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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Mar 29. 2022

동백꽃 질 때 제주에서는

제주5박6일체류기-3

아침밥을 든든히 먹었다.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지만 ‘테마파크’라는 말이 주는 압박감이 어마무시했다. 여기저기 검색해 본 아내가 그렇게 넓지는 않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럼 이동의 밀도가 높을 것이기에 혹시 재하를 내내 안고 다닐 나에게는 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침식사 때만이라도 걸어가라고 했건만 재하는 계속 「아아앙」이라는 안아달라는 건지 그냥 괴성을 내는 건지 모르겠는 소리로 아빠를 괴롭혔다. 악덕 딸은 식사 때도 안겨 갔다. 이래서 한번 호구 잡히면 끝까지 호구라는 말이 있나 싶었다. 내 육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재하는 뽀로로 공원에 간다는 말에 신나 있었다. 요새는 뽀로로 캐릭터를 이름도 직접 불러가며 그 일당들과 노는 재미가 붙었다. 들리는 얘기에 ‘뽀로로’라는 발음을 제대로 하게 되면 그때는 뽀로로와 멀어진다고 하는데 우리 딸은 「뽀오」 이렇게 얘기하니 아직 한참 더 같이 놀아야 할 듯했다. 처음에는 자유이용권을 살까 3개 이용권을 살까 고민했었다. 사람이 많으면 몇 개 타지도 못할뿐더러 재하는 키가 이제 90cm 좀 넘기에 탈 수 있는 게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엔 100cm, 110cm 이런 식으로 신장에 따른 이용제한이 있다고 했다. 아내가 여기저기 덕질을 하더니 3개 이용권 하고 비슷한 가격의 자유이용권을 찾아냈다.     



중간에 길을 잘 못 들어 한 바퀴를 돌았다. 가기 싫은 내 무의식이 투영된 듯했다. 오솔길과 그냥 길 사이 정도의 도로를 타고 가다 보니 오른쪽에 카멜리아 힐이 보였다. 이름 그대로 동백꽃이 많은 식물공원이다. 아내와 연애시절 놀러 왔었다. 예전 아내는 작고 귀엽고 참 착했는데, 현재는 크고 용맹하고 많이 무섭다. 그래도 그녀를 향한 사랑이 더 커져 있는 건 유무형 폭력을 통한 길들이기가 얼마나 무서운 지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동백꽃은 한반도 남부에 자생하는 붉은 꽃이다. 이 꽃을 상징으로 하는 지역들이 많지만 제주도에서도 동백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제주에서 동백은 4·3 사건의 희생자를 표상하고 있어서 그렇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1992년 제주출신 강요배 화백이 4·3 사건에 대한 전시를 열면서부터 시작됐다. 강 화백은 붉은 동백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4·3 사건으로 인하여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붉은 피로 비유하며 전시 화첩 제목을 「동백꽃 지다」로 지었다. 이후 동백꽃은 4·3 사건의 희생자를 기리고 알리는 상징이 되었다. 강요배 화백의 이름이 독특한 것도 4·3 사건과 관련이 있다. 그 사건 때 동명이인들이 검증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자 이를 조금이나마 방지하고자 부모님이 독특하게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강 화백의 형 이름은 거배이다.    



동백꽃 (출처:제주특별자치도의회)



제주 4·3 사건에 대한 대표적인 기념관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너븐숭이 4·3 기념관」이고 다른 하나는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제주 4·3 평화공원」이다. 너븐숭이 기념관은 북촌대학살의 실제 장소 위에 지어졌다. 북촌대학살은 제주를 대표하는 소설가 현기영 작가가 쓴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된 사건이다. 이 학살로 인하여 북촌리 1,500명의 인구 중 5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여기에 가면 4·3 사건 때 희생된 어린아이들의 무덤인 애기무덤 20 여기가 있다. 어른 희생자의 경우 사건이 끝난 후 이장되기도 했지만 연고가 없었던 아이들은 임시 매장된 채로 한참 남아있었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2000년대 들어 4·3 사건 추모 사업들이 진행되면서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참혹했던 현실을 기억하고자 애기무덤들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자 한 것이다. 가보면 아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장난감들이 조각되어 있거나 비석 주변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주 4·3 평화공원」은 한라산 중산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왜 여기에 있느냐에 대한 말은 이 공원이 만들어질 때부터 있었다. 원래 정해졌던 곳에 이런저런 문제제기(쓰레기장이 가깝다거나 4·3과 실제적 연고가 없다거나)가 생기자 옆 블록으로 옮겨 현재 장소에 조성하게 된 것이다.



