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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Dec 23. 2019

2020년을 앞두고 IT를 더듬다

이제 며칠 후면 2020년이다.

어릴 때 보았던 애니메이션이나 SF영화들 중 2020년을 기점으로 둔 것들이 많았다.

삼십 년 전과 비교하면 세상은 정말 많이 변하긴 했다.

거의 현실을 목전에 둔 자가용 드론이나 홀로그램 그래픽도 그렇지만 전화를 들고 다니고, 아무 데서나 동영상을 볼 수 있고, 시속 300km가 넘는 고속철도가 다니고, 곧 우주여행이 가능한 세상이 왔다.





세상에 처음 삐삐라는 개인 호출기가 등장했던 게 기껏 30년이다.

당시에는 공중전화가 참 많았던 기억이 난다.

공중전화를 오래 쓴다 하여 살인사건이 나기도 했으니 지금으로서는 원시시대 같은 기분도 든다.

나중엔 공중전화 박스 근처에서 발신만 가능하던 CITY폰 서비스와 전용 전화기도 출시됐는데 시대적인 착오였던지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 저장매체로 디스켓이라는 게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5.25인치 1D 디스켓에는 180KByte를 담을 수 있었다.

1MByte가 1,000KByte니까 어느 정도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1D와 2D는 한 면을 쓰느냐 두 면을 쓰느냐의 차이인데 드라이브의 헤드가 두 면을 읽고 쓰는 장치가 나온 것도 그 후 이야기다.

나중에 2DD도 나오고 2HD가 나왔는데 2HD는 1.2MByte나 담을 수 있었다.

팔랑팔랑한 5.25인치에서 좀 더 딱딱한 3.5인치 디스켓이 나온 건 한참 후다.

그 후 메가바이트(MegaByte)급 저장능력을 가진 다양한 마그네틱 저장장치가 개발되었지만 대부분 실패작으로 돌아갔다.

당시 마그네틱 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은 죄다 디스켓을 판매했다.

국산 SKC의 제품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지금은 512G USB메모리도 몇 만원이면 구입할 수 있지만 디스켓은 완전 혁신이었다.

512GByte 는 512,000MByte니까 2HD 플로피드스크 약 5억 장의 용량인 것이다.

하드디스크는 소프트웨어의 용량이 방대해져 2HD 디스켓 열 장 수준이 넘어설 무렵 보급되기 시작한 것 같다.

(지인의 기억에 따르면 본인이 처음 접했던 컴퓨터가 하드디스크 20MBytes에 메모리 1MBytes였다고 한다.)

이제는 별 의미없는 소리 같지만 당시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개발속도를 두고 무엇이 더 빠른지 갑론을박 하던 시절이었다.




MSX 기종에서는 테이프 레코더를 사용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만든 MSX 기종은 애플과는 달리 게임팩을 사용할 수 있는 좀 다른 분야의 컴퓨터였는데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MSX기종은 당시 오락실에 있던 게임을 집에서 즐길 수 있었는데 테이프레코더로 나온 게임을 한번 하려면 30분 정도 로딩해야 했다.

도중에 인식오류라도 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시스템이 불안해서 잦은 오류를 일으켰는데 역시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슬롯형으로 꽂는 게임팩이 나오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마계촌 같은 게임도 집에서 할 수 있게 됐고 흔히 알고있는 슈퍼패밀리 같은 가정용 게임기도 사실 MSX컴퓨터가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슈퍼패밀리라는 게임기는 원래 소니의 메가드라이브라는 게임기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던 사실이 있다.

당시 가정용 컴퓨터는 3가지로 나뉘었다고 볼 수 있다.

본 적은 없지만 아타리 같은 컴퓨터도 있다고 들었는데 대체로 APPLE, IBM, MSX가 아니었나 싶다.

MSX는 제일 먼저 사라져 게임기로 장착했고 APPLE은 매킨토시가 되어 DTP 분야 전문 PC로 노선이 바뀌었다.

미국에서야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IBM 호환기종이 주축을 이루었다.

일본은 APPLE이 주력이었다고 들었다.





IBM 호환기종이 주축을 이룬 데는 말 그대로 호환성이 좋어서였을 것이다.

조립이 가능한 컴퓨터는 완제품으로만 나오는 고가의 애플 컴퓨터에 비해 구매진입장벽이 낮았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쉽게 사용하고 있지만 1990년만 해도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인디텔 등을 통해서만 접속이 가능했다.

ATDT01410과 ATDT01411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삐삐삐삐삐삐삐~ 치이이이~

이걸 리드미컬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집도 통신비가 한 달에 십만 원씩 나왔는데 툭하면 끊기는 탓에 다시 전화를 걸어야 했고 그러다 보면 통신요금은 어마어마했다.

