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단기체류기-2
제주단기체류기-2
반드시 늦게 일어나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간밤에 암막커튼을 쳤었다. 눈을 떴을 때도 컴컴했다. 일찍 깨고 싶어서 일어난 것은 아니고 재하가 엄마 아빠를 깨웠다. 효녀 재하는 계속 외쳤다.
「쟤, 껌껌 시여, 불 켜!! 불 켜어↗↗↗」
눈을 감고 대꾸했다.
「아빠 컴컴 좋아, 불 꺼」
이런 응답을 하다가 아내에게 대답이 왜 그 모양이냐고 한소리를 들었다.
옷을 대충 입고 일단 아침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아내는 자신의 차림새에 불만이 있었다. 연유는 이랬다. 나는 옷을 꽤나 안 사는 데 아내는 더 사지 않았다. 나보다 안 사는 사람은 거의 처음 봤다. 평소에는 언니들이 입던 옷을 구호물자처럼 들여와 입는 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딸과 함께 가는 첫 여행이라 신경이 쓰였는지 이런저런 옷을 구입하는 것 같았다. 특히 5성 호텔 조식 착장용 패딩 점퍼를 사겠다고 여행 전날 옷가게에 가기도 했다. 다만 마음에 드는 제품은 사이즈가 없었고 원래 입고 싶었던 것과 비슷한 옷들은 왠지 성에 안 찬다며 그냥 돌아왔었다. 그 조식 패딩을 입지 못하고 원래 입던 두꺼운 옷을 걸치고 가야 해서인지 몸이 무거워 보이기도 했다. 우리 방은 별관이었고 식당은 본관이었다. 몇 층인지 기억 못 하고 있으니 아내가 6층이라고 바로 알려줬다. 이렇게 먹는 것에 대해서만 확실하여 옷에는 뜻이 없나 싶었다.
우리 딸은 당연히 안겨갔다. 내려서 걸어갈까라고 했더니 자기 아야 하다고 했다. 다리가 아프다 했는데 복도 중간에 있었던 키티 입간판을 보고서는 잘도 뛰어내려 사진을 찍었다. 식당에 가니 사람들이 부지런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날은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먹고 체크아웃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 같았다. 반찬 가지 수는 많았다. 재하에게 무얼 먹여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여기까지 와서 시리얼에 우유 말아먹고 가는 것은 아니겠지. 딸의 센스를 믿었다. 역시 안겨 메뉴들을 보러 다녔다. 서서 다니면 아직 키 때문에 안 보이니 그나마 안아줘도 마음이 편했다. 재하는 돌아다니다가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를 보고 그것을 먹겠다고 했다. 그리고 체크아웃 날까지 파스타만 먹게 되었다. 재하가 엄마와 밥 먹겠다고 하였기에 내가 아내 것까지 퍼왔다. 격식 있는 조식 패딩은 입지 못했어도 먹는 것에는 나름 품위가 있었다. 메뉴 색도 예쁘게 구성하여 적당량을 먹었다. 나는 여전히 촌스럽게 아침부터 탕수육과 소시지를 열심히 먹었다. 롯데 호텔 밥은 나름 맛있어서 많이 먹었다. 개인적으로 제주도 호텔 중 제일 맛있는 식당은 제주시 연동에 있는 메종 드 글래드 삼다정을 꼽는다. 뷔페는 별로 기대 안 하고 가는데도 맛있었고 특히 육회가 좋았다. 제주에는 호텔이 워낙 많아 잘못 가면 돈은 돈대로 내고 성게 미역국에 밥이나 말아먹고 나와야 될 수도 있는데 롯데 호텔도 나름 괜찮은 것 같았다.
