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몰고 온 도시의 빛은 자연의 빛을 눌렀다. 도로 한쪽의 가로등이 먼저 켜졌으니 곧 반대쪽 가로등도 어둠을 밝힐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드문드문 조명이 켜진 한강변의 아파트의 불 꺼진 창가엔 알몸의 여인이 도시의 어둠과 한 몸이 되려는 듯 몸을 꼬으고 있었다. 그녀의 온몸을 더듬는 희미한 손길은 조금씩 깊이를 더했고 여자는 골반을 조금씩 틀어 어둠의 손길을 받아주었다. 손길은 조금씩 조금씩 은밀하고 농후했고 여자는 이내 몸을 돌려 창에서 멀어져 갔다.
<詩를 낳다 가끔은>
한 올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 타투를 새길까 아니면 현란한 보디페인팅은 어떤가 치부는 가려야겠지? 어떤 옷을 입힐까 어떤 모양으로 그릴까 어떤 색을 칠할까 아둔한 머리를 쥐어짠다 입혔다 벗기고 벗겼다 입히고 그렸다 지우고 칠한데 덧칠도 해보고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새롭게 태어나는 고심의 산물이나 고뇌의 선물일지 모른다 됐어 이 정도면! 몇 시간을, 때론 밤을 새워 치근대야 올까 말까 하다가 아주 힘겹게 대중 앞에 몸을 드러낸다 피곤한 눈 껌뻑거리며 위로를 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래도 남는 아쉬움은 다음을 위해 필요한 또 하나의 시어로 고이 잉태한다
시는 정말 어렵다. 게다가 리듬에 가사를 입히는 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이별하는 머리를 흔들며 몸을 배배 꼬았다. 라이딩 때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간신히 머리에 담았고 자전거가 멈추어 섰을 때 재빨리 메모에 옮겼지만 당시의 감성은 그대로 옮겨지지 않았다. 좋은 시상이었던 것은 존재함에서 원래 없던 존재로 슬그머니 흩어지고 말았다. 대신 한세아가 그렇게 탐이 난다는 이별하 자신의 몸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몸을 탐닉하는 습관을 가진 한세였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그런 습성을 알지 못했다.
사실 이별하와 한세아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같은 학교에 다녔다. 한세아의 가족이 이별하의 옆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바로 옆집에 살다 보니 빠른 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고 그녀들의 가족은 원래 친척이었던 것처럼 붙어살다시피 했다. 그녀들의 학창 시절은 그렇게 친자매 같은 사이였고 그런 그들의 사이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중학교는 다른 곳으로 가게 됐지만 옆집에 살았기 때문에 그녀들의 우정은 멀어지지 않았다. 나이로 따지자면 한세아가 이별하보다 한 살 많았지만 두 사람이 만나기 일 년 전에 한세아는 학교를 일 년 쉬어야만 하는 사고가 있었다. 동네에서는 여러 소문이 있었지만 누구도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항상 날씬했던 한세아와는 달리 비만이 심했던 이별하는 친구도 별로 없었고 뚱보라고 놀림을 당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한세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별하의 있는 그대로 영혼의 교감을 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별하는 오승희가 소개한 남자사람선물을 떠올렸다. 모처럼 괜찮은 남자를 만났지만 소속사 대표인 김호현이 간곡하게 부탁하던 모습을 떠올리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엄포에 가까운 설명이었다. 이별하 역시 그의 뜻을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준 장본인이었다. 얼마나 힘든 과정이었는지는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지만 이별하의 고통에 준할 정도로 김호현의 노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너에게 남자 문제로 스캔들이 생긴다면 우리 계약은 끝이야!"
지금 상황이라면 다른 소속사로 옮긴다 한들 상황이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이 함께 걸어온 십 년 가까운 시간은 친분 관계를 넘은 지 오래였다. 이별하는 한세아의 눈빛에서 남자사람선물에 호감을 읽을 수 있었다. 한세아가 남자에 관심을 가진 건 처음이었다. 이별하의 사춘기는 누구보다 힘들었다. 한세아가 이사를 올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좀 더 심한 과정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한세아는 남자를 기피했다. 다행히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사람밖에 없었다. 실재하는 바비인형이나 다름없는 한세아를 향한 남학생들의 시선을 이별하는 정확히 기억했다. 어릴 땐 몰랐지만 그 시선들 속엔 다양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이를 불문하고 남자들은 한세아와 마주치고 얼어붙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뚱뚱해서 놀림이나 받으면 받았지 남자들의 시선 같은 건 느껴본 적 없던 이별하는 그런 시선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남자들의 시선에도 한세아는 얼음같이 차가웠다. 한세아의 팔은 언제나 이별하의 팔에 꼭 끼어 있었다. 남자들의 시선을 받는 것도 익숙해지자 이별하에겐 묘한 능력이 생겼다. 남자들의 시선에서 다양한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눈동자의 움직임, 눈빛, 눈초리에서 보이는 심리적 해석이 가능했고 심지어는 그와 함께 변하는 몸짓, 걸음 등에서 성향마저 읽을 수 있었다. 남자사람선물은 절대 알 수 없었다. 이별하는 난생처음 순수함을 가득 담은 시선을 느낄 수 있었고 한세아의 눈빛에선 사랑의 씨앗이 싹튼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 남자사람친구의 눈빛은 자신을 향한 순수함을 쏘아대고 있었다.
"백인찬입니다. 승희 누나가 소개해줄 사람이 있다고 해서 기대 같은 건 안 했었는데 꿈에라도 한번 만나보길 원했던 분을 이렇게 만났다니 꿈이라고 해도 감사할 일이네요."
백인찬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으며 바른 제스처에 따스한 눈빛은 주변의 존재를 모두 지워버리고 있었다. 이별하의 눈에 마스크를 벗어버린 환한 미소를 머금은 뽀얀 볼살이 미세하게 바르르 떠는 게 보였다. 만남 자체만으로 감격했다는 것을 그의 설명이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내일이면 다시 일상이다. 이별하는 어둠 속에서 침대 위 홑이불을 더듬었다. 발가락에서부터 느껴지는 보드라움이 다리 위를 쓸어 올리며 아랫배를 스쳐 타고 올라오며 배꼽 부위의 솜털 위로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다. 가슴 아래를 거친 손길은 끄트머리 위를 간신히 넘어 가늘고 긴 목을 탄 후 드디어 멈추고 말았다.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뒤척이는 몸짓 안에는 길고 어두운 숨결이 하얀 피부를 타고 스르륵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