비설(출처:비짓제주 VISITJEJU - 제주도 공식 관광정보 포털)


 평화공원에 가보면 ‘비설’이라는 조각상이 있다. 변뱅생이라는 분이 학살을 피해 두 살배기 딸과 함께 거친오름(지금 공원이 위치하고 있는)을 오르다 토벌대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제작된 작품이다. 이 비극이 일어난 곳에 공원을 만들었다면 의미가 괜찮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에 공원을 짓기로 결정된 이후 이런저런 사정들을 찾다가 사후에 발굴된 이야기이다. 그래서 개관할 때 이야기 진위에 대한 시비가 있기도 했다. 어쨌든 4·3 평화공원에 가보면 너븐숭이 기념관과 공기가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너븐숭이 기념관은 붉은색을 주로 사용하여 진하고 적극적이라면 4·3 평화공원은 흑백 구도에 단순한 여백을 가진 느낌이다. 원래는 난징대학살 기념관처럼 학살터를 그대로 재현하는 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오히려 희생자의 존엄에 해가 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아 아우슈비츠 기념관과 비슷한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고 했다. 자문위원이었던 한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부담 없이 오다가다 여러 번 방문할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확실히 4·3 평화공원이 둘러보기 더 편안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 너븐숭이 기념관을 가면 강렬한 이미지가 뇌리에 계속 남아 있게 되지만 한번 더 가기에는 왠지 무섭고 죄책감이 들게 된다. 어린 딸 키우는 아빠로 아이들이 너무 가여워 보기 어렵기도 하다. 다만 아우슈비츠 추모관은 일부러 버스가 오가는 곳에 설치되어 일상의 추모와 악의 평범성을 경고하는 그런 의미로 지어진 것에 비하여 4·3 평화공원은 거의 자차로 와야 하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이런 연유들로 인하여 제주가 「평화의 섬」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주 곳곳에 ‘평화’라는 말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이래서 그런 것이다. 이런 참혹한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것을 ‘다크투어리즘’이라 한다는 데 언젠가는 재하와 함께 제주 곳곳을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로 돌아가야겠다. 카멜리아라는 말에 꽂혀서 말이 많았다. 카멜리아 힐에서 30초 정도 더 가니 「뽀로로&타요 테마파크」가 나왔다. 크기가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았다. 저곳에 얼마나 많은 역경과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뽀로로 파크는 잠실에도 있다는데 제주까지 와서 이래야 하냐는 생각도 들었다. 뽀로로 괸당들이 해녀복장이라도 입고 있냐는 못된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렇게 당신을 언짢게 하는 말들을 싫어해서 그랬다. 입장을 하니(역시 안겨서) 뽀로로 인형을 쓴 직원들이 딸을 맞아주었다. 재하는 머뭇거리다 사진을 찍었다. 내가 ‘감사합니다’라고 하자 귀여운 루피 탈을 쓴 직원이 굉장히 남자다운 목소리로 ‘즐거운 관람되십시오’라고 속삭였다. ‘너 오늘 x 됐어’로 들렸다. 밖의 정원은 둘러보기 좋게 되어 있었는데 날씨가 은근 바람이 불어 일단 실내로 들어갔다. 안에는 뽀로로 마을이 꾸며져 있었다. 사물함에 짐을 넣느라 내가 라커룸에 간 사이 재하는 각종 캐릭터들과 빠지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일단 장소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셋 중에 둘이 행복하면 되었다.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나를 제외한 두 분은 강행권과 거부권을 다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둘 중에 누구의 의견이 더 상위법령이고 우위냐는 문제가 있지만 그건 내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사안이라 언급하지 않겠다.     