오죽하면 전화국에서 통신전용 모듈 장비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도 통신요금이 나오는 날이면 매 맞는 게 일이었다.

당시 학교에 컴퓨터 있는 집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는데 대개 그런 집들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곡소리가 났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1987년 당시 대졸 초임은 50만 원 수준이었다.

대개는 IT 정보통신 분야에서 한 획을 긋던 사람들이었다.

마침 머릿속에서 호롱불이라는 툴이 지나간다.




불편했던 DOS라는 OS를 편하게 사용하게 만든 비주얼 툴인 MDIR(M-directory)도 기억난다.

C://DOS/CD ***

이런 것만 봐도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따지고 보면 윈도우의 베이스는 DOS에서 굴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초반의 윈도우만 해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COBOL, FORTRAN, ALGOL, PL-1, 어셈블리어, 기계어 등 각종 언어를 섭렵하고 C언어와 BASIC을 배웠고 엑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LOTUS123(지금은 LOCUS 인지 LOTUS인지 기억도 가물거린다)도 기억난다.

(또 지인의 기억에 따르면 QuatroPro가 스프레드시트의 종결자였다고 한다. 나는 이름만 들어봤지 본 적도 써본 적도 없다.)

그 후 어설픈 GUI(Graphic User Interface)시대가 개막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전성시대를 맞이한다.

초기 윈도우는 DOS로 OS를 부팅 후 WINDOWS를 다시 부팅해서 쓰는 방식이었다.

Microsoft는 Word, Excel, Access 등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며 세상의 발전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컴마을 등의 컴퓨터 잡지가 주력이었는데 지금도 명을 유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정용 컴퓨터가 비싸던 시절 대우에서는 '르모'라는 모델의 올인원 전자타자기를 판매했었는데 한 달 급여를 모아도 살 수 없는 가격이었다.




당시 컴퓨터는 요즘에는 마이크로마우스에도 사용하지 않는 원시적 CPU인 인텔 8086, 8088 칩을 사용했다.

오죽 프로세서의 성능이 부족하면 연산을 보조하는 코프로세서(co-processor)라는 것이 다 있었다.

8087 칩이었다.

그게 달린 컴퓨터는 조금 더 비싼 가격에 팔렸다.

나는 나중에 마이크로마우스를 만들면서 8088 CPU를 사용했었는데 당시 로봇기술이 어느정도 수준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밖에 안 나온다.

오죽하면 당시 세대를 286세대니 386세대니 하는 표현을 했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8088세대는 거론된 적이 없다.

486세대를 끝으로 X세대, 밀레니엄세대 같은 다른 부류로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마우스라는 입력장치는 그즈음에 출시된 것 같다.

지금은 구경할 수도 없는 볼마우스다.

요즘은 광마우스를 주로 사용하는데 당시에는 무선 마우스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노트북은 당시 돈으로 무려 천만 원을 오르내리는 수준이었다.




프린터는 대개 80 칼럼과 136 칼럼짜리 도트 프린터가 판매됐었는데 가격도 어마어마하여 가정에서 소유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컬러 프린터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사식 라벨프린터가 보급되지 않아 먹지를 대고 영수처리를 해야하는 물류업 등에서는 도트프린터를 써야만 했다.

그래서 때 아닌 호사로운 몸값을 누리던 도트프린터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지금도 어디선가 드르르륵 하는 귀 따가운 소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애드립이라는 음원 카드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에서는 삑삑 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구현하지 못했다.

컴퓨터에서 한글을 구사하는 건 불가능한 거라고 생각하던 시절 한글 하드웨어 칩을 슬롯에 꽂아 모니터에서 한글을 쓸 수 있었다.

조합형과 완성형이라는 개념도 그때 생겨났다.

복잡하니까 한글 중 조합해내지 못하는 글자들에 대한 가짓수 문제라는 정도로만 설명해 두자.

그런데 문제는 보급의 한계에 있었다.

나중엔 한글 DOS라는 게 출시됐고 소프트웨어적 지원으로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함글과컴퓨터의 한글 1.0이 용산에서 판매됐다. 삼성에서는 훈민정음이라는 GUI방식의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했는데 사실상 이게 보급됐어야 맞다.

애플의 DTP용 워드프로세서인 Quark에 대적할 만한 베이스였다고 생각한다.

언제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펜마우스라는 것도 나와서 눈이 휘둥그레해진 적이 있다.

아마 지금은 삼성이 절대지분을 가지고 있는  WACOM의 태블릿이 아닌가 싶다.


