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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층에 귀신이 산다

뭔가 씌었던 이야기

by 이상우

여느 평범한 날이었다.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자’, ‘집집집’ 이런 글자를 종이에 쓰고 있었다. 무슨 말소리가 들렸다. 귀가 먼저 반응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같았다. 달려갔다.

“선생님, 그게 무슨 얘기예요?”

“쌤, 그거 알아? 5층 구내식당에 귀신 나온대”

“와우!!!!!”


대강의 이야기는 이랬다.

1) 밤에 구내식당 앞에 누가 서 있다.

2) 순찰을 돌다 보면 누가 말을 건다.

3) 건너편 창에서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

처음으로 당직 날이 기다려졌다. 집에 갔더니 딸이 ‘신비 아파트’를 보고 있었다.

“딸! 귀신 얘기 재밌어?”

“어, 무서운데 재밌어”

“아빠도 귀신 얘기 좋아해, 헤헤”


회사에서 밤을 새는 날이 왔다. 설렜다. 야식거리도 잘 챙겨 왔다. 원래는 9시면 순찰을 도는데 그날은 늦게 갔다. 솔직히 열두 시는 살짝 무서워서 없어 보이지만 열한 시쯤 갔다. 어차피 같은 자(子)시 아닌가 싶었다. 사실 나는 축복받은 십자가 목걸이도 항상 차고 있기에 믿는 구석도 있었다. 전화기로 성가라도 틀면서 갈까 했는데 그건 너무 없어 보여서 일단 올라갔다.


5층에 내렸다. 불빛이 하나도 없었다. 컴컴해서 플래시를 켰다. 으스스했다. 불을 앞으로 비추자 정말로 사람이 서 있었다. 온몸에 감각이 2초 정도 사라졌다. 그리고 문으로 달려갔다. 귀신 보고 쓰러져서 병가 낼 거였기에 이젠 됐다 싶었다. 가까이 보니 기름때가 묻어 사람 형상으로 보인 것이었다. 쉬는 기간은 2주 정도 생각했던 터라 실망스러웠다.


몇 번 당직을 서면서 낸 결론은 이랬다.

1) 문에 묻은 기름때가 사람 형상으로 보인다. 워낙 어두워서 플래시 빛 반사에 입체감도 생긴다.

2) 구내 카페 쇄빙기가 매시간 돌아간다. 얼음 가는 소리 돌아가는 소리가 누군가 말 거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나는 구내식당 모니터링 요원이라, 그 소리 덕에 사람들이 놀란다고 정기 회의 때 건의했다. 카페 사장님께서는 쇄빙기에 “24시간 작동 중”이라는 안내문을 붙이셨다.

3) 이건 명확하지는 않은데 내 생각에 주방 용품 소독기나 컵 소독기 불빛이 창에 비쳐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었다. 순찰을 해야 하는 장소들은 건너편 3,4층에 있었다. 우리 건물은 ‘ㄷ’자 구조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지나가다 밖을 봤을 때 필연적(?)으로 이쪽 밑에서 저쪽 위를 보게 되고 밤에 언뜻 보면 유령 같아 보이기도 했을 것이었다. Q.E.D.


지나가다가 과장님을 만났다.

“과장님, 구내식당에 귀신 나온대요”

“...야 일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 이젠 별소리를 다 하고 있어”

대문자 T 반응이었다. 흥이 깨졌다. 과장님이 흥미를 보였으면 잠을 이겨내고 축(丑)시에라도 다녀와 볼 계획이었는데 별 소득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이 꽤나 흘러 귀신도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어김없이 당직은 돌아왔다. 당직실 골방이 너무 더웠다. 에어컨 리모컨을 눌렀는데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벽걸이 옆에 짐들이 쌓여 있어서 신호가 안 먹히는지, 아니면 에너지 절약 방침에 따라 코드가 뽑혀 있는지 몰랐다. 살펴보려고 소파 위에 올라갔다. 균형이 살짝 흐트러져서 소파 팔걸이에 발을 내렸다. 팔걸이가 부서졌다.


엄지발가락에 통증이 심했다. 양말은 피범벅이었다. 찢어진 상처를 보니 밴드 붙여서 끝날 정도가 확실히 아니었다. 택시를 타고 365의원에 갔다. 요새는 늦게까지 하는 소규모 응급병원들이 생겨나서 다행이었다. 만약 종합병원 응급실에 갔으면 대기실 의자에서 밤을 새운 다음 아침 6시쯤 의사랑 대화하며 ‘그냥 외래 보세요’ 소리나 들을 정도 상처긴 했다. 그래도 아팠다. 의사 선생님이 보시더니 봉합해야 한다고 했다. 마취주사를 3방 맞았는데 말초신경이 모여있는 부분이어서 그런지 약한 비명이 나왔다.

“좀 따끔하시죠? 고문할 때 손끝이나 발끝에 하는 이유가 있어요”

대문자 T인 사람은 세상에 많았다.

당직실로 돌아와서 아내와 영상통화를 하니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무마를 좀 해볼까 해서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 아니냐. 덕분에 파상풍 주사도 맞았다’ 투의 말을 했더니 주먹도 쥐는 것 같았다. 얼른 끊었다. 나는 참 공무원이기 때문에 순찰 일지를 적어야 편히 잘 수 있었다. 아픈 발을 끌고 길을 나섰다. 시간이 어영부영 흘러 축시 부근이었다. 구내식당에 올라갔다. 이제 흥분이 좀 가라앉는지 발이 아프기 시작해서 귀신이 나오든 말든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내 발에는 상당한 이상이 생겼지만 식당은 멀쩡했기에 ‘이상 없음’이라고 적었다. 나가는데 쇄빙기가 말을 걸었다. ‘까불지 마. 병가는 좀 줄게’


집에 누워 있으니 유치원에서 돌아온 딸이 말했다.

“아빠, 소파에는 왜 올라갔어?”

“아빠도 모르겠어. 거기 팔걸이가 맨날 빠진다는 거 원래 알고 있었거든. 뭐가 씌었나?"

"씌이는 게 뭐야?"

"...귀신하고 좀 친해진다는 뜻인가?"

"오, 아빠 귀신하고 친해? 퇴마 할 수 있어?"

"...아니 발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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