호텔에는 커플들이 많았다. 별로 부럽지 않았다. 어차피 쟤들이 잘 되어봤자 애랑 밥 먹으라며 싸우고 있는 내 모습일 테니 그랬다. 오히려 나이 지긋해 보이는 중년 부부들이 좋아 보였다. 여기에 있으니 청소도 다 해주고 밥도 차려주는 게 너무 좋아 아내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좋은 실버타운 들어가자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30년 후 이재하가 애를 던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덩달아 들었다. 로비에서 보니 커플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아무래도 캐리어 크기와 개수를 보면 사귄 기간이 대충 짐작이 되었다. 오래 지낸 사이는 차림도 단출하고 가방도 적었다. 시작되는 연인들은 코스프레를 하러 왔는지 피난민 수준으로 짐을 이고 다녔다. 소지품을 옮겨 주시는 호텔 직원분이 캐리어 탑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풀세팅을 한 여성분들도 있었는데 아직 역병 시즌이 끝나지 않아 제주로 신혼여행을 오신 분들 같았다. 바로 오늘 밤에 부디 아이가 생기기를 기원해 드렸다.
밥을 먹고 방으로 돌아가며 오늘 무엇을 한 것인가 상의를 했다. 원래 뽀로로 테마파크를 가려는 계획이었지만 일정을 바꾸기로 했다. 휴일이니 엄마 아빠가 애들 데리고 많이 올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오늘은 자동차 박물관을 가고 내일 뽀로로 테마파크에 가기로 했다. 재하는 여전히 안겨서 방으로 갔다. 내려서 걸어가자고 진지하게 권했더니 컴컴해서 무섭다고 했다.
「재하, 이게 호텔 복도의 매력이지」
그랬더니 그러니 안겨 있겠다는 눈치를 보였다. 안겨있기 3종 핑계 세트 중에 ‘아야 하다’와 ‘무섭다’가 나왔으니 다음은 ‘춥다’가 나올 차례였다. 제주도라 자기도 양심은 있는지 춥다고 아직 하지는 않았다.
재하가 차를 오래 타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숙소 근처에 있는 자동차 박물관을 골랐었다. 듣기로 그곳에는 재하가 타고 다닐만한 작은 장난감 차가 있다고 했다. 그걸 타고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아주지 않고 다닐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 곳인지. 게다가 박물관 내에서 사슴을 키워서 먹이도 줄 수 있다고 했다. 아내가 하는 일은 다 옳지만 이곳을 고른 것은 탁월한 선택이셨단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 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세계 자동차&피아노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을 만드신 한 회장님께서 사재를 털어 수집품을 모아 개관한 것이라 했다. 자동차 수집으로는 세계적으로 손가락에 들어간다나? 관리를 어찌나 잘해 놓았는지 자동차들이 반짝반짝했다. 나름의 설명도 잘 붙어 있었다.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이 정도 상태로 유지하려면 얼마나 공이 들어가는지 아니까 우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피아노들도 많았다. 걔네들은 온습도에 예민하니 환경 조건을 맞추느라 가습기들이 중환자실처럼 수분을 뿜고 있었다.
다만 들어가는 입구는 경사가 조금.. 이 아니고 상당히 있었다. 사랑하는 딸은 금강산 유람 온 아기처럼 둥실둥실 아빠를 타고 갔다. 이제 얘가 상당히 무거워서 팔이 아팠다. 모든 신경이 아이를 안고 있는 상체에 쏠리다 보니 괄약근 힘 조절이 되지 않았는지 걸을 때마다 엉덩이에서 ‘뿡뿡’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발의 에어 터지는 ‘뾱뾱’ 소리인 줄 알길 바랐다. 이제 방귀가 새어 나오는 나이가 되다니 마음이 아팠다. 그 마음도 몰라주고 딸은 내려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입장권을 사자 직원 분이 사슴먹이용 당근을 주셨다. 사슴은 대여섯 마리쯤 있었다. 애들 때깔 상태가 좋았다. 대부분은 당근 따위에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MBTI로 치면 ‘E’처럼 보이는 인싸 사슴 두 마리가 다가왔다. 재하는 무섭다고 더 안기고 나는 한 손으로 딸을 안고 부들거리며 다른 한 손으로 당근을 줘야 했다. 다 먹인 후 더 높은 경사를 따라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전시관 입구에는 아까 언급했던 모형 차들이 있었다. 재하는 자기의 고유색이라 믿는 빨강 차에 냉큼 올라탔다(재하는 일련 부호처럼 주변 지인들에게 색을 부여했다. 아빠는 파랑, 엄마는 초록, 첫째 이모는 노랑, 둘째 이모는 보라, 할머니는 갈색, 삼촌은 검정 이런 식). 뒤에 손잡이가 있어 밀고 다닐 수 있었다. 재하는 자동차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인력거 체험을 하러 왔다. 한 시간 넘게 모형차를 타고 다녔다. 그만 타고 점심 먹으러 가자하니 소리치며 온 몸으로 거부했다. 예전에 학교 축제에 전인권 씨가 와서 돌고돌고를 두 시간 동안 돌리는 바람에 모두 다음날 집에 귀가하게 됐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녁이나 되어야 내리려나 하는 비관적 생각도 들었다. 전화기 만보계는 반나절 만에 하루 목표치가 다 채워졌다. 그쯤 타니 자기도 배가 고파졌는지 다행히 내리겠다고 했다. 딴에 미안했는지 자기가 끌어주겠다며 아빠에게 타라고 했다.