저 루피가 나에게 경고했음


놀이기구는 한 7~8개쯤 있었다. 그림 그리기라든지 옷을 입어본다든지 가상현실 같은 체험 프로그램들도 있었다. 월요일이라 사람들이 적었다. 아내가 나를 보며 날짜 조정하기를 잘했다고 흡족해했다. 의견 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더니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하라 했다. 놀이기구는 원 없이 탈 수 있을 것 같아 자유이용권 끊기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중간에 뛰어나가 자유이용권을 끊어 돈이 두 배로 들 뻔했다. 키 때문에 반 정도는 이용하기 어려웠다. 제일 하이라이트로 보이는 어린이 롤러코스터가 있었는데 그걸 탈 수 없어서 아쉬웠다. 내가 대신 탈까 하다가 눈치가 보여서 그만뒀다. 재하는 유아 바이킹을 재밌게 탔다. 난 놀이기구를 굉장히 무서워한다. 놀이기구들을 보면서 ‘저걸 돈을 받고 타도 모자랄 판에 돈도 주고 한참 기다려서 탄다고?’라는 생각을 한다. 반면에 재하는 재미있어했다. 유아바이킹은 우리 부녀 수준에 딱 맞아 좋았다. 그 이후에 찻잔에 들어가서 크롱이 던져주는 공 잡는 것도 타고 에디가 끄는 기차도 탔다. 개중에 재하가 제일 좋아한 것은 후룸라이드였다. 낮지 않은 높이에서 물로 떨어지는 데도 좋아라 했다. 물이라도 튀기면 깔끔한 성격에 그만 타자했을 텐데 어찌 각도를 맞췄는지 별로 젖지도 않았다. 재하는 그걸 스무 번쯤 탔다. 줄을 서고 또 섰다. 사람이 약소하게 있는 데다 우리 부부가 번갈아 줄을 서서 재하를 태웠다. 오후가 되니 사람이 더 없어져 내리지 않고 몇 바퀴 그냥 돌았다. 안내해주는 젊은 남자 직원이 재하가 귀여웠는지 ‘선생님한테 안녕 한 번 해줘’를 여러 차례 했는데도 딸은 도도하게 씹었다. 그러다 ‘선생님한테 인사하면 한 바퀴 더 돌려줄게’라는 말을 듣자 세차게 팔을 휘두르며 '안녕' 해줬다. 참으로 실용적인 성격이었다.     


문제의 후룸라이드


중간중간에 아까 건장한 목소리로 경고해준 루피와 뽀로로가 공연을 했다. 그 시간에는 놀이기구 안전점검을 하고 직원들이 약간 휴식을 취하는 것 같았다. 루피와 뽀로로는 10분 정도 율동을 했다. 아주 프로페셔널한 공연은 아니었다. 그래도 저 탈을 쓰고 춤을 추는 난이도를 생각하면 박수가 절로 나왔다. 예전에 어느 행사에서 탈을 쓰고 아이들과 놀아주다 너무 힘들어 화장실 가서 토한 적이 있었다. 먹은 걸 다 게우고 나와 힘이 없던 나를 아이들이 밀어 쓰러뜨린 후 집단 폭행을 했던 기억이 있다. 주변에서 환호하며 좋아하고 있는 아이들이 언제든 그런 폭도로 돌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약간 경계가 되었다.     