바이러스라는 게 처음 발견된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월간지에 안철수 박사의 바이러스 백신에 관한 소스를 공개하기도 했었는데 본 파일과 감염 파일을 16진수로 푼 HEX코드 두 개를 비교하여 바이러스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사람 고치는 의사가 컴퓨터 바이러스를 고친다는 것도 이슈가 됐었던 기억이 난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그 당시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트로이목마라는 바이러스 방식도 당시 나온 말이다.

요즘 바이러스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지만 소프트웨어 자체도 수준이 그런 차이였으니 모순이라는 단어처럼 서로 발전되어 온 거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당시 좀 더 발전된 허큘리스 카드라는 그래픽 카드를 사용했고 모니터는 그린 혹은 B/W(블랙/화이트) 모니터였고 아마 10인치도 안 됐을 것이다.

요즘은 볼 수 없는 브라운관 모니터다.

CGA, EGA, VGA 순으로 좀 더 다양한 색상을 표현하는 그래픽 기술이 개발되고 VGA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니터만 200만 원 가까이하는 상황이라 보급은 더디기만 했다.

당시 대기업 대졸 초봉이 100만 원이 채 안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가격이었다.

당시 자기테이프의 시대는 저물어 CD가 주력이 되었고 레이저디스크, 베타비디오는 세상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디지털카메라가 세상에 나오기 전 이야기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그래픽 소프트웨어는 닥터할로다.

지금껏 이름을 기억하는 게 용하다.

벡터 기반의 소프트웨어였는데 완벽한 2차원적 그래픽인데 당시 그림을 그리던 내게 있어 엄청나게 획기적인 솔루션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텍스트로 하여 출력한 그림들이 꽤나 유행했었다.




199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잉크젯 프린터가 보급됐고 비싸긴 하지만 가정용 레이저 프린터도 출시됐다.

잉크젯도 표준이 없어 잉크젯, 버블젯 등 제조사마다 나름의 특허로 네이밍된 제품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초반에는 프린터 기계 자체가 비쌌지만 제조사들이 마케팅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프린터를 싸게 팔고 잉크를 비싸게 파는 것이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뻔한 결과를 예상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것도 잠시 다 쓴 잉크카트리지를 재활용한 재생잉크 사업에 불이 붙었다.

레이저 프린터도 재생토너 제품도 유통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무한리필 잉크카트리지도 나왔는데 최근에는 제조사에서 정품 무한리필 제품도 출시했다.

1993년도 레이저 프린터의 소비자가격이 240만 원 정도 했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나도 여처저차하여 레이저 프린터를 한 대 구입하게 됐었는데 학교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잉크젯 프린터도 귀한 시절에 레이저 프린터를 소유한 상황이라 리포트를 제출하면 출력물 품질 자체가 달랐다.

학교 앞 어지간한 복사기보다 깔끔한 품질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삐삐를 사용하던 시절이지만 모토롤라에서 T1이라는 아령만큼 무거운 휴대전화가 출시됐고 카폰이라는 것도 나왔다.




당시 국내에는 주윤발 같은 배우들이 인기 있었는데 홍콩영화의 전성기가 아니었다 싶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사랑해요. 밀키스!'이라는 CF 멘트다.

홍콩영화에서 T1을 들고 통화를 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졌던지 돈 깨나 있고 멋 좀 부린다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걸 구입해 들고 다녔다.

요즘 나오는 최신 제품에도 없는 운동기능을 가진 최첨단 IT기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필름을 현상하여 드럼스캐너로 디지털화하던 시대를 넘어, 전문 스튜디오에서 아날로그 촬영물을 디지털화하는 신기술을 사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디만 1400만 원에 육박하는 니콘 D1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DSLR의 시대가 왔고 S1PRO 등 다양한 DSLR과 요즘 흔히 말하는 똑딱이 디카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게 기껏해야 1990년대 말경부터다.

인터넷 전성시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IMF 구제금융으로 힘들던 시절은 PC방과 인터넷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덕을 본 게 바로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가 아닐까 싶다.

맞는지 모르겠지만 동서소프트에서 스타크래프트 한국 판권을 사온 걸로 기억한다.

스타크래프트 하나로 일약 대박을 쳤다고 봐도 된다.

블리자는 워크래프트, 디아블로 등의 게임도 출시했는데 모두 대박 행진이었다.

전 국민의 30퍼센트 이상은 스타크래프트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프로게이머라는 말도 그때 생겨났다.

몇몇 기업들은 프로게이머를 육성했고 오죽하면 게임을 잘해서 대학에 진학하는 기회도 주어졌다.

