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파고 Oct 11. 2019

잠자는 땅, 시비리
4화 - 사냥꾼 마을

지금까지 우리가 사는 시베리아에서 벌어진 무서운 이야기만 했네요. 사실 시베리아는 그렇게 험악한 곳이 아니에요. 16세기 당시만 해도 동물들에겐 지옥 같은 곳이었지만 지금은 안정이 돼서 인간과 동물이 제법 잘 어울려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아름다운 시베리아 이야기를 해 주려고 해요. 아마 전 세계에서 시베리아만큼 멋지고 광활한 땅은 없을 거예요. 겨울이면 꽤 춥기는 해도 우리 동물들에게는 살기 좋은 곳이거든요. 물론 털이 없는 인간들 입장에선 추위를 극복하며 살기에는 힘든 땅이긴 해요. 인간들이 잘 모르는 게 있어요. 시베리아라고 해서 모두 춥고 배고픈 땅은 아니에요. 너무 광활한 지역이라 착각할 순 있죠. 그래서 시베리아에서도 너무 춥지 않은 곳에는 인간들이 마을을 형성해서 살기도 하죠. 오래전 인간들은 계절에 따라서 살기 좋은 곳으로 이사를 다니는 유목생활을 했어요. 그건 동물들도 마찬가지예요. 추위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겠지만 먹을 게 없어서 좀 더 따뜻한 곳으로 이동을 해야만 하는 거예요. 유목생활을 하는 인간들은 당연히 동물들이 사는 곳을 따라 이동했어요. 우리 아빠. 그러니까 뾰족귀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은빛여우는 인간들이 전과 달리 이상해졌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알던 인간들은 키가 작고 갈색 피부였는데 덩치가 크고 피부가 흰 인간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에요. 다만 아빠는 그들이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몰랐을 뿐이었어요. 사실 크게 다른 건 없어요. 단지 생긴 게 조금 다른 것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단지 조금 다르게 생겼다고 서로 싸우고 무시한다고 들었어요. 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베리아에서는 흰색곰과 갈색곰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싸우거나 미워하지는 않거든요. 여우들도 마찬가지예요. 은빛여우와 갈색여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베리아에는 몽골계 아시아인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 은빛여우들은 그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편이었죠. 그들은 사냥을 해도 필요한 만큼만 했고 동물을 죽이게 되면 동물들의 영혼이 편안하게 쉬게 해 달라며 기도를 했어요. 게다가 인간들과 가까운 관계를 하고 있던 개라는 동물은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어요. 시베리안 허스키는 늑대와 먼 친척 관계인데 지금은 사이가 좋지 않아요. 늑대들은 시베리안 허스키에게 인간에게 빌붙어서 먹고사는 용기도 없는 가축 같은 동물이라고 비웃곤 하죠. 반면에 시베리안 허스키들은 늑대를 약한 동물이나 인간을 괴롭히는 나쁜 동물이라고 해요. 원래는 같은 종족이었는데 서로의 관점이 달라진 거예요. 혹시 인간들도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늑대와 허스키처럼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희 동물들은 어쨌든 옛날부터 시베리아에 살던 인간들에게 대응할 방법이 없었어요. 동물들을 마구 잡아 죽이는 폭력적이고 파렴치한 인간들은 무서운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눈빛만 봐도 무시무시한 시베리아 호랑이 조차도 인간들의 총을 무서워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땐 정말 천둥소리 같은 무시무시한 총소리가 날 때마다 동물들이 쓰러져 갔어요. 동물들은 인간이 나타나면 무조건 도망쳐야만 했어요.

인간들이 이상하게 변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동물과 함께 뛰어 놀기도 했어요. 특히 인간 아이들이 동물과 숲에서 뒹굴고 노는 게 이상하지도 않았죠.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고 말았네요. 저도 옛날의 순박하던 인간들이 그리워요.

우리 형제도 함께 놀던 인간 아이가 몇 명 있었어요. 그런데 흰 피부를 가진 인간들이 나타난 이후로 어딘가로 떠나 버렸어요. 벌써 그립네요. 그 시절이 말이에요. 숲에서 불이 나고 동물들이 죽어갈 무렵 흰색 피부를 가진 인간이 러시아라는 곳에서 온 인간의 다른 종족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아무튼 그때부터 러시아 종족이 몽골이란 종족의 원주민들을 시베리아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게 쫓아냈어요. 원주민들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살아온 그들의 고향을 빼앗겨 버린 거라더군요. 러시아 인간들은 원주민들이 키우던 시베리안 허스키를 데려다 살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시베리안 허스키가 끌어주는 원주민의 눈썰매가 부러웠던가 봐요. 그런데 시베리안 허스키들이 러시아 종족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들은 허스키가 그저 바보 같은 동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허스키들은 위계질서가 잡혀 있는 녀석들인데 러시아 종족은 그걸 몰랐던 거죠. 사실 허스키들은 늑대처럼 대장 허스키가 있어요. 인간과 가족처럼 살아왔던 허스키들이 폭력적인 러시아 사냥꾼들을 위해 썰매를 끌어줄 리가 없었죠. 러시아 종족은 허스키들에게 채찍질을 했어요. 정말 잔인했지만 허스키들은 용감하고 고집이 센 녀석들이거든요. 채찍질에 맞아서 가죽이 벗겨져도 절대 썰매를 끌어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허스키들은 인간들이 묶어 놓은 줄을 끊고 울타리 밑을 파서 도망을 치기도 했어요. 얼마나 영리한지 어떻게 묶어도 탈출하는 허스키는 『탈출의 명수』라고 불렸어요. 허스키들은 사랑을 모르는 그런 인간들과 함께 사는 게 싫었나 봐요. 어떤 허스키는 원주민이 그리웠다고 하더라고요. 또 어떤 허스키 녀석은 몇 년 동안 원주민을 찾아다닌 끝에 엄청나게 먼 곳에서 다시 만난 적도 있대요.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에요. 다행히 지금은 러시아 종족도 그 녀석들을 사랑으로 대해 주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요즘 시베리안 허스키들은 러시아 종족과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고 들었어요.