점심은 뽀로로 파크에 있는 식당에서 먹었다. 대표 메뉴는 당연히 돈가스였다. 우리는 돈가스 하나 어묵우동하나를 주문했다. 아내가 자기는 핫도그 먹을 거라며 조금만 먹겠다 하여 두 개만 시켰다. 돈가스가 없었다면 이 세상 수많은 구내식당은 무엇을 내놓았을까 싶었다. 일본 자체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돈가스를 만든 것 하나는 인정해줘야겠다 싶었다. 뽀로로 돈가스 품질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싸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애들한테 먹을 걸로 장난치지는 않았다. 제주에 있는 구내 도서관 돈가스들보다 나았다. 제주에서 시험 준비를 할 때 공부를 핑계 삼아 이 도서관 저 도서관을 돌아다녔었다. 공부하는 척도 하면서 제주 구경도 하는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다 개인적으로 한라도서관 밥이 맛있어 거기 정착했었었다. 지금은 주인이 바뀌었는지 네이버 평점이 3.6으로 별로라고 나와 있다. 우당도서관 밥은 사료와 급식의 줄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있어 이건 진짜 못 먹겠다 싶었었다. 그때만 해도 아내에게 미각 수업을 받기 전이라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다고 할 때였다. 군대에서 조기 튀김이 나와도 잘 먹었고 학교 학관식당에서도 잘 먹었었다. 아내는 학생회관 밥 한 번 먹어 보고는 다시는 안 간 사람이었는데 나는 거기가 맛없다는 걸 전혀 몰랐다. 그녀는 항상 남편에게 빙글거리며 이야기한다.

「내가 아니었으면 자기는 맛이라는 거에 10%만 알고 갔을 걸」

그랬던 내가 우당은 못 가겠다고 했으니 맛이 좀 그랬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 우당도서관 구내식당이 네이버 평점 4.5의 맛집으로 변해 있었다. 리뷰에 맛집이라고 자기는 꼭 여기에서 먹는다는 사람도 있으니 진짜 궁금해 한 번 가보자 하고 싶었지만 한 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아내에게 귀싸대기를 맞을까봐 하지 않았다. 사실 가 본 곳 중에 제일 맛 구내식당은 서귀포 삼매봉 도서관이다. 여기는 꽤나 괜찮아서 블로그에도 꽤 여러 사람이 소개하고 있다. 도서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제주는 도청에서 운영하는 곳과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곳이 달라 책 반납할 때 확인해야 한다. 안 그럼 두 번 발걸음 할 수 있다. 내가 그랬다.  


   

재하는 반찬은 먹지 않고 맨밥에 주스를 말아먹었다. 비위가 좋아 보였다. 우동은 아내가 맛있다며 남편에게 김치까지 여러 번 가져오라고 하면서 싹싹 잘 긁어먹었다. 돈가스는 내가 먹었는데 밥은 재하 다 주고 고기튀김만 먹어 목이 메었다. 밥 먹고 관람차도 타보았다. 멀쩡한 모녀에 비하여 나는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뭐 이런 걸 타자고 하냐며 괜히 신경질이 났다. 기운을 차린 딸은 바이킹, 찻잔, 후룸라이드를 골고루 탄 후 미끄럼틀과 트램펄린, 공이 가득한 풀이 있는 키즈카페 같은 놀이방에서 혼을 불살랐다. 아직은 쫓아다녀야 하는 나이니 그걸 따라다니는 나도 온몸이 불에 타는 느낌이었다. 아내는 제주 온 후 두 시간에 한번씩 방전이 되어 내가 많이 놀아줘야 했다. 거기에 뛰고 있는 아이들은 지치지 않았다. 세계수 옆에 서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넘치는 생명 에너지에 숨이 막혔다. 아내가 충전한 후 교대해 주면 휴게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는 아빠들이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보던 모습이었다. 땀에 젖은 옷, 가지 않는 시간, 초점 잃은 눈동자, 떨리는 손발까지 똑같았다.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 일이 있다면 서로에게 마음으로 전했다.

「힘내라 전우야」.     


