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우 Mar 09. 2019

프로포즈 후기

나는 이렇게 결혼했다

지난 번에 여자친구와 혼인신고를 미리 하느니 마느니 하고 투닥거릴 때 정옥이가 그런 말을 했다.
청혼서도 안 써줬잖아!”
그때서야 프로포즈라 불리는 의식이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걸 알게되었다.
혼인신고서의 프로포즈란에 동그라미를 쳐야 시청에 접수가 되는 거였다.
프로포즈는 혼인의 필수 요건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로맨틱한 면이 부족하다는 꼬리표를 떼어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난 산타형 뺨을 후려 칠 수 있는 로맨틱 가이가 되기로 했다.
일단은 주변의 유험자들에게 물어나 보기로 했다.
     
대한민국 육군 소령이며 결혼 5년차, 3세 여아를 기르고 있는 TK 출신 정통 보수며 주말 부부인 신모씨가 말하길...
까페에 20만원만 주면 풍선 다 불어준다 아이가...이하 생략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겠다.
장가도 가기 전에 여자친구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KB국민은행 과장진급희망자이며 결혼 8년차, 6세 여아와 1세 남아의 아버지인 김모씨가 말하길...
프로포즈 한다고? 일단 나를 불러. 내가 처음부터 다 해준다.”
라고 변태같은 눈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그제서야 이 놈이 결혼식을 올린 10월만 되면 회한에 가득 차서 썩어가는 목소리로 ...결혼은 좋은거야..그럼그럼...”를 읊조린다는 걸 떠올렸다.
     
사조산업에서 북태평양 치어의 씨를 말리고 있는 쌍끌이 사업을 담당하며 하청업체와 물질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형, 동생하는 결혼 8년차이며 6세 남아와 2세 여아의 애비 홍모씨는...
우리집에서 하자. 미정이한테 먹을꺼 준비하라고 할게. 끝나고 안방도 빌려준다
이런 미친놈이...
     
자문은 그만 구하기로 했다.
그것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로맨틱을 개나 줘도 장가는 갈 수 있구나.
그래도 예비 신부에게 이것이 로맨틱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는 했다.
     
청혼서는 밤에 썼다.
낮에 썼다가 내용이 삼천포로 빠져서 이정옥씨는 언제부터 유부녀 할 생각이신가따위의 개드립을 칠까봐서였다.
교보문고에 가서 편지지도 샀다.
조선시대 서찰마냥 길쭉한 종이를 찾을 수 있었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편지지가 아니라 카드였다.
A5 정도의 크기였다.
줄도 없었다.
그냥 눈짐작으로 쓸까 했는데 그건 로맨티스트가 할 일이 아니었다.
로맨스..로맨스..’를 되뇌이며 카드의 양 옆에 눈금을 만들어 줄을 그었다.
작전병 시절 많이 했던 거였다.
몇 줄 긋다보니 손에 익었다.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입도 그 날들을 떠올렸는지 ㅅㅂ가 기어나오길래 훔칫 놀랬다.
     
내용을 쓸 때 일단 감정에 충실하려고 윤종신의 노래들을 틀어 놓았다.
널 볼 수 있었던 다투기도 했던 그 어린 날이 부럽기도 한 걸...”
혼자 울컥하다 깨달았다.
이건 헤어지자는 여자를 붙잡으려고 쓰는 편지가 아니구나.
음악을 바꿨다.
우리 만날래 내가 지금 할 말이 있어...”
발랄한 곡조를 들으니 개드립의 욕구가 다시 기어나왔다.
천주교 개종의 혜택을 쓰려고 하다가 훔칫 놀랬다.
음악을 끄고 미래의 옥이 남편으로서의 다짐을 적었다.
     
완성하고 나니 생각나는 구절이 몇 개 있었다.
외롭지 않을 거야”“늘 함께 있어줄게이런 관용어구들이었다.
그래서 다시 봉투를 열어 편지지의 빈 곳에 채워 넣었다.
처음에는 곳곳에 공백도 있는 읽기 한적한 편지였지만 과도한 욕심에 청혼깜지처럼 되어버렸다.
가독성이 떨어져서 넉넉한 사랑을 강조하려는 본래의 의도가 반영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봉투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請婚書라는 글씨를 연습하기 위해서 빈 종이에 한 5장은 써 보았다.
하지만 막상 쓰려니 급성 수전증이 와서 명백하게 망했다.
다음날 봉투와 붓펜을 사러 교보에 다시 가야했다.
다시 써도 마음에 안들었다.
그러나 괜찮았다.
귀걸이도 함께 준비해놨기 때문에.
     