“얘들아! 너희는 배가 좀 고프긴 해도 자유로운 게 좋니? 아니면 배부르고 편안하지만 조금은 답답한 공간에서 사는 게 좋니?”

들소들은 의견이 많았어요. 어떤 들소는 배부르게 먹는 게 더 좋다고 했고 어떤 들소는 넓은 들판을 실컷 뛰어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게 더 좋다고 했죠. 또 어떤 들소는 이렇게 말했어요.

“자유로운 게 좋기는 한데 가끔은 외롭기도 하고 여자 친구도 사귀지 못하고 결혼도 못해서 괴로워하는 들소들도 있잖아. 나도 여자 친구가 없어서 부럽기도 해. 그래서 자유가 조금 억압되더라도 편안하고 배부르게 먹고 여자 친구도 만들어 준다면 나는 조금은 답답해도 괜찮을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들소들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환호하며 동의했어요. 그리고 또 다른 들소가 말했어요.

“그까짓 자유쯤이야 욕구만 채울 수 있다면 어느 정도는 포기해도 괜찮아.”

들소들은…… 아니 외로웠던 들소, 배고팠던 들소, 사는 게 힘들었던 들소들은 다른 들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어요. 귀가 얇은 들소들은 쉽게 설득 당해 이미 마음이 기울었어요. 대부분의 들소들 역시 비슷한 고민을 했어요. 어떤 들소들은 좋은 집과 많은 음식을 제공받기로 하고 의심이 많은 들소들을 꼬시기도 했어요. 들소들 대부분이 자유보다는 편안함을 선택했어요. 몇몇 들소들은 자유를 포기하면 안 된다면서 다른 들소들에게 신중하게 생각해보라고 설득했지만 그렇게 말했던 들소들 역시 무리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어요. 외톨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어떤 들소는 그런 것을 『시류』라고 했어요. 들소들을 설득하는데 앞장섰던 들소들 중에 어떤 녀석들은 들소 선생님이라 불렸어요. 들소 선생님은 들소들의 앞에 서서 항상 큰 목소리로 말했어요. 그런데 들소 선생님은 자기들이 누구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지 몰랐어요. 언젠가부터 들소 선생님은 착한 들소들을 우습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의심 많고 불평이 많은 들소들은 마을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어요. 누구도 그 들소들이 어디로 떠났는지 알지 못했어요. 들소 마을이 조용해지자 들소들은 배불리 먹고 편하고 깨끗한 집에서 언제나 원하는 대로 사랑하며 살았어요. 편하기는 했지만 영혼이 사라진 삶에 만족하면서 살기 시작했어요. 그런 삶은 생각보다 오래가지는 못했어요. 들소들은 벌써 자유가 그리워지기 시작한 거예요. 너른 들판에 뛰어놀고, 호수에서 수영하고, 위험하긴 하지만 늑대, 사자, 표범에게 들소들이 힘을 모아 싸우던 모험의 시대가 그리워졌어요. 어린 들소들은 자유를 경험했던 어른 들소들의 삶을 전혀 알지 못했어요. 그저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시는 옛날 옛적 이야기라고 알고 있었어요. 어린 들소들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엄마 아빠가 된 들소들은 안전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이곳을 떠나 온갖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바깥세상에 어린 들소들을 풀어 둘 자신도 없었어요. 보나 마나 늑대나 사자에게 잡혀서 죽을 게 뻔했어요. 자유가 그리웠지만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마주했어요. 결과에 대한 책임이 뒤따를 것이 분명한데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들소들은 그냥 현실에 만족하며 살고 싶어 졌어요.




