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방학이 끝난 9월의 마지막 날 예비군을 다녀왔다.
날은 선선했다.
훈련받기 좋은 날이었다.
입대 생각에 설레여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제대로 못 끝낸 세미나 과제 때문도 있지만 국방의무의 지엄함은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더군다나 집에서 2시간 거리인 남양주 금곡 훈련장이어서 늦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긴장했다.
금곡 훈련장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파워블로거 선정 '다시 찾고 싶은 훈련장' 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좋아봤자 예비군이지란 생각도 들었다.
늦을까봐서 차를 끌고 나왔다.
길게 쉰 다음 날이라서 그런지 길거리에 차는 많았다.
벌써부터 애국페이를 길바닥에 뿌리고 있었다.
틀어논 음악에 남자 목소리가 짜증이 나서 걸그룹 노래를 틀었다.
역시 이 옷을 입으면 가청주파수는 어린 여자 음역대로 맞춰지는 것 같다.
'우리 만날래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를 흥얼거리다 보니 훈련장에 도착했다.
주차하자마자 고무링을 파시는 어르신 두 분이 붙었다.
안타깝지만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구매해 드리기로 하고 후다닥 입대했다
블로그에서 금곡 훈련장 팁으로 일찍 들어가는 순서대로 진행시켜준다는 걸 읽었기 때문이다.
30분 일찍 들어온 내 애국심을 스스로 칭찬하고 있었는데 나보다 더 나라를 사랑하는 청년 수십명이 연병장에 앉아있었다.
아 그 블로그 전체 공개였지.
그래서 내 앞에 앞에서 1차 조편성이 끝났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바로 내 앞에서 잘렸으면 1번이라 조장을 해야 했으니까.
20분 정도 기다리니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훈련 사전 교육을 받으러 체육관으로 갔다.
교관이 뭐라뭐라 설명을 했는데 개구리 옷을 입으면 두뇌가 양서류 수준으로 변하는지 청해도 해석도 안됐다.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 교우님은 내 말도 안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장만 믿기로 했다.
대한민국 예비군이 자랑하는 자율선택훈련, 영상모의사격, 마일즈장비전투(총싸움)가 다 있었다.
짜증이 소떼처럼 밀려왔다.
작년에 연천에서 받았던 예비군훈련에서 군단장님 오신다고 교관들이 하도 난리를 쳐서 철조망 500m를 친 것을 생각하며 참았다.
훈련 내용은 뭐 기본적인 것을 받았다.
망할 적들이 장애물을 설치해놔서 기어서 통과해야 했다.
굴러서 일어난다음 나도 모르게 'ㅅㅂ'를 읊조렸는데 전투복 왼가슴에 붙어있는 군종 마크가 보였다.
십자가를 부끄럽게 할 수는 없었다.
의식적으로 주여를 외치기로 했다.
'ㅅ...주여...'를 훈련 내내 중얼거렸다.
마일즈 훈련 때는 상대편 조와 대결을 해야했다.
이기면 조기퇴소, 지면 이길 때까지 추가 교육이었다.
사회진화론적 적자생존의 법칙은 예비군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결연한 의지로 눈에 불꽃을 튀기며 작전을 짰다.
제일 집중 사격을 받기 쉬운 자리는 가위바위보로 정했다.
우리 전 훈련까지는 그냥 하더니 연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오자 무지개 색 연막탄을 마구 터뜨렸다.
레이저 총 맞을까봐 무서워서 숨어 있었는데 저 쪽이 굉장히 저돌적으로 다가왔다.
오는 순서대로 쏘면 됐다.
물론 맞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죽어나가고 있었는데 우리 편만 아니면 됐다.
어쩌다 보니 한명을 (가상으로)죽였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시 십자가가 부끄러워 졌다.
간신히 우리 편이 이겼다.
승자의 미소를 띄며 서로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우리는 이렇게 생사를 나눈 전우가 되었다.
저 쪽은 나라 잃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안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한 시간 먼저 나가야 했다.
정신 교육에서는 영상을 보여주고 시험도 봤다.
10문제 중에 8문제 이상 맞춰야 하고 아니면 재교육을 받아야했다.
문제를 보니깐 내가 현대사 전공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현대사 전공이면 몇 문제 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라사랑이 더 중요한 거니깐 암암.
다 이해한다.
북한을 탈출하신 군인 분이 영상에 나와서 북한 군 홍보를 계속했다.
모두 군인정신으로 무장하고 있고 총을 쏘면 백발백중,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왜 그 좋은 곳을 나오셨는지 궁금했다.
단순 예를 들자면 절 다니다가 교회 와서는 '절이 짱' 이러는 것 같아서 였다.
생각해보니깐 그 분도 먹고 살아야지.
이것도 이해한다 암암.
점심밥은 맛있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새 장비도 고르고 있었다.
깨끗한 총을 들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입소 세 시간만에 군인이 되었다.
하나 궁금한 것은 모든 훈련장에 조교가 이등병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럴리가 없는데 나머지는 생활관에서 드라마나 보고 있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어보기도 귀찮긴 했다.
사격장에 가서야 의문이 풀렸다.
작대기 여러개 들은 그곳에 다 모여있었다.
사로 하나에 두명씩 붙어 있었다.
이제는 클레이 사격용 귀마개도 씌워주고 방탄 조끼도 입혀줬다.
조교들이 너무 친절해서 패밀리 레스토랑에 온 것 같았다.
난 휴머니스트라 쏘기 싫었는데 총이 M16A1이라 궁금해서 쏴봤다.
생각보다 잘 맞아서 놀랬다.
역시 미제가 좋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예비군 3년차의 훈련은 끝났다.
앞으로 세 번을 더 가야 하는데 벌써부터 내년 소집의 무게가 느껴진다.
나라 지켜줘서 고맙다는 친구들의 카톡도 보기 싫다 이젠.
군역을 지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었다.
p.s 예전 한창 예비군 훈련 받을때 쓴글입니다
출근길에 예비군 훈련가는 장정들을 보고 생각나서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