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겨울, 설악산 조난사고

장편소설을 준비하며

by 루파고

23년이나 된 옛 일이 기억난 건 왤까?

하필이면 폭우로 전국에 물난리가 난 이 시점에 말이다.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그리 오래된 일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해 겨울은 그 기억이 가볍게 느껴질 만큼 끔찍했다.

나중에 탈고 후 이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더듬어 소설을 쓰려했던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젠 가깝게 지내던 산쟁이들 중 대부분 나와 다른 세상에 살게 됐고, 시신이라도 건져 오겠다며 달려들었던 악우들과 숨바꼭질을 하려는지 아직까지 꽁꽁 얼어붙어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산쟁이들도 몇 남아있다. 이젠 나와 통신이 되는 산쟁이라 봐야 기껏 두 명이 전부다. 물론 그들 모두 산신령과는 절교하다시피 했지만 가끔 술이라도 들어가면 케케묵은 지난 산 이야기를 슬며시 꺼내 술안주를 삼았다. 그러다 보면 너무 깊이 박혀 있던 자잘한 에피소드가 튀어나오기도 했는데 때론 허리가 휘게 웃게도 하고 누가 볼세라 닭똥 같은 눈물 한 방울을 몰래 훔쳐내기도 했다. 어떤 때는 까마득히 잊었던 여자 문제를 들고 나와 짧은 주먹다짐을 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1997년 겨울이었다. 매년 겨울이면 나 역시 뭇 산쟁이들이 그러하듯 설악산으로 동계등반을 다녔다. 그 해 겨울에도 15일 일정을 계획했던 나는 당연한 듯이 설악산으로 기어 들어가고 말았다.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친구들의 걱정 섞인 욕설도 듣지 않았고, 가족들의 반쯤 포기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흰색을 제외하면 거죽만 남은 나무와 파란 하늘만 보이는 설산뿐이었다. 우리 네 명을 제외하면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구 하나 밟고 지나간 적 없는 눈이 주위를 덮었다. 눈이 너무 깊어 발자국 같은 건 있을 수도 없다. 앞으로 간다고는 하지만 가슴까지 푹푹 빠지는 눈 속을 헤집고 한 발자국 정도 나아가는 데만 해도 몇 분은 걸렸다. 한 걸음이라고는 하지만 걸음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멀리서 멧돼지 비명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이미 한참 전부터 들렸지만 그게 멧돼지 소리라고 판단하기까지는 한 시간 넘게 걸렸다. 그것이 비명소리라고 결정을 낸 이유는 내 가슴속에서 울려 퍼졌던 소리가 그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점점 멀어져 가는 걸 알 수 있었다. 멧돼지의 비명소리는 점차 작아지고 있었고 어둠은 점점 깊어졌다. 하늘만 뚫린 깊은 계곡 사이에서 우린 그렇게 밤을 맞아야만 했다. 불과 백여 미터 앞에 놓인 너른 바위 하나가 우리의 목적지였다. 지금까지의 속도로 봐서는 거기까지 가는 데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바닥은 깊은 늪처럼 우리를 쭉쭉 빨아들이고 있었다. 가슴까지 빠지던 눈이 이제는 목까지 빠지기도 했다. 배낭으로 꾹꾹 눌러 한 걸음,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옮겨 너른 바위에 손이 닿기까지 예상했던 두 시간이 꼬박 걸리고 말았다. 그제야 하늘에 달이 있고 별이 있고 은하수가 있고 빛이 있고 어둠이 있고 새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늘게나마 멧돼지의 비명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소설을 또 시작해야 하나... 걱정이다.

요즘 정말 바쁜데...

이놈의 염병할 글쓰기는 나를 놓아주질 않는구나.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리게, 아주 게으름 피우며 쓰겠노라고 나 스스로 타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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