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폰이 보급되기 전 시절, 공중 화장실에는 아무 말이나 적을 수 있는 낙서판이 종종 있었다. 볼일을 볼 때면 철학자로 변하는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써보라는 취지였다. 사실은 벽에다 낙서를 하도 해대니 궁여지책으로 낙서판을 붙여 놓은 걸 수도 있겠다. 화장실에는 음담패설부터 정치적 토론, 인간 실존적 물음까지 별 말이 다 적혀있었다. 특이하게 세계지도를 그리는 사람도 있었다. 제일 유명한 낙서로는 ‘신은 죽었다’(니체) - ‘니체는 죽었다’(신) - ‘너희들은 죽었다’(화장실 미화원) 같은 것이 생각난다. 대학생 시절 기억나는 낙서도 하나 있다. 서울대의 비공식 구호인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를 패러디하여 단과대 화장실 한편에 적혀 있었던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일단 안암은 아니라고 해라.”였다.
쿠푸왕의 친구들
종종 고대 이집트를 묘사하는 영상물을 보면 클리셰처럼 수많은 노예들이 피라미드를 짓고 있다.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나 리들리 스콧의 영화 「엑소더스」가 그런 식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피라미드는 노예들이 지었다고 생각되는 경향이 있었다. 한동안 역사학자들도 당연히 그렇게 여겼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자신의 저서 「역사(Historiae)」에서 피라미드는 노예들이 지었다고 써놨기 때문이다. 그는 쿠푸왕(주: 고대 이집트 제4왕조의 왕(B.C. 2580년경). 헤로도토스는 그를 폭군으로 묘사했지만 현대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쿠푸왕 치세는 평화로웠다는 것이 밝혀졌다) 피라미드가 노예 2만 명을 동원해 3개월씩 교대시키며 20년을 지은 결과물이라고 했다. 이 주장은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낙서들에 의해 뒤집히게 된다. 미국의 고고학자 조지 앤드류 라이즈너(George Andrew Reisner, 1867~1942)는 피라미드를 조사하다 벽에 새겨진 여러 표식을 발견한다. 이를 해독해보니 주정뱅이 쿠푸(Khufu-is-drunk), 쿠푸의 친구들(friends of Khufu)와 같은 의미였다. 그리고 저 이름은 당시 건축업자 집단의 상호였다.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구역에 나름의 명함을 새겨놓은 것이었다. 이와 함께 당시 노동자들의 출석부가 발견되면서 피라미드는 노예가 지은 것이 아닌 당대의 기술자들과 농한기에 할 일이 없었던 노동자들이 임금 받으면서 지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노동자 출석부에는 ‘숙취로 휴가’, ‘부부싸움으로 결근’, ‘아내에게 돈 벌어 오라고 혼나고 출근’과 같은 말들이 써져있다. 생각해보면 헤로도토스는 쿠푸왕 피라미드가 지어진 후 약 2100년 후의 사람이다. 애초에 노예가 지었다는 그 말을 순진하게 믿으면 안 됐다. 참고로 지금으로부터 2100년 전이면 위만조선이 한나라의 공격에 멸망했을 때이다. 덧붙여서 쿠푸왕 피라미드가 지어진지 약 천년 후에 매머드(Mammoth)가 완전 멸종된다.
중세 수도원 생활
유럽의 수도사들도 재미있는 낙서들을 남겼다. 초창기 기독교인들은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다시 와서 세상의 종말이 곧 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날은 오지 않았고, 예수는 가짜라느니 예수와 하느님은 별개라느니 하는 이단들은 난립했다. 이를 막기 위해 교부(敎父, Father of the Church)라 불렸던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를 국가의 형태처럼 제도화, 관료화한다. 이런 조직화를 거부하며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집트 사막 등으로 떠나 은거하며 만든 곳이 최초의 수도원이었다. 처음의 의도는 좋았지만 체계가 없었던 이들은 시간이 갈수록 종교 근본주의자, 온갖 무지렁이, 범죄자들이 뒤섞여 종잡을 수 없는 곳으로 변해갔다. 성 베네딕토(St. Benedictus, 480-546?, 주:그리스도 교 성인이며 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불린다. 그가 세운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은 중세 수도원들의 모델이 되었다)는 여전히 세상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행패(?)를 부리던 수도원들을 개혁하며 목적, 제도, 생활, 수도법 등을 규정한 베네딕토 회칙을 만든다. 이 규칙이 수도회들에 보급이 되면서 우리가 떠올리는 중세 수도원이 모습이 갖춰진다. 수도원들은 점차 기존 교회 조직의 영향 하에 들었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후원했던 샤를마뉴 대제(주: 카롤루스 마그누스 1세(740 ~ 814)로도 불린다. 이슬람 세력을 격파하고 작센족, 롬바르디아 왕국 등을 굴복시켜 서유럽의 기초를 닦았다. 교황은 동로마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샤를 마뉴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한다)의 고전 문예부흥 정책, 일명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의 주역으로 활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에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저작이나 교부들의 저작을 각지에 보급하기 위해 하루 종일 베껴 썼다. ‘이미 교부들이 중요한 건 다 말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토론은 필요 없다’라고 선언한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 덕분에 창작활동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필사는 죽어라 해야 했다. 활자와 종이가 없었기에 양피지에 적어야 했다(종이는 11세기 중반이 되어야 유럽에 들어온다). 수도사들도 인간이었던 지라 이 양피지 옆 켠에 이런저런 투덜거림을 남겨 놓았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다”, “포도주라도 한 잔 주고 일을 시키지”, “손가락 세 개를 뺀 나머지 온몸이 괴롭다”. 고상한 수도사들이 남겨 놓은 낙서이다.