「아빠, 차 타. 쨰 끌」
차 앞에는 ‘36개월 이하’만 탑승하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씁쓸히 웃으며 재하에게 저 36개월이 36세 이하여도 못 탄다고 했다. 방귀도 새 나가고 모형차도 못 타 다니 마음이 더 아팠다.
제주도에는 박물관에 꽤 많다. 아마 인구수 대비로 전국 수위권일 것이다. 다만 양에 비해 질은 그다지 담보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주로 소장품의 이름보다는 주변 풍광이라든지 그냥 아이디어로 승부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소장품과 아이디어, 주변 환경과 전시관 분위기가 제일 좋았던 곳은 대정읍에 있는 「추사관」이었다. 제주 살 때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러 종종 가곤 했었다. 다만 재하는 그런 거에 관심 있을 리 없으니 자동차 박물관도 좋은 선택이었다. 소장품 수준이나 수량으로는 제주 제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동차 박물관에는 교통체험 형식으로 전기 모형차를 타고 한 바퀴 돌 수 있는 시설도 있었다. 나와 재하는 그걸 타고 박물관을 한 바퀴 돌았다. 재하는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내린 후 더 타겠다고 하면서 한참 울었다.
점심때가 좀 지나 밥을 먹으러 갔다. 무얼 먹을까 하다가 제주 왔으니 갈치조림 먹으러 가기로 했다. 지금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 안덕 부근에서 갈치조림을 먹으러 간다 치면 현지인들이야 자기 괸당(자기 친한 모임)이 운영하는 밥집을 갈 것이고, 외지인이라면 근처에서 제일 유명한 곳을 갈 것이다. 보통 모슬포 항에 있는 「덕승식당」을 많이 간다. 나는 그곳에 세 번 갔었다. 첫 번째는 2010년에 친구들과 갔었다. 도근이가 갓 잡은 갈치로 만든 ‘갈치조림’을 먹어야 한다며 새벽부터 깨워 제주시내에서 모슬포로 50km를 달려서 갔다. 그때 우리한테 왜 갓 잡은 갈치를 주겠냐고 정신 차리라고 했었는데 제주 와서 살아보니 더 그럴 리 없겠다 싶었다. 두 번째는 대학원 때 과 답사를 제주로 왔었을 때였다. 그때는 방어회도 곁들여 먹었는데 내 자리는 교수들 옆이라 생선에서 아무 맛이 나지 않고 고무 씹는 것 같던 기억이 있다. 세 번째는 아내 지인들이 왔을 때였다. 남녀노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가서 그냥저냥 괜찮았다. 아이들도 갈치 잘 먹었다. 이런 것만 봐도 그 식당 맛이 사실 굉장히 보편적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장사가 잘 되는지 갈 때마다 별관이 하나씩 늘어나는 듯했다. 그 외에도 갈치조림 먹으려 무난한 곳들은 「유리네 식당」 이나 「제주미향」 같은 곳들이 있다. 이런 데 가면 한 끼를 망하지는 않는다. 