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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칙 없이 바쁘게만 산다는 건

내 삶에 원칙이 있었던가?

by 루파고

요즘 오래된 일기와 메모를 뒤지는 습관이 생겼다.

불과 몇 달 전에 끄적인 메모에서도 새로움이 느껴지는 걸 보면 생각이란 정체 없이 꾸준히 흐르는가 싶다.

약 오 년 전의 일기에서 '내 삶에는 어떤 원칙이 있나?'라고 자문한 글을 찾았다.

질문 바로 아랫줄에는 '내 삶에 원칙이 있었던가? 삶의 원칙 없이 바쁘게만 살았구나.'라는 답글이 쓰여 있었다.

필체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 년이나 지난 이 글을 쓰는 시점엔 내 삶의 원칙을 찾았을까?

어이없지만 지금도 내 삶엔 원칙이 없다.

어찌 된 일일까?

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당장 원칙을 찾아 머릿속을 돌아보았지만 건져지는 건 없었다.


다시 자문한다. 내 삶의 원칙은 무엇이냐?


정말 모르겠다.

왜 지금껏 원칙 없는 삶을 살았는지 말이다.

마침 그 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화두를 열었다.

선배 역시 나의 질문에 딱 부러진 답을 주지는 못했다.

우리는 삶의 원칙에 대해 짧은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신앙심이 깊은 그는 신에 빗대기도 했고 현실적인 삶을 보면 선한 돈벌이에 중심이 있지 않겠느냐 했다.

신이라 해서 꼭 예수나 부처 같은 절대신을 말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자기 안에 있는 나름의 신을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내린 최종 결론은 '삶의 기준이 원칙이니 그냥 즐겁게 살자'였다.

요즘에는 '가훈'을 세우고 사는 집이 많이 줄었지만 이것 역시 가족의 원칙인 셈이다.

즐거운 삶이라 했지만 행복한 삶을 의미하는 거다.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면 성공한 삶이 아닐까?

여기서 다시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고 말았는데 역시 돈이 결부되고 말았다.

삶의 원칙에는 이상적인 부분과 현실적인 부분에 양면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몇 정거장을 걸어간다 치자.

사사로운 고민이 있더라도 삶이 즐거운 사람에겐 몇 정거장을 지나치며 주변 풍경이 보이겠지만 삶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는 풍경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삶의 원칙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제가 반영된 것이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 후회가 있게 마련이다.

지난 후회를 번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삶의 원칙일 것이다.

내 삶은 내가 주인이다.

삶의 원칙에는 옳고 그름이 가름하지 않는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가 있다.

시의 제목으로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시구는 기억할 것이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나이 한참 먹고 다시금 이 시를 읽어보니 그냥 웃고 살 수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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