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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Oct 11. 2019

잠자는 땅, 시비리 5화 - 한스

천 년 이상 산불 한번 난 적 없는 아름다운 숲이다. 아름드리 침엽수는 키가 하늘만큼 높다. 나무 둥치는 몸집이 커다란 갈색곰이 숨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슬도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 멀리서 은빛여우 한 마리가 수풀을 헤치며 급히 뛰어가고 있다. 그 바람에 웅크린 채 똥을 누던 토끼가 깜짝 놀라 짧은 앞발을 세우며 일어섰다.

“저 녀석 아침부터 뭐가 그리 바쁜 거야? 똥 누다 까무러칠 뻔했네~”

토끼는 투덜거리다 다시 힘을 주었다. 끄응~ 동글동글한 토끼 똥이 투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은빛여우는 얼마나 빠른지 꼬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은빛여우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는 두 마리의 동물이 나타났다. 그들 역시 은빛여우와 같은 방향으로 뛰어갔다. 귀가 쫑긋 서 있는 시커먼 색의 개다. 시베리아에서는 원래 볼 수 없는 개다. 사냥꾼들이 가끔씩 개를 데리고 사냥을 다니긴 했는데 이번에 나타난 개는 예사롭지 않게 생겼다. 대충 보아서는 동물을 추적하는 능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뛰는 속도는 은빛여우 버금가는 것 같았다. 숲에서 달리기 실력에 있어 은빛여우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녀석들인데 두 마리의 개들은 은빛여우 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건 숲 속 동물들이 봐도 놀랄 일이었다. 지금 은빛여우가 두 마리의 개보다 빠른 이유가 있다면 개들보다 영리하고 숲의 지형을 잘 알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토끼는 똥을 누다 말고 숨을 죽였다. 개들에게 발각이라도 되는 날엔 오늘이 마지막으로 똥을 누는 날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개들의 소리가 멀어진 후에야 토끼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아직 꽤 멀리 있지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토끼는 인간의 냄새를 코끝으로 느낄 수 있었다. 토끼는 두려움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사냥꾼들은 동물이 보이기만 하면 즉시 총을 쏘아 죽였다. 토끼는 똥 누는 것을 포기하고 땅굴 속으로 조심스럽게 기어갔다. 사냥꾼에게 발각되면 그다음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토끼는 얼마 전 사냥꾼이 동물을 총으로 쏘아 죽인 후 어떤 짓을 하는지 본 적이 있다. 토끼는 사냥꾼의 냄새를 더 이상 맡을 수 없을 때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그 외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엉덩이가 동그랗게 생긴 예쁘장한 은빛여우가 나뭇잎을 뚫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 아래 꼬리를 감고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숲 속에서부터 미친 듯이 달려오는 아직 다 성장하지 못한 은빛여우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 녀석 또 무슨 사고를 치고 오는 거야?’

은빛여우는 생각했다.

“엄마! 어서 뛰세요!”

달려오던 은빛여우가 소리쳤다.

“왜? 무슨 소리야?”

엄마 여우 역시 소리쳤다.

“사냥꾼이 따라와요. 처음 보는 무섭게 생긴 개도 두 마리나 있어요. 같이 뛰면서 설명할 게요.”

영문을 모르는 엄마 여우는 아들 여우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뛰기 시작했다.

“형이 인간에게 잡혔어요. 올가미에 발이 걸려서 꼼짝도 못 해요. 저는 사냥꾼들을 사냥꾼 마을 방향으로 유인할 테니까 엄마는 형을 구해주세요. 형은 아빠의 그 동굴 근처에 있어요. 동굴로 가다 보면 형이 보일 거예요.”

“그래! 알았다. 조심해 태니야.”

엄마 여우는 아들 여우 태니가 헐떡거리며 하는 설명을 들으며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잠시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했지만 순간적으로 정신을 잡았다.

“네, 엄마! 엄마도 조심해야 해요. 그리고 형을 꼭 구하셔야 해요!”

