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흔적
지우려 하지 않았지만 하나둘 사라져 간다.
어릴 때 우리 집 거실에는 커다란 입식 괘종시계가 있었다.
커다란 추가 똑딱거리며 매 초를 알렸다.
늦은 밤, 특히 밤 열 두시가 되면 괘종시계의 소리는 얼마나 괴기스러웠는지 모른다.
자다가 갈증이 생겨도 절대 거실로 나가지 않았다.
전에 본 적 없던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다는 생각을 스스로 가공하곤 했다.
공포영화에 길들여진 탓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괘종시계는 더 이상 추를 움직이지 않았다.
명을 다한 것이다.
텔레비전과 소파 다음으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괘종시계의 존재감은 상당했다.
매 시간 정시마다 문을 열고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하던 뻐꾸기도 모습을 감추었다.
자정이면 괜한 공포심을 유발하던 괘종시계는 귀신도 데려가 버렸다.
다음날 나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괘종시계를 뜯기 시작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 손길을 탄 괘종시계는 새 생명을 얻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집에는 PENTAX 카메라가 한 대 있었는데 어떤 이유였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작동을 하지 않았다.
요즘에야 서랍 속에도 흔히 굴러다니는 존재가 됐지만 약 사십 년 전만 해도 카메라는 집에서 손꼽는 고가품 중 하나였다.
나는 카메라를 고치겠다는 목표로 시계 드라이버 세트를 꺼내 카메라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걸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 시간을 끙끙거린 끝에 완전히 분해할 수 있었다.
셔터스피드와 조리개의 조절로 상을 맺는 카메라의 메커니즘은 그때 익힌 것 같다.
문제는 조립 과정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됐다.
카메라는 며칠 동안 몸살을 앓았다.
아무리 조립해도 제대로 맞춰지지 않았다.
조립은 분해의 역순이라지만 기껏 열세 살 정도였던 나의 머리로 감당할 수 없었다.
카메라는 반쯤 조립된 모습으로 상자 안에 담겼고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 속에서 완전히 분해되다 끝내 소멸되고 말았다.
카메라는 아버지의 유품 중 하나였다.
당시 나는 유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아버지와 공유했던 것들 중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담아주었던 아주 소중한 카메라는 존재감 자체도 소멸된 것이다.
그 후 조립되다 만 카메라는 상자 채로 버려졌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대형사고를 치고도 어머니에게 딱히 큰소리 한 번 듣지 않은 것도 용한 일이다.
비록 고장이 났다지만 엄청난 고가품이었으니까.
집에는 아버지의 훈장이 열 개는 넘게 있었다.
그것들도 죄다 어디 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유품은 세월이 흐르면서 어디론가 흘러가 버리고 없었다.
아버지의 테니스 라켓, 스케이트, 나침반, 하모니카, 레이밴 선글라스, 스무 개 남짓 하던 메달 등 아버지의 유품은 상당히 많이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기억만 존재한다.
아버지의 존재감이 묻어있던 그것들은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거실에 걸려있던 고래 이빨과 고래 귀는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였다)에 기증했다.
누구나 탐을 냈던 그것들을 학교에 기증했던 어머니의 생각을 이제는 이해할 것도 같다.
아마 아버지의 존재를 잊지 못하는 게 더 힘드셨을 것이다.
나에게는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어머니 소장품 중엔 아버지의 기억을 간직한 유품 하나쯤은 남겨 두시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아버지는 기억 속에서 가끔씩 살아난다.
삶이 길어질수록 기억은 조금씩 흐려지지만 아주 가끔은 아버지와의 추억이 강렬하게 나를 흔들어 놓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