이 이야기는 시베리아가 아닌 멀리 아프리카 동물들 이야기예요. 우리 시베리아까지 전해온 거죠. 우리 시베리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멧돼지 이야기, 시베리안 허스키 이야기가 아프리카 들소 이야기와 비슷해요. 이미 집돼지가 되어버린 멧돼지 녀석들은 이젠 완전히 바보가 되어 버렸지만, 시베리안 허스키들은 그래도 영리한 녀석들이라 그런지 아직 늑대들과 비슷한 성향이 있어요. 물론 친척 관계이면서도 늑대들은 여전히 허스키들을 무시하고 허스키들은 늑대들을 경멸하고 있죠. 제가 보기에는 멧돼지나 허스키 둘 다 먹는 걸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인간들에게 꼭 붙어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그 녀석들은 인간과 떨어져서는 살지 못할 거예요.




우리 마을에는 인간의 마을. 즉, 사냥꾼 마을에서 도망쳐 나온 동물이 둘이나 있어요. 제 친척인 왼쪽눈만검둥이와 시베리안 허스키 화들짝이예요. 이미 왼쪽눈만검둥이 이야기는 먼저 간단히 설명한 적이 있죠? 화들짝이라는 녀석은 사냥꾼들에게 도망쳐 나온 후 숲 속을 헤매다 우리 마을까지 오게 됐어요. 얼마나 겁이 많은지 잠을 자다가도 화들짝 놀라는 게 너무 심해서 그런 이름을 지어 줬어요. 사냥꾼들에게서는 『피티』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는데 자기는 그 이름이 너무 싫대요. 화들짝은 사냥꾼의 썰매를 끌고 어딘가로 사냥을 떠났었대요. 썰매를 끌던 허스키는 8마리였는데 사냥꾼은 거친 눈보라 때문에 동료들과 헤어졌고, 며칠 동안 계속되는 폭설로 눈썰매조차 이동이 힘들게 되었대요. 밤과 낮이 열 번 넘게 바뀐 후에야 폭설은 그쳤지만 사냥꾼은 너무 많은 눈이 내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았대요. 이미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사냥꾼은 제일 힘이 약했던 화들짝의 엄마를 잡아먹었대요. 그리고는 허스키들에게도 화들짝의 엄마를 먹으라고 주었대요. 하지만 어떤 허스키도 절대 그럴 수는 없었겠죠. 절대로 말이에요. 허스키들은 배가 고파도 참았대요. 어느 날 갈색곰이 나타나 사냥꾼을 위협하자 허스키들은 사냥꾼을 돕기 위해 함께 싸우려 했어요. 하지만 썰매에 묶인 허스키들은 갈색곰에게 대항조차 할 수 없었대요. 배가 고팠던 갈색곰에게 허스키 세 마리가 죽었는데 그중 화들짝의 아빠도 있었대요. 화들짝의 아빠는 허스키들의 대장이었어요. 화들짝 아빠는 사냥꾼에게 의리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다면서 살아남은 허스키들에게 탈출하라고 했어요. 갈색곰은 사냥꾼의 총에 맞아서 도망갔지만 사냥꾼 역시 다리를 크게 다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대요. 허스키들은 고통에 신음하는 사냥꾼 몰래 서로의 몸에 이어진 끈을 물어뜯기 시작했어요. 탈출의 명수라는 허스키들의 별명은 괜히 지어진 게 아닌 것 같아요. 허스키들은 서로의 몸이 완전히 풀린 것을 확인하고는 사냥꾼에게서 멀리 뛰어 도망치기 시작했어요. 사냥꾼은 허스키들을 소리쳐 불렀어요. 돌아오라고 말이죠. 허스키들은 사냥꾼이 그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어요. 사냥꾼이 어땠는지 아세요? 허스키는 사냥꾼이 쏜 총에 맞아 쓰러져 갔어요. 화들짝 혼자만 간신히 살아서 도망쳐서 우리 숲으로 온 거예요. 그렇게 해서 『노란 민들레 숲』의 식구가 되었어요. 화들짝은 지금도 잠을 자다가 무슨 소리만 들리면 화들짝 하고 놀라죠. 잠을 깨면 벌떡 일어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혼자서 울다가 잠이 든답니다.




얼마 전에 『노란 민들레 숲』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사냥꾼 마을이 생겼어요. 『반짝반짝 돌멩이 마을』에 사냥꾼의 마을이 생긴 거예요. 그건 우리 아빠인 뾰족귀의 영혼이 마지막 숨을 쉬었던 곳이에요. 근처에 살던 동물들은 사냥꾼들을 피해서 멀리 다른 숲으로 모두 도망쳤어요. 그중 일부는 우리 숲에도 숨어들었어요. 조용했던 우리 숲이 시끌벅적하게 변했죠.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긴 해요. 작은 동물들은 사냥꾼이 있어도 피해 보는 게 없어서인지 쭉 머물기로 한 것 같았어요. 사냥꾼들은 대체로 큰 동물만 사냥하는 편이었거든요. 무슨 일인지 다람쥐들은 우리 숲으로 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동물들의 수가 줄어들자 사냥꾼들은 닥치는 대로 잡아갔어요. 작은 동물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죠. 정말 악랄한 인간들이에요.







작가의 이전글 잠자는 땅, 시비리 3화 - 지옥에서 온 사냥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