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녹화방송 두 건, 라디오 생방송 한 건, 기자 미팅 한 건, 광고 계약 미팅 한 건. 이별하는 새벽부터 저녁 10시까지 온종일 장소를 옮겨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말 그대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몇 달만 고생하자는 간곡한 부탁이 있었지만 이런 유명인의 위치에 회의가 밀려들기도 했다. 그녀가 그려왔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다. 현실과 로망의 괴리는 너무 컸다. 물론 오랜 기간 꿈에도 그리던 가수가 되어 행복감에 젖어있었을 때도 있었고 뜻하지 않은 성과에 희열도 있었지만 그런 걸로는 채울 수 없는 부족한 뭔가 있었다. 며칠 쉬다 나왔으니 일반 직장인들의 월요병 같은 게 생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달 전 휴가를 다녀왔을 때에도 이런 느낌은 없었다. 예전과 비교하면 노래하는 시간보다 촬영, 인터뷰, 계약, 미팅 등 가수와는 상관없는 업무가 더 많아져서 그럴지도 모른다.
'외로운 걸까?'
이별하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답답한 것 같은데 답답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최애 하는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건 그 무엇도 아닌 소파라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소파 대신 자신을 안아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를 소파 뒤로 뉘이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숨을 골랐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렸다. 마치 아기 숨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갈게! 오늘 고생 많았어. 사장님은 오늘도 술자리라시네. 오늘 선물 너무 많이 왔어. 이거 다 열어보려면 힘들겠다. 필요하면 도와줄 용의는 있으니까 전화해."
현관을 나서던 박진수였다.
"오빠도 고생했어요. 언니 줄 만한 거 있으면 드릴게요. 그리고 제발 사장님 호칭 말고 대표님으로 바꾸면 안 되냐고 물어봐 주세요. 촌스럽게 요즘에 아직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회사가 어디 있어요?"
"모르지 뭐, 세상에 이유 없는 결과는 없는 거니까 사장님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아무튼 일찍 자. 내일도 바쁠 텐데."
"아 참! 내일은 노래하는 스케줄 없어요?"
"없는데. 그건 왜?"
"요즘 노래가 하고 싶은데 가수한테 노래하라는 스케줄은 없고... 대체 내가 가수가 맞긴 한 건지 자괴감이 들 지경이거든요. 무대가 그리워요."
"음... 그렇기도 하겠다. 너처럼 노래 좋아하는 가수가 또 있을까 몰라. 사장님한테 직접 말해보지 그래? 니 말이면 깜빡 죽는 사람인데."
"이미 말했죠. 하지만 신곡이나 준비하라더라고요. 요즘 딱히 시상도 안 떠오르고 해서 은근히 스트레스인데."
"그래? 힘들면 좋은 노래 구해달라고 하면 어때? 이젠 꼭 니가 직접 만들 필요까진 없잖아. 좋은 작곡가들 많은데."
박진수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조금 떨어져 있었다. 이별하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선배 가수들의 노래를 다시 부른 것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다른 사람이 만든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다. 철저하게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창작의 고통을 느끼던 중이었다. 뭔가 새로움이 없다면 더 이상은 꺼내 쓸 수 있는 생각이 비워지고 없을 것 같았다. 박진수가 떠난 후 다시 눈을 감고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세상의 어떤 잡음도 사라지고 없는 무제한의 공간 속에서 오롯이 자신의 숨소리만이 생명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오십 평이 넘는 큰 집에 방도 네 개나 있고 안에서 자전거를 타도 될 정도로 넓은 거실엔 몇 개 되지 않는 가구만 덩그러니 놓였다. 그 공간엔 단일 생명체가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었다.
'고양이라도 키워 볼까?'
이별하는 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집안 가득 동물 털이 날리는 걸 인내할 용기는 없었다. 다시 자신의 숨소리에 집중하며 깊은 생각으로 자신을 몰아갔다. 그런데 생각 어디쯤엔가 묘한 미소를 머금은 남자의 얼굴이 슬며시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어제 만났던 백인찬이었다. 남자답고 든든해 보이는 그 사람이라면 어떨까 싶었다.
'한번 사귀어보면...'
그런데 백인찬을 누르고 나타난 조준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지나온 세월 동안 스쳤던 인연들이 영화 필름처럼 돌아 나왔다. 기억 속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에게 뜻 모를 미소를 보내던 남자도 있었다. 이별하는 문득 준흠의 선물을 기억해 내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식탁 위에 대충 던져둔 핸드백을 열었다. 낮엔 너무 바빠 읽을 생각도 못하고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그 안엔 대체 어떤 내용이 들었을지 궁금했다.
'사랑고백 같은 걸까?'
이별하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표지를 열었다. 노트의 간지에는 시가 하나 적혀 있었다. 처음 보는 시였다.
<가을빛 사랑>
그대와 나의 사랑은 가을빛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가을빛처럼
우리 사랑의 꽃은
길가에 핀 코스모스 꽃이어라
가을의 사랑은 지고지순한
오색빛 빛깔로
그대와 두 손 부여잡고
가을에 머물고 싶습니다
들꽃처럼 은은함으로
그대 곁에 사랑의 빛깔로
이 가을에 머무르고 싶습니다
울긋불긋 화려한 낙엽처럼
오색 빛깔로
그대와 불타오르는 가을에
안겨 멋진 사랑이고 싶습니다
찬 이슬 내려도
따스함으로
그대와 나를 지켜주는
가을빛 사랑이면 좋겠어요
바람이 불고 맑은 하늘이
사랑을 노래하면
오색 빛깔 찬란한
그대와 사랑하고
그대와 나의 사랑은
가을빛 사랑이어라
그대를 아름답게 내 인생에
끝까지 사랑하렵니다
아름다운 가을빛 사랑으로
당신 이름을 부르며
가을을 불러 보렵니다
가을빛 내 사랑
- 무림
맨 하단엔 '무림'이라는 작자가 표기되어 있었다. 시를 좋아하는 이별하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시인이었다. 그보다 시에서 느껴지는 사랑은 마치 준흠이 자신을 향한 마음을 그려낸 것만 같았다. 이별하는 무림이라는 시인이 준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코스모스 때문이었다. 그녀가 코스모스를 좋아한다는 걸 준흠도 알고 있었고 언젠가 코스모스가 가득한 양수리의 한적한 공원에 자신을 데려다준 적도 있었다. 이별하는 준흠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어쩌면 준흠이 자신을 떠난 건 스스로 견디지 못해서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만가지 감정이 함께 밀려들기 시작했다.이 년 전 딱 오늘 같은 기분에 한참을 헤맸던 적이 있었다. 그땐 세상의 끝에 선 듯한 고독함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처음으로 이성에 간절함을 느꼈지만 가수라는 직업 아닌 직업 때문에 그것 또한 참아내야만 했다. 그놈의 약속이 뭐라고. '띵!' 이런저런 고민에 혼란스러운 중에 카톡 메시지가 들어왔다. 한세아였다.
세띵 : 자냐?
별뚱 : 아니!
세띵 : 그 남자 어때?
별뚱 : ??
세띵 : 남자사람선물 말야.
별뚱 : 괜찮아 보여. 근데 왜?
세띵 : 그 선물 나 주면 안 될까?
별뚱 : ...
한세아는 선뜻 뭐라고 답변을 써야 할지 몰랐다. 점 세 개 달랑 찍었다가 도로 지우기를 반복하던 중 한세아의 메시지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