맛이 육지에 있는 식당과 별다른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인지 현지인들은 잘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외지인들을 완전히 토속적인 곳으로 데리고 가면 이게 무슨 테러냐는 눈초리를 받게 되니 이건 나름의 딜레마이다. 예를 들어 내가 다니던 직장 옆에는 제주 토속음식인 ‘각재기국’을 파는 「신수성해장국」이라는 곳이 있었다. 각재기 국은 전갱이에 배추나 무를 넣고 끓인 음식이다. 술을 많이 마시는 제주 사람들은 숙취를 이 각재기 국으로 해장하고는 하는데 이 해장국 집은 동네에서 꽤 유명한 지역 맛집이었다. 내가 그곳에 처음 갔을 때 다들 땀 흘리며 맛나게 먹고 있는데 나 혼자 ‘이 정체모를 소금국은 뭐지’라고 당황했던 적이 있다. 1년쯤 지나서야 나름 중독성이 있어 나도 즐겨 먹게 되었었다. 외지에서 친구 하나가 와 제주의 참 맛을 느끼고 싶다고 하기에 데리고 갔더니 1년 전 내 눈빛을 그 친구의 눈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 친구도 이 국의 정체가 무엇인지 묻고 있었었다. 아무튼 이야기가 많이 샜는데 우리는 제주 간만에 왔으니 현지 맛을 느껴 보기로 하여 덕승식당이 아니고 예전 한 도민이 추천해주었던 「삼거리식당」이라는 곳을 가기로 했다. 블로그에 검색해보니 여기도 이제 사람들이 종종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가서 갈치조림을 시키니 구이 조각도 주길래 그것으로 재하를 먹였다. 김치는 제주 토속 김치였다. 제주 김치를 처음 먹었을 때 당혹스러웠던 것은 김치의 상태였다. ‘아니, 왜 음식점에서 대놓고 먹던 것을 주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원래 제주 김치는 양념을 적게 하여 많이 빨갛지 않고 살짝 마른 느낌이라고 했다. 현지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좋게 말하면 배추 본연의 맛을 살리고자 한다는 거였고 나쁘게 말하면 섬이라 고춧가루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했다. 판단은 알아서들 하시는 거지만 확실한 건 먹다 보면 이것도 계속 생각난다. 입 끝에서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약간 걸리는 듯한 느낌이 자주 떠오른다. 그나저나 제주에서 몇 년 살지도 않고 제주 이야기를 계속하니 통계학과 학부생이 교양통계를 들으며 으쓱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내가 그랬다. 그때도 으쓱하고 20년 지나도 으쓱하니 이 으쓱병은 고질적이라 못 고치는 것 같다. 삼거리식당 갈치조림은 양념도 자극적이지 않고 부담 없이 맛있었다. 주변에 산다면 종종 갈 그런 곳이었다. 우리는 다 잘 먹고 나왔다. 시간은 두시쯤 되었을 때였다. 재하가 눈을 비비길래 졸린 줄 알고 숙소로 일단 돌아왔다.
