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의 ARS 대응

AI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며

by 루파고

몇 달 전 집에서 편하게 사용할 오디오 기기를 구입해 달라는 어머니의 명령이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사용해 왔고 전문가 아닌 이상에 그 정도면 음질이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국내 소기업의 제품을 주문했다.

구매 후 배달까지는 겨우 이틀 정도 걸린 것 같다.

문제는 몇 달 지나지 않아 고장이 난 것이다.

전자기기, 기계류 등은 사실 복불복이다.

정말 재수가 없어야 불량품을 만나게 되는 게 현실이니까.

그렇지 않으면 제조사는 A/S에 치어 존망의 위기에 접하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제품설명서에 기재된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어 제품 수리를 의뢰했다.

업무 흐름이 체계적인 택배사는 무난하게 제품을 수거해 갔다.

며칠 뒤인 10월 25일에 제품이 입고되었다는 연락이 왔고 제품의 수리내역 및 비용에 관한 내용은 7일 이내에 연락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입고일로부터 18일이나 지난 11월 11일이 되어서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불안해진 어머니는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자동응답 시스템과 씨름을 거듭한 어머니는 내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과 함께 해결을 해달라고 하셨다.

그게 11월 13일이었다.

무려 3일간 전화를 하다 화가 심하게 나셨고 포기하신 것이다.

나는 13일, 14일, 15일 3일에 걸쳐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거의 하루에 한 시간 가까이 전화를 붙들고 대기인 수가 줄어들기를 기다렸다.

3일 차인 11월 15일, 나는 오기가 생겨 오전 10시 ARS 시작시간을 기다리다 업무적인 통화가 길어져 11시가 넘어서야 전화를 걸었고 이번에는 30분 정도 대기 끝에 통화를 할 수 있었다.

10시부터 12시까지, 1시부터 5시 까지만 상담이 가능하기에 나 외에도 엄청난 경쟁일 것이라고 예측해야 했다.

대기인 수는 불과 3명이었다.

13일엔 5명이었고, 14일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전화를 몇 번 걸었는지 모른다.

눈물겨운 기다림이었다.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었다.

기다리던 중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떠올렸다.

고객응대직원의 보호조치가 시행됐다고 하는데 감정노동자의 권익은 지켜주어야지 싶었다.

이렇게까지 연결이 되지 않은 건 그들 잘못은 아니니까 말이다.

화를 내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건만 목소리에는 잔뜩 화가 담겨 있었다.

비록 욕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소비자보호원까지 들먹이며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는 미안하지만 기업을 대변하는 입장인 그와의 대화에는 전혀 미안하고 싶지 않았다.

담당 기사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는 답변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10월 25일 입고 후 7일 후 확인해 주겠다던 제품이 11월 15일이 되어서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나는 무상 A/S 기간이 일 년인 제품에 수리하는 데만 한 달이라면 제품 사용 기간에 대한 보상은 어떤 식으로 하느냐고 물었다.

물론 돌아오는 답변은 죄송하다는 말 밖에 없었다.

통화하기도 어려우니 본사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더니 다른 번호는 없다고 했다.

그럼 거래처 하고는 어떻게 일을 하냐 물었더니 요즘에는 휴대폰으로 업무를 보기 때문에 회사에 다른 번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어처구니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대체 내가 아는 회사들은 뭘까?

그에게 화를 내 봐야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철저하게 약속만이라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월요일까지 담당 기사와의 통화 약속을 잡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월요일인 11월 18일에 담당자에게서 연락이 올 것이니 혹시라도 연락이 오지 않으면 내게 바로 알려달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월요일 저녁에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했던 그는 고객과의 약속을 우습게 여긴 것이다.

다음날인 11월 19일(오늘), 오전에 업무가 바빠 잊고 있다가 점심식사를 한 후에야 간신히 여유가 생겨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대기인 수가 8명이다.

약 40여 분 정도 자동응답 시스템과 씨름하던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홈페이지 구석에서 회사의 다른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번호 역시 ARS로 연결됐다.

같은 시스템이었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몇 분 동안 광분의 검색 끝에 드디어 070으로 시작하는 인터넷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만 것이다.

보물을 찾은 듯한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또 그러면 안 된다고 다짐을 했건만 나도 모르게 화부터 내고 말았다.

물론 단어가 거칠거나 한 것은 아니다.

억양에 감정이 묻어있었을 것이다.

왜 대뜸 화부터 내느냐고, 어디에 전화를 걸었냐고 묻는 그에게 화가 나기도 했지만 침착하게 설명해 주려고 노력했다.

담당부서도 아니고 담당자도 아닌 그는 상담 직원보다 더 체계적으로 상담을 끌어갔다.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30분 내로 담당자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으면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는 다짐까지 하며 친절하게 나의 불만을 받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금요일인 11월 15일에 전화통화를 했던 상담사가 죄송하다며 연락이 왔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느냐는 내 질문에 일이 바빠서 까먹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너무 책임감 없는 답변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의 업무는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물건은 언제 보내줄 것이냐는 질문에는 담당 기사가 지금까지 제품을 확인하지 못했다며 어떻게든 제품을 수리해서 오늘 당장 발송해 주겠다고 했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은 것인지 워낙 불량이 많아 수리기사가 부족해 업무량이 쌓여 처리가 어려운 것인지......


고객에 대한 기업의 대응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보통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 제품을 신뢰하는 이유는 사후처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대기업은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있어 엄청난 재원을 투자한다.

작은 기업이니 대기업처럼 경영하는 게 어렵다는 건 이해한다.

우수한 인재를 쓰기 어렵다는 것도 이해한다.

만약 대표나 임직원이 애사심을 가지고 있다면 조기에 문제점을 찾아서 해결하지 않았을까?


나 같은 경우는 이 기업의 제품에 신뢰를 하여 이십 년 가까이 다양한 제품을 구입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도 많이 했었다.

오죽하면 대기업 제품을 사다 달라고 하시던 어머니에게도 이 제품을 권해 드렸을까?

솔직히 이번 일로 인해 신뢰가 두텁던 그 기업의 이미지는 완전히 깨져 버렸다.

그나마 일을 원만하게 해결해준 그 직원 덕분에 별문제 없이 해결되기는 했지만 여차하면 회사까지 갈 뻔했다.

전화통화 기다리며 한 시간 스트레스받느니 직접 찾아가 상황을 해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이번 일을 계기로 일부러 중소기업 제품을 구입해준 고객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상황을 초래하면서도 즉각적인 대처를 하지 않는 기업의 모습이 안타깝다.

AI가 대중화되어 작은 규모의 기업에도 적용되면 이런 일들이 사라질 수 있을까?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는 무서운 예측이 계속되는 세상이지만 기업 입장에서 보면 그게 현명한 판단인지도 모를 일이다.


크던 작던 잘 되던 안 되든 간에 기업을 경영하고 기업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적극적이면 좋겠다.

담당 직원은 알고 있을까?

고객응대 시스템이야 그런 사소한 것도 점검하지 못한 대표나 담당자의 책임으로 돌린다 치더라도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 업무를 맡은 본인은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실수로 잊은 약속 하나 때문에 시끄러울 뻔한 일을 처리했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나 하나로 인해 엄청난 고객을 잃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적어도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권할 생각이 없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오늘 이 일로 나 스스로도 되돌아보기로 한다.
나는 매사에 적극적이었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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