10~40대 남자들 중 상당수가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즐겼고 인터넷에서 세계인을 만날 수 있는 배틀넷에서 한국인이 순위를 모두 장악하던 시기였다.

모르긴 해도 대한민국이 IT강국이 된 건 스타크래프트와 PC방이 한 몫 했을 거라고 본다.





2000면 앞두고 밀레니엄 시대가 온다며 자릿수 버그 문제로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둥 밀레니엄 버그로 전 세계가 들썩거렸는데 상당히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런 날들도 2000년 1월 1일 00시 00분 01초가 되자 역시 헛소리라며 세상은 잠잠해졌다.

반면 세상은 밀레니엄 축제가 시작됐다.

숫자의 놀음인가?

전 세계 대다수의 기업들은 밀레니엄이라는 단어를 표준어처럼 달았으며 별별 말도 안 되는 이벤트에 다 갖다 붙였다.

세상의 발전 속도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변하기 시했다.

엔젤투자의 극성수기였던 것 같다.

당시 IT기업에 투자하지 않으면 바보라는 소리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IT버블이라는 표현처럼 거품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MP3가 출시되지 전 세계 CD 사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음반회사들도 휘청거렸고 저작권에 대한 법이 강화되었다.


그러다 가장 강력한 쇼킹한 사건이 벌어졌다.

애플에서 iPOD이 출시된 것이다.

나는 해외출장 때 노트북을 가지고 나가지 않아서 낭패였던 상황에 iPOD 덕을 톡톡히 봤다.

호텔에 설치된 PC에는 한글을 쓸 수 없어서 난감했었다.

고민 끝에 iPOD을 떠올렸고 와이파이로 인터넷을 끌어 이메일 업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좀 더 쇼킹한 물건이 세상에 나타났다.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이 나타난 것이다.

생긴 건 iPOD인데 전화 기능이 탑재된 iPHONE이다.

국내 제품 중에는 아이리버가 선두를 달리고 있었는데 아이팟의 등장과 아이폰 그리고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존재감이 없어졌다.

그리고 세상은 지금까지 왔다.







스마트폰은 말 그대로 너무 스마트해졌다.

스마트폰 하나면 못할 게 아무 것도 없다.

어딜 가도 사람들은 스마트폰만 쳐다보는 세상이 됐다.

아마 앞 사람이 죽어도 모를 거다.


이제는 액정이 접히기까지 하고 조만간 홀로그램 화면이 나온다는 소문도 들려오는 것을 보면 아직 한참 더 살아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우주여행 정도는 다녀와 봐야 하지 않겠나 싶은 것이다.

쓸 건 너무 많은데 스마트폰으로 두드리려니 너무 힘들다.

이런 글도 스마트폰 하나면 쓸 수 있는 이런 세상이 온 거다.

세상이 디지털이라는 단어를 접한 건 기껏 30년이다.

실생활에 접목되어 누구나 쉽게 접하고 살게 된 건 기껏 10년이다.

아프리카나 동남아 지역의 후진국의 경우 PC의 보급 단계를 건너뛰고 곧장 스마트폰의 시대를 만났다.

심지어는 포털사이트 조차 없는 국가도 허다하다.

왜 만들지 않느냐 물었더니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온라인 쇼핑몰도 만들지 않는 경우도 많다.

왜 그러냐 했더니 페이스북으로 거래하면 되는데 무엇이 필요하냐고 한다.

우리는 여러 과도기를 거쳐왔지만 그들은 그런 것 없이 지금에 왔다.

과연 그런 시절이 필요했을까?


세상의 발전 속도는 교통, 통신속도에 비례한다.
물류와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정보교환, 판단의 속도가
세상의 속도를 좌우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스마트기기를 접한 세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이기들이겠지만 지금에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의 과정이 있었는지 그들은 모를 것이다.

어제 이세돌과 네이버 AI인 한돌과의 대국에서 이세돌이 2:1로 졌다.

물론 더 뛰어난 천재가 있겠지만 어쨌든 인간의 뇌는 컴퓨터에 대적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스카이넷이 세상에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을 할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몇 가지 웃기지도 않는 예를 들어본다.

1990년대 가산전자라는 기업이 있었다.

당시 안경을 쓰면 화면이 3차원으로 보였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3차원 영상의 원천기술이 그 기업에 있었지만 지금 누구도 그런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이얼패드라는 인터넷 무료 통신업체도 있었다.

스카이프 같은 기업의 원천기술이다.

그런 기업들이 빛을 보지 못한 건 시기적 문제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다양한 무언가가 있었으리라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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