엄마 여우는 사색이 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큰 아들 걱정에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 두 은빛여우는 양쪽으로 갈라져 다른 길로 뛰어갔다. 엄마 여우는 태니보다 훨씬 빠르다. 만약 태니가 완전히 성장한 여우였다면 엄마 여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달려 사냥개들을 따돌렸을지도 모른다.

사냥개들은 여전히 태니를 추격하고 있다. 영특한 태니는 어릴 때 아빠에게 흔적을 지우는 방법을 기억해 냈다. 사냥개들을 따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물을 건너는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추운 겨울이 아니어서 물에 들어가도 위험하지 않다. 태니와 사냥개의 거리는 이제 거의 정도가 되지 않는다. 태니는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사냥개의 추적을 따돌려야만 했다. 호수에 도착한 태니는 망설임 없이 호수에 몸을 던져 헤엄치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호수를 이용해 흔적을 없애야 한다. 태니는 호수를 건너지 않고 물가를 따라 옆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한참을 돌아 호숫가로 올라 다시 숲으로 뛰어들었다.

역시 사냥개들은 태니의 계획대로 호숫가에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은빛여우 태니의 냄새를 맡으려 킁킁거렸지만 흔적은 끊어지고 없었다. 한참이 지나 두 명의 사냥꾼이 호숫가에 도착했다.

“또 놓치고 말았네. 얼마나 영리한지 참 내~ 도통 잡을 수가 없군. 어지간해서는 덫에도 걸리지를 않으니 말이야.”

한 사냥꾼이 돌부리를 차며 투덜댔다.

“자넨, 그래도 지난달에도 한 마리 잡았지 않나. 난 지금 몇 달 동안 은빛여우 꽁무니만 쫓고 있다니까. 차라리 그 시간에 수달이나 잡는 게 나을 것 같아.”

“무슨 소리~ 수달 백 마리 잡아도 은빛여우 다리 가죽 하나 가격만도 못한데. 난 지난달 잡은 은빛여우 덕분에 가족들에게 큰 소리 떵떵 치고 산단 말일세.”

“어휴~ 부럽구먼. 나도 한 마리 잡아야 할 텐데. 여기 시베리아 동물들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어. 다른 여우들 같은 경우엔 이렇게 어렵게 사냥한 적이 없는데 말이야. 아무튼 은빛여우는 찾아내기도 힘들고 대체 얼마나 빠른지 몰라. 일단은 이 숲에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어떻게든 잡아야지. 그나저나 이거 잡으면 나랑 반씩 나눠 갖기로 한 약속 꼭 지켜야 해!”

“당연하지. 이 친구야!”

두 사냥꾼은 호숫가에서 서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숲에는 어찌 동물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걸까? 동물들이 살지 않는 건 아닐 텐데 말이야. 보통 다른 숲에는 한두 마리라도 눈에 띄었는데 말이야.”

“나도 그 점이 이상한데. 은빛여우가 있는 숲엔 동물이 그다지 보이지 않더라고. 누가 그러던데. 은빛여우가 있는 숲은 은빛여우가 대장 노릇을 한다나 봐. 그리고 그 근처에는 호랑이도 없다고 하던데. 자네 말을 듣고 보니 호랑이 가죽보다 은빛여우 가죽이 더 비싼 게 이해가 돼. 호랑이는 덩치도 크고 맹수지만 은빛여우보다 잡기 쉽잖아.”

“하긴. 그뿐인가? 호랑이는 가죽도 무겁고. 내가 봐도 은빛여우 털이 더 고급스럽지. 예쁘지 않나. 나도 내 마누라에게 은빛여우 가죽으로 옷 하나 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던데 말이야.”

“우리 같은 서민이 무슨…… 옷 아니라 목도리 하나, 아니 장갑 하나라도 가죽으로 해 주면 좋겠네.”

“어휴~ 됐네. 됐어~ 돈 못 벌어 온다고 구박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꿈같은 소리는 하지도 말고 그냥 다람쥐 가죽이면 돼. 그걸로 충분히. 우리 같은 사람들은……”

두 사냥꾼은 허탕을 친 것이 분하기라도 한 지 터덜터덜 걸어갔다.