조선시대 대여 책의 낙서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한글이 보급되고 상업자본이 발달하여 수도 한양을 비롯한 전국 곳곳의 도시들이 팽창하게 된다. 도시 거주민들은 독서와 같은 문화향유 욕구가 강했다. 이 계층은 기존 양반들도 있었겠지만 부녀자, 상업 등에 종사하는 중인과 같은 부류도 많았다. 이들을 겨냥하여 출판업자들은 영리를 목적으로 한 인쇄물, 즉 방각본(坊刻本)을 간행한다. 주로 춘향전과 같은 한글소설들이 인기가 많았고 내용은 지금의 드라마들과 비슷했다. 전기수(傳奇叟)와 같이 소설 읽어주는 직업도 있었다. 소설에 너무 집중했던 한 남자는 전기수가 말하는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자 전기수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도 있었으니 과한 몰입은 이제나저제나 좋지 않다. 아무튼 아무리 활자로 찍었어도 책은 비쌌다. 사서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주로 세책가(貰冊家)라고 불리는 곳에서 책을 빌려보았다. 가격은 만만치 않아서 비녀, 팔찌, 놋그릇이나 가구를 담보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영화 「음란서생」을 보면 이런 모습이 잘 재현되어 있다.
음란서생의 출판업자들
비싸게 빌려보는 만큼 사람들은 불만이 많았나 보다. 세책(貰冊)들에 이런 소위 ‘컴플레인’들을 낙서로 남겨 놓았다. “책 주인은 보아라 이놈아 네 놈이 책을 세 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책세를 너무 과하게 받는구나”, "책에 낙서가 많으니 다시 보수하여 세를 놓아 먹거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 어미를 종로 거리에 갖다 놓고....”,“단권을 네 권으로 만들고 남의 재물만 탐하니 그런 잡놈이 또 어디 있느냐”, 다 세책에 적혀있는 낙서이다. 아무 생각 없이 적어 놓는 낙서도 있다. “이 책 보는 사람 개자식 - 이 것 쓴 사람 개자식 - 이 낙서 보고 욕하면 내 아들”. 시대는 바뀌어도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낙서에 재미있는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공적 공간에서 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쳤던 것처럼 낙서를 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강점기나 군사독재정권 때가 그랬다. 일제 시기 화장실 낙서들에는 일제에 대한 욕과 대표 친일파 이완용에 대한 욕이 많았다. “여기는 이완용 식당”, “천황 바보”, “조선독립만세” 등이 있었다. 한국의 군사독재 시절에는 다음과 같은 낙서들이 각 대학 법과대학 화장실에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통령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청와대로부터 나온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기록이다.
이제는 종이 낙서의 시대는 저물고 온라인이 낙서 문화를 대신한다. 많은 글들이나 사진, 댓글들이 인터넷 공간에 수없이 뿌려진다. 자신이 십 년 전에 쓴 글 하나가 영구 박제되어 어느 순간 뛰어나와 망신을 줄 수도 있는 시대이다. 필자도 두려움에 떨며 가입한 커뮤니티들을 돌면서 쓴 글들을 종종 삭제할 때도 있다. 망신이면 양반이다. 정도가 지나친 글들은 법적 송사에 휘말릴 수도 있다. 이런 문제점이 나타나며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라는 개념도 등장했다. 온라인상에서 자기의 개인정보를 삭제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2010년 스페인의 마리오 곤잘레스라는 변호사는 자신의 이름을 구글에 검색한다. 그러다 한 기사에서 자신이 연금을 내지 않아 집이 경매에 붙여졌다는 옛이야기를 보게 된다. 그는 이를 삭제해달라며 법원에 제소를 하는데 이 사건을 통해 ‘잊힐 권리’가 실체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2012년 유럽 일반정보보호규정(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 GDPR)에 ‘잊힐 권리’가 실리며, 2014년 유럽 최고재판소는 마리오 곤잘레스의 손을 들어주며 이 권리를 인정한다. 일부에서는 ‘잊힐 권리’가 인터넷상의 ‘표현의 자유’와 상충된다는 문제를 지적하기도 하니 추후의 논쟁을 지켜볼 일이다.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옛 글과 같은 부끄러운 행위를 조용히 지워주는 ‘디지털 장의사’도 덩달아 등장했다. 정약용은 이런 상황을 예측이라도 했는지 아들들에게 남기는 편지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편지를 한 장 쓸 때는 두 번, 세 번 읽어보면서 사통오달한 번화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펴보더라도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더라도 조롱받지 않을 만한 편지인가를 생각해 본 뒤에야 비로소 봉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군자가 삼가는 바다.” 이 편지를 보니 내가 지금 쓴 글도 나중에 놀림거리가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