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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Jun 15. 2020

엄마의 만두

내가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이북 사람이다.

말이 어릴 때지 내 기억에 있는 할아버지의 존재는 겨우 흑백사진에서 본 비쩍 마른 체구의 노인이다.

할아버지는 일제 때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셨고 6.25 전쟁 후 피난 내려와 수원에서 터를 잡았다.

그리하여 나의 본적은 수원이 됐다.

장손 역할이라고는 1도 하지 않는 집안의 장손인 나는 어찌하다 보니 지금도 비공식 독립유공자 장손으로 쭉 살고 있다.


하나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독립운동을 했다고 해서 모두 유공자로 등록된 건 아니다.

우리 집안 같은 사례가 더 있는 걸로 안다.

할아버지의 뜻이 그러하셨는지 집안 식구들이나 아는 집안 이야기 정도로만 남겼고 나 역시 그런 일로 나대거나 특혜를 받는 등 정부의 재원을 갉아먹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물론 어릴 땐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왜 받지 않나 싶었지만 나이가 찬 지금은 오히려 그게 더 자랑스럽단 생각을 하게 됐다.

정치적 문제들을 거론할 생각은 없지만 여러 광주사태 등의 별의별 유공자 특혜시비 등이 불거지는 걸 보면 두 세대나 지난 할아버지의 치적 등에 있어 행여나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불경스러운 작가적 상상에까지 이르다 보니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라는 생각 했다.


어쨌거나, 역시 장손이셨던 아버지의 아내인 울 엄마는 이북 음식을 배워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 지역 분들에겐 돌 맞을 소리지만, 엄마는 음식 맛없기로 유명한 경상남도 출신에 부잣집 셋째 딸로 결혼 전 요리라곤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던 사람이다.

요즘엔 아무리 요리를 못 한다 해도 라면은 끓 줄은 안다고들 하는데 주방에서 손에 물 한번 묻혀본 적 없이 자랐던 엄마가 할머니의 혹독한 시집살이를 몸소 체험하며 배운 요리들이 있다.

내가 알기로는 비록 이북에 큰집이 남겨졌고 남한에 터를 잡은 우리 집은 종갓집이나 마찬가지인 집안이 되어 본의 아니게 장손 즉, 종손 집안이었으니 일 년에 열 번은 넘었을 제사상을 차려야 했을 엄마에겐 스트레스가 아니었을까 싶지만, 실제로는 요리에 취미를 들이셨는지 동네에서도 손꼽히는 요리 실력을 인정받곤 하셨다.

지금 툭 생각나는 엄마의 음식들 중 이북 음식들을 몇 개 열거해 보면...

별 거 들어간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칼칼하고 시원한 김치는 하얀 곰팡이가 올라 묵은지가 되면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깊이가 있는데 이모들은 지금도 문득문득 엄마의 김치가 생각난다며 연락이 온다.

물김치며 깍두기며 김치류들 대부분 불필요한 양념이나 젓갈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정갈함이 있었다.

고사리를 베이스로 하는 녹두전은 내 평생 최애 하는 음식이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음식이 있지만 지금까지 가장 인정받는 음식이 바로 이북식 만두다.

어릴 땐 일 년에 두어 번 대량으로 만두를 빚는 날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몰랐지만 동네 사림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이기 위해 그렇게나 많은 양의 만두를 빚었던 것이다.

돼지고기를 갈아 부추를 베이스로 한 물만두는 식초와 매실액, 마늘 등을 넣은 초간장에 담뿍 찍어서 먹는 일종의 퓨전 이북 만두였는데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고 배가 터지게 먹어도 계속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배가 터지게 먹고도 더 먹었으니 말이다.

뜨거운 물에서 갓 건진 물만두는 커다란 접시 위에 올려져 수증기를 모락모락 피워냈다.

상 위에 접시가 내려지기 바쁘게 온 가족의 젓가락이 쉴 틈 없이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 속도는 배가 어느 정도 찰 때까지는 늦춰지지 않았다.

손님들은 거실과 안방에서 연신 감탄사를 남발하며 만두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아버지가 내어 놓은 맥주는 물만두와 궁합이 잘 맞았을까?

어릴 땐 술과 음식이 그렇게 절묘한 합을 이룰지 미처 몰랐는데 성인이 되어서도 술을 함께 마실 생각을 못 했다가 드디어 어제 만두에 제주 생막걸리를 곁들이고서야 그날 어른들의 감탄사를 떠올리고 말았다.

엄마의 만두는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후에도 그렇게 묵묵히  세월을 이겨냈다.

이제는 나이가 지긋해진 엄마의 만두는 예전과 같은 맛을 내지는 못한다.

엄마도 내심 예전 만두의 맛을 내지 못하는 게 불만족스러우신 듯했다.

그래도 난 좋더라.

음식은 추억이니까 말이다.

사촌 형이 인스타그램에 올려둔 엄마의 만두 사진을 보더니 한 마디 글을 남겼다.


너의 큰고모님은 연로하셔서 만두 못 만드셔ㅠ


마지막 눈물의 이모티콘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머지않아 엄마의 만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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