“덫이나 확인하러 가세나~ 뭐라도 한두 마리 걸려 있지 않겠어?”

“하긴 거긴 매일 뭐라도 잡히니까 오늘 밥값은 하겠지.”

두 사냥꾼은 힘 빠진 걸음으로 덫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동굴 입구. 은빛여우 두 마리가 무언가를 열심히 물어뜯고 있다. 한 마리는 아까 태니와 반대방향으로 뛰어갔던 엄마 은빛여우다.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덫은 엄마 은빛여우의 날카로운 이빨로도 쉽게 잘리지 않았다.

“손이야. 아프지? 조금만 참아. 엄마가 빨리 끊어 줄게.”

손이는 괜찮다고 말고 싶었다. 사실 사냥꾼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데다 시큰거릴 정도로 아픈 다리 때문에 입도 떨어지지 않았다. 손이는 발목에 걸린 올가미를 오로지 엄마 여우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절반 정도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물어뜯으면 끊어질 거야. 아파도 좀 참아.”

손이의 발목은 이미 피부가 찢어져서 털과 피가 올가미에 함께 엉겨 붙어 있었다. 게다가 엄마 여우의 침까지 섞여 진득진득하고 피 냄새가 주변까지 멀리 퍼져 있었다. 엄마 여우의 얼굴에도 태니의 피와 침이 잔뜩 엉겨 붙었다. 올가미가 얼마나 질긴지 엄마 여우의 잇몸에서도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엄마는 사냥꾼이 나타나기 전에 어떻게 해서라도 손이를 구해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평소 같으면 주변에 누가 나타나더라도 냄새나 소리로 쉽게 알아채고 대비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코나 귀는 물론이고 온 정신이 올가미를 끊는 데 집중한 상태라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감시하는 것은 오로지 손이의 몫이다. 하지만 손이는 귀를 쫑긋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두려움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멀리서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손이는 심장이 멎어버리는 듯했다.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저기 사냥꾼이……”

엄마 여우는 올가미를 물어뜯다 말고 킁킁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코보다 눈이 먼저 사냥꾼을 발견한 갓이다. 그만큼 사냥꾼이 가까이 온 것이다. 사냥꾼 역시 은빛여우를 발견한 게 분명했다. 두 은빛여우는 사냥꾼의 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이와 엄마 여우는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엄마! 엄마! 도망가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엄마라도 빨리 도망가야 해요. 사냥꾼이 총을 쏘기 전에 빨리요.”

손이가 소리쳤다.

“안돼! 그럴 수 없어. 엄마가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엄마가 우리 손이를 지켜줄 거야. 엄마는 절대로 손이를 두고 혼자 도망가지 않아. 절대로!”

엄마 여우는 온몸에 힘을 잔뜩 주며 사냥꾼을 노려보았다. 엄마 여우의 털이 모두 곤두섰다. 엄마 여우는 사냥꾼의 총이 두려웠지만 절대로 손이를 두고 갈 수 없었다. 사냥꾼이 손에 총을 들고뛰기 시작했다. 손이는 너무 무서워서 다리의 모든 힘이 풀린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엄마 여우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손이를 지켜야만 했다. 사냥꾼은 혼자였다. 엄마 여우는 있는 힘을 다한다면 혹시라도 사냥꾼을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지만 힘이 났다. 손이는 용기를 쥐어 짜내고 있었다. 이미 덫에 걸린 발목의 통증은 잊은 지 오래다. 사냥꾼은 벌써 은빛여우들 앞에까지 다가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사냥꾼은 손에 들고 있던 거두었다. 사냥꾼은 총을 등에 메더니 상체를 수그렸다. 그리곤 뭔가를 들고 좌우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마 여우는 사냥꾼의 동작에 집중하며 몸의 방향을 바꿨다. 사냥꾼이 오른발을 옮기면 엄마 여우도 사냥꾼의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사냥꾼의 움직임에 따라서 대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사냥꾼이 혼자라는 사실이다. 엄마 여우는 사냥꾼들이 대체로 여럿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 여우는 근처에 사냥꾼이 더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떻게든 사냥꾼이 더 모여들기 전에 손이를 구출해야 한다. 게다가 이 사냥꾼은 다른 인간들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훨씬 강해 보였다. 사냥꾼은 총도 등에 멘 채다. 만약 그가 총을 꺼내어 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없다. 그저 총을 물어뜯는 수밖에 없다. 엄마 여우는 사냥꾼보다 먼저 공격하는 것만이 손이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여우는 사냥꾼이 발을 옮기는 순간 펄쩍 뛰어올랐다. 사냥꾼의 손목을 물어뜯기 위해서다. 손목을 다치면 적어도 총을 쏘지는 못한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사냥꾼을 향해 날아가던 엄마 여우는 그 판단이 큰 실수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냥꾼이 손에 들고 있던 뭔가를 휙 던졌는데 그것은 엄마 여우의 몸 위로 덮쳐 오고 있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그물이었다. 엄마 여우는 사냥꾼의 손목을 스치듯 물긴 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사냥꾼의 손목을 스친 엄마 여우의 송곳니에 인간의 피 냄새가 풍겼고 그와 동시에 손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엄마! 피해요!”