정옥이가 예전에 갖고 싶은 귀걸이 사진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살까말까 고민을 3년간 했다고 들었다.
이번에 내가 그 번뇌를 해결해 주기로 했다.
마음 한 켠에는 겁나 비싸네란 생각도 하긴 했다.
     
여성들의 로망 xxxx라는 귀걸이 판매 사이트에 들어갔다.
로망과 로맨틱은 같은 거겠지 히히힝하며 각종 장식물들을 보다 충격을 받았다.
우리 정옥이는 검소했다.
아주 무난하고 저렴한 귀걸이였던 것이다.
나의 미래의 부인에게 더 잘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무튼 그래서 '빠른 배송 부탁드려요'를 적으며 주문을 공들여 했다.

     
꽃도 살까 했다.
하지만 제주도에 들고 내려가기 전 긴긴 연휴 속에 시들어버릴 생명체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서 생략하기로 했다.
풍선은 불 생각에 머리가 아파서 그것도 빼기로 했다.
방은 판교 메리어트 호텔로 잡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의 로맨틱한 남자인 종호가 예전에 추천했었다.
딱 맞게도 가정의 달 이벤트를 하고 있어서 나름 저렴하기도 했다.
조식도 맛나다고 해서 같이 신청했다.
아무래도 조식 먹을 생각에 더 신이 났던 것 같다.
있어 보이는 건 아직 멀었다.
     
다만 문제가 생겼다.
사실 혼인신고는 집을 사기 위한 보금자리론을 받기 위해서 결혼식보다 먼저 하려고 했던 거였다.
그래서 혼인신고에 앞서서 깜짝 프로포즈를 하려고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저런 것들이 정리가 되어서 7월에 대출을 받아도 괜찮아져 버렸다.
이번에 프로포즈를 꼭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런 연유가 있기도 하고 배송된 귀걸이의 진품보석감정서를 보자 흥분한 나는 어리석게도 정옥이에게 내가 여차저차해서 귀걸이를 샀는데 그냥 줄게라고 다 불어버렸다.
사진도 보내줬다.
이걸 받은 정옥이는 그냥 이번에 해라고 쿨하게 받아쳤다.
예상도 못했다.
내가 버벅거리니 이번에 하고 넘겨버리라면서 '프로포즈를 내놓아라. 얼른' 이라고 당연하게 말했다. 맡겨놓은 것을 찾는 것 같았다.
어찌되었건 내 깜짝 이벤트를 통한 로맨틱은 정옥이의 한 마디에 미분의 상수마냥 날아갔다.

날이 흘러서 프로포즈를 계획한 아니 들통난 52일이 되었다.
나는 메리어트 호텔에 미리 체크인을 했다.
나름 생각하기로는 가운데 탁자에 편지와 귀걸이를 놓아 두어서 들어오자마자 눈에 보기에 하고 싶어서였다.
그치만 막상 나오려니 호텔 약관의 분실은 책임지지 않습니다가 떠올랐다.
굉장히 없어보이는 행동이었지만 다시 주섬주섬 개인금고에 귀걸이를 넣었다.
     
김포공항에서 만나서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난 귀걸이를 꺼내어 주었다.
정옥이는 예쁘다를 연발했다.
무언가 뿌듯했다.
개인금고의 비밀번호는 우리가 혼례를 올리기로 한 '1014'라고 나름 로맨틱하게 보이려 말했지만 정옥이의 귀는 듣는 쓰임새가 아니라 무언가를 다는 곳으로 이미 용도가 바뀌어 있었다.
이건 청혼서야하며 편지도 전했다.
슬쩍 보더니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못 읽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귀걸이는 계속 거울에 비춰보고 있었다.
팔꿈치로라도 넘겨보라는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프로포즈에 대한 대답은 아예 하지도 않고 있었다.
나는 조바심이 나서 정옥이의 뒷머리에 대고 나랑 결혼 할꺼지?’ 라고 물어봤다.
정옥이는 거울을 보며 ~ 알았어~’ 라고 했다.
아주 로맨틱한 상황이었다.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어쨌든 나는 이렇게 아내에게 청혼했다.

이전 05화 아내의 큰 그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