먼 입구가 보였다. 동굴 앞쪽으로는 인간들이 피워 놓은 모닥불이 이글거리며 만들어진 불꽃 그림자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사냥꾼의 그림자가 보였다. 사냥꾼이 뾰족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지큰발은 이미 죽었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이제 끝났구나. 내 아이들. 내 아내. 미안해! 사랑해!’

뾰족귀는 이제 사냥꾼에게 가죽이 벗겨질 것을 상상하니 오싹했다.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뾰족귀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겁이 났다. 체념을 한 상태지만 천둥소리를 가진 총을 가진 사냥꾼을 상상하고 있었다. 사냥꾼은 총으로 뾰족귀의 몸을 뒤집었다. 뾰족귀는 아직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죽은 척을 하고 있어야 할까 싶기도 했다. 너무 무서웠다. 무섭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미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의 생명은 거의 꺼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 이 여우는…… 그때!”

사냥꾼은 뾰족귀를 안아 들고 뾰족귀의 몸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너는 내 친구 은빛여우잖아. 내가~ 내가~ 내 생명의 은인인 너를 내 손으로 죽인 거야. 이건 말도 안 돼! 난 그저 널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 여길 찾아온 건데. 내가 널 죽였단 말이야. 이건 말도 안 돼! 난 은빛여우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단 말이야!”

사냥꾼의 울부짖는 소리가 동굴 끝까지 울려 퍼졌다.

9살 꼬마 한스는 21살 청년 한스가 되어 돌아왔다. 그런 그가 부모님을 잃은 자신을 구해 준 은빛여우 뾰족귀를 죽이고 말았다. 한스는 고통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 동굴은 바로 부모님을 잃었던  바로 그 동굴이었던 것이다.





좀 놀랬죠? 많이 슬픈 이야기지만 나는 이제 참을 수 있어요. 아빠는 정말 멋진 분이셨어요. 한스는 실수로 아빠를 죽게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용서했어요. 아무튼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요. 한스는 12년이나 지나서 다시 돌아왔어요. 그런데 진짜 착하고 귀여웠던 한스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한스는 사냥꾼 중에서도 악명 높은 사냥꾼이 되어서 돌아온 거예요. 특히 한스는 늑대 같은 무서운 동물을 제일 잘 잡는 사냥꾼이었어요. 우리 아빠가 한스와 인연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악연이었던 것 같아요. 이유야 어쨌든 한스는 우리 가족에게서 아빠를 빼앗아간 장본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무지큰발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지큰발은 죽지 않았어요. 한스는 아빠를 땅에 묻어주고 무지큰발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무지큰발이 죽지 않고 기절한 것을 알게 되었어요. 엄청 무서웠겠죠? 어마어마한 덩치를 가진 무지큰발이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한스는 피할 겨를도 없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무지큰발을 살피던 한스는 무지큰발의 등에 꽂힌 나무토막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사실 그건 나무토막이 아니고 칼의 손잡이였던 거예요. 아빠는 인간들의 칼을 직접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지큰발의 어깨에 꽂힌 칼의 손잡이를 나무토막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한스는 무지큰발의 등에서 힘을 주어 칼을 빼냈어요. 한스는 그 칼을 보고 다시 한번 크게 놀랐어요. 그 칼은 바로 한스의 아빠가 가지고 있던 칼이었어요. 그 칼이 어떻게 무지큰발의 등에 꽂혀 있었는지 한스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어요. 설마, 설마 하면서 칼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한스는 어릴 때부터 아빠의 칼을 자주 보아왔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어요. 아빠의 칼이 확실했죠. 한스는 일단 무지큰발의 상처들을 치료하기 시작했어요. 무지큰발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깨어나질 못했어요. 한스는 무지큰발의 상처를 치료한 뒤 길을 떠나려 했어요. 무지큰발이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한스는 기겁을 했지만 무지큰발은 너무 아파서 눈동자 외에는 전혀 움직일 수 없었어요. 한스도 그걸 알 수 있었나 봐요. 한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길을 떠났어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무지큰발은 한스를 이상하게 쳐다봤어요. 사실 무지큰발은 한스가 자신을 치료해 주는 걸 알고 있었어요.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죠. 무지큰발은 한스의 모습을 정확히 기억했어요. 냄새까지 전부 말이죠. 다른 인간들은 어떻게 됐냐고요? 모두 무지큰발의 앞발에 맞아서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 줄 알았지만 한스가 그중 한 명을 부축해서 데리고 갔어요. 살아남은 사냥꾼은 한스가 무지큰발을 치료해 준 사실을 알지 못했어요. 기절한 상태였으니까요. 아무튼 한스는 살아남은 사냥꾼과 무지큰발을 모두 구해주었어요. 우리 아빠 뾰족귀만 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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