손이는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엄마 여우는 이미 사냥꾼이 던진 그물 아래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엄마 여우의 눈에 멀리서 태니가 미친 듯이 달려오는 것을 보였다.

“안돼! 태니. 숨어!”

엄마 여우는 목청이 터질 것처럼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엄마 여우는 태니가 분명히 사냥꾼에게 달려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니는 아빠 여우인 뾰족귀의 성격을 그대로 닮은 녀석이었다. 태니가 엄마와 손이를 두고 숨어 버릴 녀석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태니는 엄마의 말을 무시한 채 미친 듯이 뛰어오고 있었다.


“어이~ 한스! 우리가 설치해 둔 덫에서 은빛여우를 훔쳐가려는 건가?”

언제 나타난 것인지 손이와 엄마 여우를 잡으려 했던 덩치가 큰 사냥꾼 뒤에 두 명의 사냥꾼이 서 있었다. 게다가 귀가 쫑긋한 사냥개 두 마리가 으르렁대고 있었다. 태니를 추적하던 다른 두 명의 사냥꾼과 사나워 보이는 시커먼 두 마리의 사냥개였다. 사냥개는 주인의 명령만 기다리는 듯했다. 사냥개의 송곳니에서는 끈적한 침이 주욱 흘러내렸다. 멀리서 달려오던 태니는 사냥꾼들과 사냥개를 보고 자리에 멈춰 섰다. 일단은 무조건 달려들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서다.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사냥꾼에게 잡혀서 죽게 될 것이 뻔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태니는 재빨리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사냥꾼들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두 마리의 사냥개는 이미 익숙한 태니의 냄새를 맡았고 태니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냥꾼들이 목에 매단 줄만 풀어준다면 당장이라도 뛰어가 태니를 물어뜯을 준비가 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냥개들은 태니를  쫓아 하루 종일 숲 속을 뛰어다니다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바짝 약이 오른 상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사냥개들은 미치도록 흥분하고 있었다. 다행히 태니는 사냥개들보다 훨씬 영리한 녀석이다. 태니는 수풀에 숨어 머리를 굴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아빠가 죽은 그 자리에서 온 가족이 모두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엄마는 태니가 수풀에 숨은 후 사냥꾼들 누구도 태니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태니야. 여차하면 도망쳐야 해. 사냥꾼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해. 숲에 가서 모두에게 알려야 해. 도망치라고~”

엄마는 목소리가 떨리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태니는 엄마가 시킨 것처럼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아빠는 아무리 급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라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날 거라고 했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기회는 있다고 했다. 태니는 엄마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인간들이 눈치채도록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냥꾼들은 손이와 엄마 여우를 두고 소유권 문제로 대치하고 있다.

“세르게이~ 이게 왜 자네들 거라는 거지?”

덩치가 큰 사냥꾼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세르게이라는 사냥꾼은 황당한 표정을 한 채 입만 벌리고 있다.

