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배나무집 셋째 딸 Vol.13
일요일 오전 9시 30분경, 약속 장소엔 지유 혼자였다. 주말이라지만 집에 있어봐야 딱히 할 일도 없기에 그나마 이런 일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최근 같은 과 남학생들의 데이트 신청이 쇄도했지만 지유는 누구의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내기 위함이었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길을 오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산을 챙겨 들고 있었다. 잠시 후 거리에는 우산 장수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시로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비가 쏟아질 때를 기다리는 듯했다. 멀리서 김선명이 짧은 머리의 뒤통수를 긁으며 다가왔다. 지유가 알아본 것은 인지한 것이다.
“미안합니다! 오늘도 지유씨보다 늦었습니다.”
“아니에요. 아직 약속 시간이 되려면 많이 남았어요.”
“혹시 초원다방 가보셨나요?”
“들어보긴 했어요. 얼마 전엔 쎄시봉에도 가봤는 걸요.”
“거기에 가보셨군요.”
김선명은 근처의 초원다방에 가려고 계획을 잡았는데 걱정이었다. 지유는 그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쎄시봉에는 친구 때문에 잠깐 들렀던 거예요.”
“잘됐습니다! 식사 안 하셨죠? 잠깐 걸으면서 이야기 좀 해요. 그러다 배고프면 맛있는 식당에 들어가서 요기 좀 하고 초원다방으로 가시죠.”
지유는 데이트 코스를 미리 안내하는 그에게서 벌써 따분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름 잘생기고 훤칠한 외모지만 연애에는 깜깜해 보였다.
지유는 입맛을 다시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신비감이 느껴지지 않는 데이트 코스가 벌써 지루했지만 덕수궁 돌담길은 궁금했다. 남자 친구와 걸었다던 지혜 언니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김선명과 걷게 될 줄은 몰랐다. 남자 친구 없이 걷기는 싫었던 곳이지만 그와 함께라는 사실도 딱히 달갑지는 않았다.
흐린 하늘은 끝내 비를 뿌리지 않았다. 도시는 으스스할 정도로 어둡기만 했다. 아름다울 거라고 상상했던 덕수궁 돌담길의 낭만은 산산조각 나고 없었다.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지유씨! 일 빼기 일은 뭔지 아세요? 이 빼기 이는요? 팔 빼기 팔은요?”
한참 말이 없던 김선명이 입을 열었다. 고민의 흔적이 목소리에서 묻어났다. 이미 다 지나간 진부한 말장난이었다. 하지만 지유는 그의 정성을 봐서 가볍게 웃어주었다. 그러는 편이 서로가 편할 것 같아서였다. 예상했던 대로 초반부터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지유는 듣다 못해 그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드디어 김선명의 말문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가 이 날을 위해 얼마나 연습을 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력만큼은 충분히 높은 점수를 줄 만했다.
그의 고향은 충청북도 청주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바다를 동경해서 해군 사관학교를 지원했고 지금은 인천 기지로 전근 와서 근무 중이다. 지유의 예상대로 그는 지난해 지유를 찾아왔었다고 했다. 김선명은 군부대에서의 에피소드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다지 재미도 없고 따분했지만 지유는 무심코 들어주었다. 가끔 재미있는 상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도 있긴 했다. 웃음이 터져 나오자 김선명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돌담길 끝이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초원다방에서 그는 고리타분함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자체가 모범생으로 살아왔을 그의 생애가 그대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지유는 최신 유행하는 음악들을 신청하고 사연을 썼다.
<파란 바다를 누비는 해군 아저씨와 함께 왔어요. 제 머릿속까지 파랗게 물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부탁해요>
지유의 신청곡 메시지를 잃은 DJ가 지유에게 윙크를 날렸다.
“우리 초원에 보기 드문 미인이 오셨네요. 군인 아저씨가 복이 터졌습니다. 해군 아저씨에게 경례! 신청곡 제목을 보니 곧 실직하실 것 같네요. 신청곡은 조미미씨의 바다가 육지라면 보내 드리겠습니다.”
DJ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초원다방은 웃음바다로 변해 버렸다. 김선명이 고개를 떨구었다. 데이트는 거기까지였다.
그날 이야기를 듣던 지혜는 너무 순진하고 귀엽다며 김선명을 소개해 달라는 농담까지 던졌다.
“언니 가져! 다음 데이트도 대신 나가면 되겠네.”
지유가 빽 소리지르자 지혜는 농담이라며 거듭 사양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