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의 나를 발견하다
오래된 서류를 정리하려고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상자를 열었다.
먼지 폴폴 나는 서류 더미들을 꺼내면서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회상에 잠겼다.
상자 밑바닥에 거의 다가갈 즘 되자 눈에 익은 흐린 갈색 다이어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당시 프로그래머였던 난 글을 쓰는 걸 좋아해 이런 아날로그한 감성이 있었다.
언젠가 예전 글들을 잠시 훑어본 적이 있었는데, 이십 대 시절에도 난 소설을 쓰겠다고 끄적여둔 적이 있었더랬다.
그 소망을 이루긴 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곰팡이 끼고 썩어 너덜너덜한 녀석을 보니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십 대, 속지만 갈아 끼워 쓰던 다이어리였는데 이런 게 있었더란 걸 떠올리며 표지를 열었는데 내 손을 떠난 지 무려 이십 년은 족히 넘었을 다이어리 속 자잘한 것들이 기억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래된 도서관 대출증과 당시 여자친구와 함께 찍었던 스티커 사진이 붙어 있었다.
스티커 사진은 색도 변색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 뒤엔 일러스트레이터였던 여자친구의 작품이...
그리고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던 가수 정경화의 친필 사인이...
정경화는 여자친구의 선배였고 나를 위해 직접 사인을 받아다 준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그녀에게 참 모질게 군 남자친구였다.
23년 묵은 나의 다이어리...
참~
이번 명절에 제주도 집에 가서 또 어느 상자 안에 썩어가고 있을 한 움큼 되는 속지들을 찾아 꼼꼼히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