“여긴 우리가 덫을 놓은 자리야. 우리 덫에 걸렸으니 그 은빛여우는 우리 거지. 한스 자네가 설마 그걸 자네 것이라고 우길 참이라면 포기하고 가시지.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세르게이는 으스대는 투로 말했다.

“세르게이! 자넨 정말 비양심적인 사람이야.”

한스가 비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비양심적? 지금 한스 자네가 우리 은빛여우를 가로채려 하는 걸 두고 비양심적이라고 하는 거야. 이걸 보고 뭐라고 하는지 아나? 적반하장이라고 하는 거야.”

세르게이가 소리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똥 뭍은 놈이 방귀 뀐 놈에게 성낸다더니…… 바로 한스 자넬 보고 하는 말이야.”

세르게이와 함께 있던 사냥꾼도 한마디 거들었다.

“하하하~ 자네들 정말 뻔뻔하구먼. 지금 이 그물에 잡힌 은빛여우를 자네들 것이라고 말하는 건가? 아니면 저기 올가미에 걸린 은빛여우를 말하는 건가?”

한스는 두 사냥꾼에게 물었다. 그러자 세르게이는 동료 사냥꾼에게 뭐라고 속삭이더니 한스를 보며 말했다.

“잘 보니 그물에 잡힌 놈은 자네 것이 맞는 것 같네. 하지만 올가미는 우리가 설치한 것이니 우리 것이네. 그러니까 올가미에 걸린 놈은 덩치도 작고 하니까 그냥 우리에게 양보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내가 왜 그래야만 하지?”

한스가 한쪽 다리에 중심을 옮겨 삐딱하게 서서는 비웃는 듯한 표정을 했다.

“이건 너무 하는 거 아닌가? 우리가 설치한 올가미에 걸린 동물은 우리 것 아닌가? 다투지 말고 그냥 내주게. 양심 없이 남의 것을 가로채지 말고. 물론 싸움으로 치면 당연히 한스 자네가 이기겠지만 우리끼리 꼭 그럴 필요가 있겠나?”

세르게이가 이제는 한스를 설득하려는 듯 말했다.

“그래? 자네들 정말 말 잘했군. 지난주에 자네들이 내 덫에 걸린 동물들을 모두 훔쳐갔던 건 기억하나?”

한스는 이젠 표정을 바꿔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누가 그러던가? 우리가 하얀바위언덕에서 자네 덫을 만졌다는 걸 누가 보기라도 했나? 증거나 증인도 없으면서 우리를 도둑으로 몰면 섭섭하지. 어떻게 그런 막돼먹은 생각을 하는 거지?”

세르게이는 화를 내며 말했다. 옆의 사냥꾼이 세르게이의 팔을 잡고 말렸지만 세르게이는 그의 동료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스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한스는 어이없다는 듯 하늘을 올려보더니 한참을 웃은 후에 세르게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내가 하얀바위언덕에 덫을 설치한 건 아무도 모르는데. 자네들은 그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이래도 내가 자네들을 거짓으로 몰아세운다고 주장할 건가? 내가 그걸 다 도둑맞고 얼마나 큰 피해를 봤는지 알면서도 겁이 나지 않았던 것 같군.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렇게 뻔뻔하게 굴 건가?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한번 해보자는 말로 들리는데?”

한스의 표정은 매우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미안하네. 한스. 자네가 피해를 봤다고는 하지만 자네는 사실, 늑대 외에는 잡지도 않으면서 왜 그러나. 어차피 놔줄 것인데 우리가 가져갔다고 해서 문제 될 것도 없잖아. 그래, 자네가 놓은 덫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어. 하지만 절대로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야. 자네 거라는 걸 알았다면 우리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일도 없지 않겠나?

