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쯤 대학원 수업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제 강점기 관련 시간이었는데, 내용은 당시에 역사학 쪽에서 한창 유행했던 생활사 관련 세미나였다. 발표자는 1930년대 가정생활에 대해 이야기했고 제사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게 되었다. 발표자는 우리가 흔히 아는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말들은 196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것이고 제사의 원형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조선 전기 제례를 전공하신 박사님 한 분이 그건 맞는 말이라고, 성리학의 가정 법전인 『주자가례(朱子家禮)』 어디에도 그런 예법은 안 나온다고 맞장구쳤다. 그러자 조선 후기 지방사를 전공하고 있는 한 분이 그렇게 만은 볼 수 없다고, 조선 후기에 각 지역과 서민층에도 나름의 관례가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홍동백서’도 그 산물이라는 반론을 제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현대 여성사를 공부하고 계셨던 한 분이 ‘제사의 비합리성’을 거론하며 그 토론에 참전하자 수업은 본래의 목적을 망각한 채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난투극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대학원 세미나가 으레 그렇듯 처음 주제는 중요하지도 않았다. 토론이 격해지자 다들 담당 교수님을 쳐다봤다. 자기편을 들어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상황은 판결을 필요로 했다. 평소에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떠드는 거에 아무 관심을 두지 않았고 종종 졸기도 하셨던 그 교수님은 한 말씀으로 이 아수라장을 정리했다. “나는 교회 다녀서 제사 잘 몰라, 그러니까 딴 얘기 합시다.”
우리는 흔히 제사(祭祀)라고 하면 유교적 의식행위를 떠올리게 된다. 제사의 정의는 신령(神靈)에게 음식을 바치며 기원을 드리거나, 돌아간 이를 추모하는 의식을 말하지만, 그 절차가 오랜 시간에 걸쳐 유교식으로 고착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례편람(四禮便覽)』(각주: 조선 후기의 학자 이재(1680-1746)가 정리한 관례, 혼례, 상례, 제례에 관한 이론서. 이해하기 쉽도록 각 절차의 서식과 도식이 함께 실려 있다)에 의하면 제사는 8종(각주:사시제, 시조제, 선조제, 이제, 기일제, 삭망제, 속절제, 묘제)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기일에 지내는 기제사(忌祭祀), 명절에 지내는 차례(茶禮), 조상을 위해 지내는 시제(時祭) 일 것이다. 사실 이 방대한 내용들을 하나하나 살피면 끝이 없기도 하다. 그러니 이 글에서는 세상 이곳저곳에서 이뤄졌던 제사의 여러 모습들을 살짝 찾아보도록 하자.(각주:신성(divinity)에 대해 드리는 의례(ritual)와 조상(ancestor)에 대해 드리는 제사(ancestral rites)는 의미와 형식이 엄밀히 다르지만 여기서는 함께 다루도록 한다)
시리아의 두로-유로포스(Dura-Europos) 유적에서 발견된 레위기 묘사 벽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모두 인정하는 경전인 「레위기(LEVITICUS)」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법에 대해서 세세히 다루고 있다. 제사의 종류, 제물에 대한 규칙이나 사제에 대한 규정 등이 쓰여 있다. 그런데 아무리 믿음이 투철한 사람이라도 한국에서 이 가르침대로 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레위기」는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겨 그 고기를 먹거나 제사에 올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서 그렇다. 부가적으로 오징어나 문어도 포함되어 있다. 지키기 쉽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음식점의 반은 문을 닫아야 한다. 그러니 문자 그대로를 지키기보다는 가르침의 의미를 따져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라는 「레위기」의 중심 구절이 있는데, 이를 곰곰이 따져보면 결국 이 경전은 거룩하다 여겨지는 신성과 우리의 일상적인 인성이 만났을 때 지켜야 할 마음가짐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영국의 왕 리처드 2세의 장례식 행렬 묘사
중세 유럽에서도 우리의 기제사와 같은 위령제를 지내곤 했다. 민간풍속에서는 3일제, 7일제, 9일제, 30일제, 1년, 그리고 기일에 미사, 즉 그쪽 방식의 제사를 지냈다. 이 의식의 의미는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는 것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11~14세기 유럽에서는 망자가 저승으로 바로 간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죽은 자들이 산 자 사이를 얼마간 방황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승을 떠돌고 있는 영혼들이 계속 재연되고 있는 장례식을 보면서, 저승으로 확실히 갈 수 있도록 하는 안내의 역할을 제사가 담당했던 것이다. 중세 유럽인들은 ‘저승으로의 통과’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별로 이루어진다고 여기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제사가 있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선조들에 대한 제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보통은 상(商) 나라의 조갑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조갑은 장자가 아니었지만, 형을 죽이고 상나라의 왕위에 올랐다. 그러면서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제사 의례를 정비한다. 당시 상나라는 온갖 잡신을 다 챙기는 사이비 제사의 천국이었다고 한다. 이를 모두 정리하면서 오로지 조갑의 직계 조상에 대한 제사만 지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조상신들이 농사, 날씨, 질병, 전쟁 등을 관장하는 초월적 존재로 선전했다. 제사 때 주변국 포로들을 인신공양(人身供養)(각주:종교제의 때 인신공양을 하는 풍습은 고대 팔레스타인과 북아프리카, 아즈텍 문명 등에서도 빈번히 행해졌다) 하는 등 가혹한 통치로 인하여 상나라는 주나라에 의해 멸망하지만 여기서 유래된 조상숭배 풍습은 계속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런 상나라의 제사 형식들은 현재 한자에도 여전히 흔적이 남아 있다. 구(龜)는 ‘점을 치기 위해 사용되던 거북이’, 복(卜)은 ‘점을 치다’, 정(鼎)은 ‘신에게 물음과 그 답’, 혈(血)은 ‘제기에 담긴 사람의 피’, 민(民)은 ‘인신공양을 하던 노예’, 유(儒)는 ‘제사를 지내던 지식인 집단’ 등 여러 문자에 담긴 의미들을 찾을 수 있다.
이이의 격몽요결
제주에 살았을 때 제사에 관해 들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는 ‘빵’이었다. 제사상에 빵이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그냥 빵도 아니고 카스텔라나 초코파이도 올라간다고 듣게 되었다. 나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에서 자랐다. 그래서 제사상하면 상다리가 휘어지고 누군가의 허리도 휘어지는 그런 것만을 상상해왔다. 그런데 제사상에 빵이라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유학자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에 이런 말을 적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주로 사랑하고 공경하면 그뿐인 것이다. 가난하면 집안 형편에 어울리게 하면 되고, 병이 났다면 몸의 형편을 헤아려 제사를 지내면 되는 것이다.”(각주:『격몽요결(擊蒙要訣)』 제례장(祭禮章) “凡祭 主於盡愛敬之誠而已 貧則稱家之有無 疾則量筋力而行之”) 이이의 말을 따르면 집안 형편에 어울리지도 않고, 제사 지내느라 병이 나고, 음식도 남아서 쓰레기가 되는 전통을 흉내 내는 제사보다는 빵도 올라가고 주스도 올라가고 이것저것 고인이 좋아하던 것들이 올라가는 제사가 오히려 전통에 합당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제 곧 설날이다. 집에 따라 제사를 지내게 될 것이다. 제사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산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제사가 부담스럽고 힘들다면 그건 안 하느니 못할 것이다. 부디 모두가 행복한 한 해와 제사가 되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