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 사람들은 제주 음식 하면 회 같은 물고기를 떠올리지만, 여기서 계속 살아온 입장에서는 돼지고기 요리 종류가 훨씬 많고 맛있어.”
생각해보니 그랬다. 예전에 친구들과 제주 여행을 다녀온 후에, 누군가 나에게 어떤 음식이 제일 맛있었냐고 물었을 때 나도 돼지국밥을 꼽았던 기억이 난 것이다. 사실 제주에 살 때도 그랬다. 아니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 제일 맛있는 것이 돼지고기라니, 편하게 이해가 바로 되지는 않지만 여행객도 현지인도 이주민도 그것을 꼽았으니 약하게나마 귀납적으로 증명은 된 셈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주호(州胡, 제주의 옛 세력)라 불리는 사람들이 소나 돼지를 키우는 것을 좋아했다’ 고 적혀있다. 삼국지가 서기 3세기에 쓰인 것이니 제주에서 돼지의 역사는 최소 1700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성호사설이나 탐라지, 해동역사에도 제주에 대한 언급이 있을 때 돼지 이야기가 함께 나오는 것을 보면 제주와 돼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듯하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를 돼지로 만드는 키르케
돼지는 전 세계적으로 풍요의 의미로 여겨졌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엘레우시스(Eleusis) 신앙의 상징으로 돼지를 생각했다. 대지의 신 데메테르의 현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집트에서는 주신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를 나타내는 동물이었다. 로마에서도 데메테르와 동격인 케레스를 섬기며 돼지를 떠올렸다. 긍정의 의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영웅담 ‘오디세이아’에서 아이아이 섬(Aeaea)에 사는 마녀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서 돼지는 불결한 동물로 여겨져 금기시되기도 했다. 이런 극단적 금지에 대해 1950년대 즈음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물이 부족한 중동 지대에서 습한 환경이 필요한 돼지는 당연히 금지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당시 온난했던 서아시아 기후와 현재의 건조한 날씨는 달랐을 것이라는 현대의 연구들이 나오면서 타당성은 꽤 약해진 상태이다. 이에 대해 신화학자 강대진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고대 여신들은 풍요를 상징했고, 이를 섬기는 신앙은 당연히 돼지를 여신의 상징으로 여겨 귀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남성신(유대교의 야훼, 이슬람의 알라 등)을 섬기는 일신교들이 등장하자, 이들은 돼지를 터부시하고 위치를 격하시켰다고 말한다.
제주의 창조신 설문대할망
제주에서도 창세신화에 ‘설문대할망’ 이라는 대지모신이 등장한다. 설문대할망은 방귀를 뀌어서 천지를 창조하고 바닷속의 흙을 퍼서 제주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거대한 여신은 몸속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 그때의 제주를 이롭게 했지만, 자신의 큰 키를 자랑하던 설문대할망은 결국 밑이 없다는 한라산 물장오리물에 빠져 죽고 만다. 이러한 풍요로웠다는 상상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때도 제주에는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번식을 하고 다산을 하는 돼지를 바라보며, 설문대할망과 함께했던 모든 것이 넉넉했을 그 시간을 다시금 그렸을 것이다. 따라서 제주 사람들이 돼지를 귀하게 여기고 공존하는 삶을 살았을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응가를 먹는 오키나와 돼지
제주에서는 돼지를 ‘통시’라고 부르는 뒷간 아래쪽 우리에 키웠다. 이러한 독특한 우리는 오키나와를 비롯하여 남부 한반도에 걸쳐서 분포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도 통시와 비슷한 후한시대 조형물이 출토된 것을 보면 동아시아 전반에 비슷한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점차 ‘똥돼지 문화’가 소멸했지만 제주, 오키나와, 한반도 남부 일부에서 이 전통은 남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생산력이 높아진 곳의 돼지는 곡물을 먹을 수 있었던 반면에 먹을 것이 부족했던 지방의 돼지는 계속 응가를 먹어야 했을 것이다. 일설에는 지방이 두꺼운 돼지가 독사나 독충에 강하기 때문에 돼지를 1층에 놓고, 사람은 2층에 주거함으로 피해를 예방하려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람은 분뇨를 처리할 수 있고 돼지는 인분과 독사 등에서 영양소를 얻을 수 있는 조상들의 지혜라 할 수 있겠다.
제주의 돼지 신부님, 맥그린치 신부님(출처 : 제주교구)
다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제주 흑돼지는 원래의 ‘꺼멍도새기’들은 아니다. 우리 주변의 흑돼지들은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외국에서 도입된 개량종과 교잡(交雜)된 종이다. 1954년 제주 한림본당에 부임한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Patrick James McGlinchey, 한국명 : 임피제, 1928~2018)는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던 제주를 구하고자 고향인 아일랜드에서 요크셔 돼지를 데리고 온다. 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한 그는 가톨릭에서 농부를 수호하는 성인 이시도르(St. Isidore)의 이름을 따서 이시돌 목장을 만든 후 도민들과 함께 돼지사육을 포함한 축산업을 시작한다. 그러니 오늘날 제주도 여행을 가서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건 모두 ‘돼지 신부님’의 공이다. 제주에서 맛있게 삼겹살을 먹은 후에는 맥그린치 신부님의 평안한 안식을 한 번쯤 기도해 드리자. 그리고 다른 이야기지만 이시돌 목장에 가서는 우유 아이스크림도 꼭 먹어보자.
나보다 편히 살 것 같은 흑돼지들(출처: 제주 축산진흥원)
이렇듯 제주 흑돼지가 순수 혈통이 아니라 실망할 수도 있다. 그래도 제주는 돼지 키우기에 좋은 환경이라 고기가 더 맛있는 것이고, 그만큼 풍요로웠던 ‘설문대할망’의 땅이라 돼지가 더 잘 자란다는 뜻 아닐까 싶다. 반가운 이야기는 엄혹한 시절에도 힘겹게 살아남았던 ‘꺼멍도새기’들이 천연기념물 550호로 지정되어 제주 축산진흥원 내에서 진흙 목욕을 즐기며 살고 있다고 한다. 물론 다른 교배종들은 제주돼지의 씨가 따로 있냐며 ‘제주돼지 영유종호(濟州黑猪 寧有種乎)’를 외칠 수 있을 일이긴 하다.
제주 제주시 구남로 22 형돈, 저는 이곳과 아무 관련 없습니다
참고로 정말 오리지널 ‘제주 흑돼지’를 먹으면 천연기념물에 위해를 가한 것이기 때문에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돼지고기 한 끼 치고는 너무 비싸니 그냥 남들 먹는 것 먹는 게 나을 것 같다. 한 곳 추천해 드리면 제주시 이도 2동에 있는 「형돈」이라는 고깃집이다. 별로 크지 않은 집이지만 고기는 두껍고 비싸다. 흑돼지도 파는데 사실 그게 그거니 그냥 돼지고기 먹으면 된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여기가 제일 맛있었다. 잘 알려진 삼겹살 집인 「돈사돈」 창업주의 형이 운영하고 있어 ‘형’ 돈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구워주기도 하니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