세르게이의 동료 사냥꾼이 한스에게 말했다. 그리곤 세르게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세르게이. 괜히 욕심부리지 말자고. 우리가 고의로 그랬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가 한스의 덫에 걸린 동물들을 모두 가져간 건 사실이잖아. 우리 오늘 허탕을 치긴 했지만 우리도 한스에게 죄를 진 거니까 양보하고 서로 화해하자고. 이렇게 싸우게 되면 마을에서 어떻게 마주 보고 살겠어. 나는 차라리 이걸로 서로 없었던 걸로 치고 편한 관계로 살고 싶네. 세르게이. 그렇게 하자고~”

세르게이는 그의 말에 얼굴이 빨개져서 입을 열었다.

“한스! 어쨌든 그땐 미안했네. 하지만 절대 고의는 아니었어. 그냥 하루 종일 허탕치고 가다가 자네가 설치한 덫에 걸린 동물들을 그냥 두고 가기가 그렇더라고. 그럼, 그 은빛여우는 그날 우리 실수를 만회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양보하겠네.”

세르게이와 동료는 한마디 남긴 후 뒤돌아 자리를 떠나려 했다. 값비싼 은빛여우 가죽이 너무 아까운 나머지 그들의 어깨에는 힘이 다 빠져 있었다.

“세르게이!”

한스는 세르게이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두 사냥꾼은 한스를 돌아보았다.

“대신 이거라도 가져가게. 보니까 오늘 빈손인 것 같은데!”

한스는 근처에 아무렇게 던져둔 동물들의 가죽 더미를 가리켰다. 모두 늑대 가죽이었다.

“그…… 그래도 괜찮겠나?”

세르게이는 염치없다고 생각했지만 빈 손으로 돌아가면 식구들이 아쉬워할 것이 생각나서 한스의 제안을 쉽게 물리치지 못했다.

“난 먹여 살릴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괜찮아. 얼른 가져가게. 맘 변하기 전에.”

한스가 한 마디 하자 그들은 한스의 동물 가죽이 담긴 주머니를 재빨리 주워 들었다. 한스는 손이가 묶여 있는 올가미를 풀어 손이의 목 뒷덜미를 잡아 들었다.

“엄마~ 살려줘요~”

손이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 세차게 발버둥 쳤지만 허공만 허우적거릴 뿐 한스에게 전혀 대응할 수가 없었다. 두 마리 사냥개는 거세게 짖었다.

“안돼! 절대 안 돼! 손이를 살려줘~ 차라리 나를 잡아가~”

엄마 여우가 그물에 네 다리가 모두 끼인 채 소리를 질렀다. 세르게이는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은빛여우들을 쳐다보았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던 두 사냥꾼은 늑대가죽을 들고 멀어져 갔다. 사냥개 역시 무엇이 그리 아쉬운지 낑낑거리는 소리를 이어갔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사냥개 소리도 들리지 않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몸을 돌린 한스는 뒤돌아 앉아 그물을 뒤집었다. 엄마 여우가 그물 안에서 어찌나 몸부림쳤는지 그물은 풀기 힘들 정도로 엉켜 있었다. 손이는 언제 기절해버렸는지 한스의 손에 들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한스는 손이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엄마 여우는 손이를 소리쳐 불렀지만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풀에 숨어 한스를 공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태니는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역시 아빠 말대로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생기는 법이었다. 태니는 한스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다 방심한 틈을 타서 있는 힘껏 달려가 한스를 덮쳤다.

“우악! 뭐야?”

한스는 뒤에서 무언가 뛰어 오는 소리를 듣고 급히 뒤돌아 서며 주먹을 내리쳤다. 태니는 깽~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자신의 주먹에 나가떨어진 태니를 쳐다보는 한스는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어휴! 세 녀석이나 되네.”

태니는 손이 근처에서 기절한 채 쓰러져 있다. 엄마 여우는 두 아들이 사냥꾼에게 당해 쓰러져 버리자 절망에 빠졌다. 적어도 태니는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마지막 희망이 있었지만 모든 게 무참하게 깨져 버린 것이었다. 너무 절망적이었다. 엄마 여우는 눈물밖에 나지 않았다.

“아우~ 아우~”

엄마 여우는 소리 내어 울었다.






