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와 마스크
어느 봄날 딸과 함께 산책을 하러 집 주변 탄천 산책로로 나갔다. 날이 따뜻해져 다행이었다. 가정보육과 어린이집 과도기인 18개월 아이와 집에만 있는 것은 꽤나 곤욕이었었다. 그 깽판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진짜 힘들어 조혼 자리를 알아보기도 했었다. 일주일에 이틀만 친정으로 보내주면 된다고 했다. 아내 친구 아들과 혼담이 오고 가기도 했지만 그 집의 조건 역시 자기 아들 데려가는 것이어서 엎어진 적도 있었다. 다행히 계절이 바뀌었으니 지금부터는 주로 밖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다짐하며 재하를 데리고 나간 것이었다.
외출은 좋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재하가 한사코 마스크 쓰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가자는 말을 듣고 신나 하는 딸에게 넌지시 「재하, 나갈 때 마스크 쓸 거지?」라고 물어보면 「응!!」이래 놓고 막상 마스크를 씌우면 ‘감히 나에게 이런 흉측한 것을 하라고’라는 표정으로 손과 발을 휘둘렀다. 아니 그러면 처음부터 말을 말든지. 영혼 없는 공짜 대답의 대가인 자기 엄마를 닮았는지 한 입으로 두말을 했다. 늙은 부모의 장점은 그래도 애가 예뻐서 혼내지 않는다는 건데 그걸 잘 아는지 늘 인내심을 시험한다.
재하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사방에 친한 척을 했다. 내 손은 당연히 뿌리쳤다. 자기는 손을 흔들어 팬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니 아빠 손을 잡을 여유 따위는 없다는 것 같았다. 그러다 유치원에서 집으로 귀가 중인 여섯 살쯤 되는 오빠를 보았다. 박서준 닮은 그 남자애는 내가 봐도 잘 생겼었다. 역시 엄마를 닮아 얼빠인 우리 딸이 그 친구에게 눈을 떼지 못하자 왠지 불쾌해졌다. 걔도 재하를 빤히 봤다. 마음에 들었던 걸까. 그러다 한 마디 꺼냈다. 「마스크 써야 하는데」. 나는 움찔하면서 소심한 목소리로 「.., 아저씨도 씌우고 싶지」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재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약간 충격을 받은 듯했다.
집에 돌아가는 내내 자기도 마스크 쓰겠다고 내 마스크와 본인 입을 가리키면서 「아~아~아~」 소리를 냈다. 아빠 말은 죽어라 안 들으면서 오늘 처음 만난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남자애 말은 듣다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 그래도 쓰겠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여기며 집에 오자마자 소형 마스크를 씌웠더니 ‘감히 나에게 이런 짓을 해?’ 라면서 내 뺨을 치며 밀어댔다. 어서 부끄러움이란 것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이 지났다. 재하는 엄마가 출근할 때 기어코 쫓아서 일어났다. 9시 라디오를 듣고 싶었는데 본의 아니게 그날도 7시 방송부터 들어야 했다. 아내는 발걸음도 신나게 저편으로 사라졌다. 베란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딸의 마음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재하는 기분이 안 좋았다. 엄마가 집에 있어 우리가 굶는다면 기분이 더 나빠질 것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지만 부끄러움도 모르는데 그런 걸 알 리 없었다. 그나마 며칠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어린이집 수습생이란 점이었다. 다만 적응기간이라 함께 가야 했다. 나같이 정적인 사람은 선생님들의 역동적인 억양과 행동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선생님이 「재↗하↗야↘아↗↗」하면서 목소리를 높이시면 같이 호응을 해야 했지만 입이 차마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재하는 아빠랑 만 놀았고 우리는 어린이집을 대관해서 논 꼴이 되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어린이집을 나왔다. 재하는 다시 탄천에 가자고 했다. 며칠 만에 꽃이 바뀌었다. 단지 유치원 아이들이 단체로 나와 있었다. 그 오빠의 유치원이었다. 보수적인 교육기관인지 남자-남자, 여자-여자가 손을 잡고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가르치는 저 유치원을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재하도 그 무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스크 오빠의 궤적을 쫓고 있는 것이었을까. 눈을 떼지 않았다.
다시 은근히 기분이 나빠졌지만 그래도 좋은 기회다 싶어 딸에게 말했다. 「재하야, 저번에 그 오빠 기억나? 마스크 쓰라 했잖아. 마스크 쓰면 저기서 오빠가 와서 칭찬해 줄 거야」. 사실 나타나지 않았으면 했다. 괜히 신경 쓰였다. 잘생긴 인간은 나이를 불문하고 그냥 싫다. 아무튼 그 일 이후로 나는 소형 마스크를 들고 다니기에 재빨리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냈다. 재하는 마스크 오빠 이야기를 하니 기억나는지 씩 웃었다. 마스크를 권하는 아빠 손은 탁 쳐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나에게 날리며 저 쪽으로 달려 나갔다. 「아빠, 나는 남자에게 휘둘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아니 지지배야, 주체적인 건 좋지만 마스크는 써야지. 그리고 외모 너무 보지 마. 네 엄마 그렇게 얼굴 따지더니 나랑 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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