웬걸, 역시 페이크였다. 우리는 피곤하고 잠 와 죽겠는데 재하는 방에서 다시 뛰어다녔다. 이럴 거면 그냥 밖에서 놀다 올 걸 싶었다. 아내도 여독으로 인하여 병이 난 것 같아 일단 내가 호텔에 있는 놀이방에 가기로 했다. 놀이방은 크고 쾌적했다. 일요일 오후의 영향인지, 코로나 때문인지 사람은 우리 밖에 없었다. 프런트에는 어린 남녀 알바생들이 있었다. 제3자가 느끼기에도 분위기가 아주 달달했다. 보기에 좋았다. 저분들도 어서 잘 되어 낮잠 같은 거 자지 말고 애랑 놀이방 왔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한 시간 정도 놀았더니 다른 친구가 하나 들어왔다. 재하는 혼자 커서 그런지 외부 아이들만 보면 당황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래의 남자애가 같이 놀자고 쫓아다니니 도망 다니다 내 뒤에 숨었다. 이럴 때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우리 딸이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따로 놀까?」
라고 한다면 무슨 극성 아빠 같을 거였다. 결국 재하는 혼자 놀고 그 아이는 나랑 노는 황당한 광경이 되었다. 딸을 두고 남의 새끼랑 놀다가 이 어이없는 상황을 깨달은 나는 그쪽 부모에게 니네 아들은 니네가 보라는 눈빛 공격을 마구 날렸다. 그분들은 뜨끔했는지 아이를 데리고 갔다. 재하와 방으로 돌아오니 아내는 자고 있었다. 아직도 아픈 모양이었다. 아내는 꼭 여행 다음 날 앓아눕는다. ‘아니, 이럴 거면 여행을 왜 오자 해서’라는 눈빛 공격을 여기서도 또 날렸다. 마음이 통했는지 아님 등이 따가웠는지 잠에서 깼다. 이제 자기가 좀 보라며 딸을 넘겨주었다. 그랬더니 천천히 일어나 냉장고에서 바나나 우유를 꺼내 재하 입에 물려주고 티브이를 보여주었다. 아 저렇게 애를 보면 되는구나 다시금 깨닫게 되는 면이 있었다. 심지어 재하는 가공유 먹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 마디 했다.
「쮸쮸 아가 먹어. 쟤 바나나 우 먹」(엄마 젖은 아기들이나 먹는 거고 나는 바나나 우유 먹지롱)
아마 색깔이 비슷해서 얼마 전 끊은 쮸쮸가 생각났었나 보다.
재하는 다섯 시가 넘어가자 피곤한지 울면서 잠투정을 했다. 어제 비행기 타면서 차에서만 잠깐 잔 후 밤에 전화기랑 늦게까지 놀다 오늘 일찍 일어났으며, 오늘도 아침부터 움직이고 좀 전까지 놀이방에서 뛰면서 낮잠 빼먹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빨리 나가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아무 고깃집을 가자고 했다. 차에 탔을 때만 해도 ‘꼬!! 꼬!!’ 하면서 웃었는데 3분 만에 도착한 고깃집 앞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극한까지 버티다 기절한 것이었다. 주차 안내를 해주시는 분이 다가왔다. 발레파킹을 해주겠다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기가 방금 잠들었어요」라는 말을 듣자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래도 관광제주답게 나가는 길도 친절히 인도해 주었다.
애가 잠들어 밥도 먹지 못하고 돌아오자 모녀 수발에 지치고 배도 고팠던 나는 승질이 났다. 아내가 뭐라 말을 붙여도 대답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재하가 일찍 잠든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었음에도 분위기가 약간 험악해졌다. 지혜로운 아내가 예산 외에 긴급 추경을 해서 숙성회와 성게알 초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중문관광단지에 「이공이시」라는 일식집이 있는데 이곳에서 음식을 포장해왔다. 숙성회도 맛있지만 그 정도는 다른 곳에서도 먹을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면 성게알초밥은 독보적으로 맛있었다. 성게알을 김이나 감태에 싸 먹었는데 입에서 살살 녹았다. 빡침도 함께 녹았다. 아내가 4조각만 시키자 했는데 내가 그 정도로는 기분 안 풀린다며 6조각을 먹자 했었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사케 같은 걸 곁들여 먹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우리 부부는 술을 하지 못하기에 그건 아쉬웠다. 다음에는 꼭 12피스 시켜 먹자고 했다. 다만 가격은 좀 쌨다. 6P에 48,000원이었다. 괜히 추경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럴 만했다. 후회도 없었다. 하루의 피곤이 풀렸다. 오늘 한 일중에 제일 현명했다. 재하는 깨지 않고 다음날까지 내내 잤다. 우리는 다시 물 낭비를 하며 반신욕을 했다. 그리고 아이와의 즐거운 하루는 왜 꼭 눈물로 마무리되는지 궁금해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