제 이름은 손이에요. 지금까지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고 있죠. 그땐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저는 한스의 손에 목 뒷덜미가 붙들린 채 허우적거리다가 기절해 버렸대요. 다시 눈을 떴을 땐, 한스가 엄마를 그물에서 풀어내고 있었고 태니는 제 옆에 쓰러져 있었어요. 태니가 대체 왜 잡힌 건지 알 수가 없었어요. 다행히도 아무 상처 없는 것을 봐서 죽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태니의 배가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거든요. 숨을 쉬고 있다는 거니까요. 엄마는 제가 정신을 차린 것을 아셨는지 계속 기절한 척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어떻게든 태니도 데리고 탈출해야 했으니까요. 저는 엄마가 시킨 대로 꼼짝 않고 누워 있었어요. 한스는 엄마를 가둬 둔 그물을 다 풀어 주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엄마를 잡으려 하지 않았어요. 엄마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건지 무서워서였는지 그 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어요. 한스는 뭐라고 계속 소리쳤어요. 우린 당연히 한스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죠. 어떻게 제가 한스라는 이름을 알고 있냐고요? 그가 한스라는 것도 아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에요. 그땐 한스가 우리 아빠 뾰족귀를 죽인 사냥꾼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한스는 엄마를 풀어줬지만 엄마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어요. 저와 태니를 두고 가실 순 없었대요. 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태니의 옆에 앉았어요. 그리고는 한스가 울기 시작했어요. 우린 한스가 왜 태니를 보고 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우리는 인간이 우는 걸 처음 봤어요. 한스는 태니의 목에 걸린 신기한 줄을 만지작거렸어요. 그건 아빠가 태니에게 직접 목에 걸어 준 거예요. 원래 그건 아빠가 제일 좋아하던 것이었는데 태니에게 물려주신 거예요. 아빠가 한스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했거든요.

“뾰족귀! 이건 내가 뾰족귀에게 준 건데. 넌 누구니? 너희들은 뾰족귀와 어떤 사이길래……”

이상한 일이었어요. 저는 한스의 말이 들렸어요. 그리고 예전에 할아버지께서 해 주신 말이 기억났어요. 은빛여우가 인간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아주 순수한 영혼을 가진 아이일 경우와 죽어서 영혼이 될 경우뿐이라고 하셨어요. 물론 인간은 우리말을 들을 수 없어요. 죽어서 영혼이 되어야 가능한 거죠. 나는 아빠에게서 들었던 모험 이야기 중에 한스라는 아이를 늑대에게서 구해주고 인간 마을까지 데려다주었다던 이야기를 기억해 냈어요. 저는 직감적으로 지금 이 사냥꾼이 바로 그 아이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한스는 잠시였지만 순수했던 기억을 들쳐 냄으로 해서 우리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거였어요.

“얘들아. 미안해. 나는 너희 은빛여우에게 빚이 있어. 내가 비록 사냥꾼이 되었지만 너희들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아. 친구가 깨어나면 빨리 너희 숲으로 돌아가도록 해. 앞으로도 항상 조심하고.”

한스는 태니의 목에 걸린 줄을 한참 만지작거리더니 태니를 들어 안아 얼굴에 한참을 비비기 시작했어요. 저는 한스가 태니를 잡아먹는 줄 알고 달려들 뻔했어요. 하지만 한스는 이미 제가 정신을 차린 것을 눈치챘는지 제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어요. 엄마는 제게 한스가 위협을 주는 게 아닌 것 같고, 그가 아빠 친구였던 꼬마 한스가 맞는 것 같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한스는 태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서서 우리를 내려다봤어요. 우린 더 이상 한스에게 으르렁거리지 않았어요. 한스에게서 살기나 위협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한스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주섬주섬 짐을 챙겨 떠나 버렸어요. 아빠와 인연이 있었던 한스가 나타나 우릴 구해주고 살려준 거예요. 정말 신기했어요. 태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렸어요. 태니는 한스에게 달려들다가 한스의 주먹에 맞고 한 방에 기절해 버린 거였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한스는 정말 곰처럼 강한 인간이었어요. 아마 두 사냥꾼도 그런 한스가 무서웠던 거겠죠.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한스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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