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우 Aug 18. 2019

아내의 큰 그림

3년 전인 2016년의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결혼할 능력이 없었다. 한낱 비경제활동인구인 30대 중반 석사과정생한테 누가 관심이나 있을까. 종종 취향이 독특한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분 부모님의 성향까지 특이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그분들은 딸의 희한한 취향을 존중해주지 않았었고, 나도 돈 없고 직업 없다는 이유로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에게 있는 욕 없는 욕을 잔뜩 들어야 했다.(물론 딸이 생긴 지금의 나는 그분들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하하하.... 이래서 사람은 경험을 해봐야 하나...)     


 

그런 나를 건져 준 게 지금의 아내이다. 옥은 원래 서울 출신인데 제주에는 일 때문에 내려와 있었다. 아내는 음주 가무 및 흡연을 정말 싫어했다. 하지만 그런 남자를 매일 동창회와 향우회가 열리는 그 섬에서 찾기는 쉽지 않았다. 수많은 소개팅에 지쳤던 아내는 어느 날 친구에게 이런 선포를 하게 된다. 

“나는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고 가정적이며 똑똑하고(?) 내 말 잘 들을 백수 대학원생 같은 육지 남자를 제주로 데려다가 결혼을 한 다음 취직을 시킬 거야.”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대꾸도 안 했다고 한다. 나 같으면 비웃었을 텐데 짐짓 모르는 척만 해준 그 친구는 참 착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조건의 남자를 찾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바라는 이성상인 ‘175cm 이상의 훈훈한 외모, 인서울 이상의 학력, 대기업, 공기업이나 공무원, 노후가 보장된 시부모, 적당한 아파트 전세 가능’이라는 조건을 가졌다는 ‘평범한 남자’를 뛰어넘는 조건 일 것이다. 애초에 모순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만 들어봐도 알 수 있다. 일단 대학원생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대학원은 타인의 말은 그냥 참고(?) 정도로만 듣고 그냥 내 갈 길 가야 적응하고 성공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말을 잘 듣는 대학원생은 있을 수 없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면 대학원을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가지 말라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다 이유가 있다. ‘돈 내고 을(乙) 질’ 하는 곳은 아마 대학원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연애 초기....이때는 턱 선이란 것이 있었다....지금은 10kg가 더 쪘다...ㅜ.ㅜ


저런 진흙밭에 뒹굴고 있던 나를 아내는 맛있는 걸 사 준다며 제주로 오라고 꼬드겼다. 나는 쉬운 남자인지라 맛있는 거에 혹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섬으로 무작정 갔다. 아내는 갈 곳 없었던 나를 씻기고 먹인 다음 자기에게 충성하라며 최면을 걸었다. 주로 돈가스로 칭찬을 하고 때로는 파리채로 위협을 하기도 했다. 이런 주입식 교육의 결과로 내가 자기 말을 순순히 잘 듣게 되자, 이제 밥벌이를 하라며 취직 공부를 시켰다. 그런 연유로 내가 간신히 1인분을 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친구에게 선포했던 옥의 목표는 거의 다 이루어졌다. 그 친구는 놀라며 언니의 빅 픽처는 어디까지인지 물었다고 한다. 아내는 그냥 의미심장한 웃음만을 지었다. 아내의 큰 그림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아내는 공무원을 하는 이유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육아휴직’을 이미 그리고 있었다. 나에게 공짜로 돈가스를 먹인 것이 아니었다. 더 먹으라며 자기 것도 두 점씩 주었다. 기분 좋아진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밥이랑 양배추도 더 달라고 해서 먹었다.      



글머리에서 적었지만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었다. 취직을 했을 때도 이제 둘이 버니 넉넉하게 살 수 있겠다고만 여겼다. 이런 내 모습이 아내는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고 했다. 예상보다 내가 완강히 거부하자 아내는 때로는 충성서약에 대한 이행을 요구하기도 했고, 울며불며 내 혼을 빼기도 했으며, 향수병 초기에 들어서 있던 나에게 아이를 가지면 휴직하고 서울 가 있을 수 있다며 회유를 하기도 했다. 그냥 나의 삶을 즐기며 살겠다는 소신과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아내 사이에 고민하던 나는 충성의 길을 택했다. 다만 한 명만 낳기로 합의했다. 물론 나는 그때만 해도 시도만 하면 아이가 바로 생기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그건 내 능력에 대한 과신이었다. 30대 중후반의 부부인 우리는 그 이후로 병원도 여러 차례 들락거리며 수없이 임신 테스트기를 사다 나르게 된다.       



이제는 만삭의 몸...^^


아이가 들어서기 전까지 나는 임산부의 몸이 왠지 징그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신체 어느 특정 부위만 도드라지는 그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재하가 커가며 하루하루 더 볼록하게 나오는 아내의 배를 보면 내 새끼가 들어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귀엽기만 하다. 튼 살 크림을 둥근 배에 문질러 줄 때에는 아내와 딸에게 둘 다 발라주는 느낌이 들어서 무언가 흐뭇해지기도 한다. 얼마 전에 충치치료를 받을 때에는 내 이가 아픈 것보다 나중에 우리 아기가 치과가기 싫다고 하면 어쩌나란 생각이 먼저 들기도 했다. 아내에게 이 말을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기가 가정적이고 자식들한테 잘 할 것 같아서 결혼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내 기대에 부응하고 있구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듣다가 한 단어에 꽂혔다. 

“자식들? 들? 아니 그건 복수 아냐?”

“뭐 그냥 그렇다고. 그렇게 막 심각하게 들을 필요 없어. 그냥 나온 말이야. 까르르”

아내는 그렇게 말하며 예의 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슬며시 무서워졌다. 이 여자는 나 몰래 또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가훈을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바꿔야 할까도 생각이 드는 오늘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