집에 안 간다...아니 호텔에 안 간다


재하는 밥 먹고 정확히 세 시간, 과장 없이 세 시간을 뛰고 피곤하다며 집에 가자했다. 번복 못하게 되묻지도 않고 옷에 애를 둘둘 말아 빨리 나왔다. 호텔로 돌아갈까 하다가 어제 당한 경험이 있으니 한 곳 더 가기로 했다. 어디를 갈까 하다 근방에 있는 「오설록 티뮤지엄」을 가기로 했다. 제주 여행 간다고 재하 관계자들이 이런저런 찬조도 해주시고 하여 그분들에게 선물도 사야 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제주에 왔다가 갈 때 딱히 사갈 것이 없다. 귤이나 갈치는 양이 커서 택배를 보내야 하고, 고등학생도 아니고 돌하르방을 사기도 그렇고, 감귤초콜릿도 하루 이틀이다. 내가 생각하는 제주 최고 특산품은 감귤라이언, 해녀라이언이긴 하지만 그건 가격이 세다. 그럴 때 딱 좋은 것이 차 기념품이었다. 함께 제도권 교육을 받아서인지 우리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나 보다. 오설록은 사람이 미어지고 차도 넘쳤다. 제1,2,3 주차장 모두 가득했다. 돌다가 옆 오소록한 길가에 그냥 세웠다. 장사가 정말 잘 되는지 증축한다며 공사도 시작하고 있었다. 예전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와 같은 라떼 이야기를 하며 재하를 안고 오설록으로 향했다. 재하는 피곤하고 날은 따뜻하고 둥실둥실 흔들려 리듬도 타는 삼박자에 맞춰 졸고 있었다. 들어갔더니 사람이 바글바글 했다. 코로나가 선호할 분위기였다. 복도 탁자 하나가 운 좋게 비어 자리를 잡았다. 나는 재하를 안고 있고 아내는 아이스크림과 선물을 사러 갔다. 녹차 아이스크림과 우유 아이스크림, 녹차 카스텔라를 야무지게 사 왔다. 아까 어묵우동만으로는 모자랐나 싶었다. 잠자는 공주님은 우유 아이스크림과 키스를 하자 눈을 번쩍 떴다. 다른 건 먹지 않고 우유 아이스크림만 먹었다. 나는 여기보다 이시돌목장 우유 아이스크림이 더 맛있다며 다음에 거기를 가자했다.    


 

사람이 많아 먹고 서둘러 나왔다. 그 와중에도 관광객은 땅에서 솟아나는지 계속 들어왔다. 우리는 예전에 여기 땅 거저였을텐데 하며 이곳을 지으신 분의 이재에 대한 안목을 칭찬했다. 이 오설록에서 조금 더 가면 모슬포 항이 있다. 어원이 ‘못 살 동네’에서 나왔다는 게 정설일 정도로 원래 이곳은 바람도 무지하게 부는 척박한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때는 한양 3천 리 밖으로 내치는 역적 정치범들이나 오는 곳이었다. 오죽하면 경국대전에 중죄인 말고는 제주 보내지 말라는 말이 있을까. 여기 온 사람들을 보면 광해군, 송시열, 김정희, 최익현 등 유명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 북에서만 오지 않고 남에서도 가끔 온다.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이 그 대표적이다. 그 양반은 일기에 여기 사람들이 밥을 안 준다고 불평을 했었다. 사실 지역민들도 그나마 나는 걸 중앙에서 다 뺐어가 주고 싶어도 못 줬을 것이다. 제주 사람들이 다소 배타적이긴 해도 배고픈 사람 굶길 정도로 독하지는 않다. 예나 지금이나 빈부격차는 변함없어 하층민들은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죄인들 먹인다며 투덜거렸지만 지역 토호들은 유배 온 이들에게 딸을 첩으로 넣어가며 중앙과 끈을 만들기도 했다. 그랬었다는데 뭐 지금이야 국제학교도 생기며 나름 교육도시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국제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이나 국제학교에 다니는 형제자매를 둔 학생들이 늘면서 현지 학생, 교사와 마찰을 빚기도 한다. 수도권 지역의 학교들과 비슷한 커리큘럼을 요구한다나? 한 업계 관계자는 사석에서 이런저런 예시를 들면서 「아니, 그럴 거면 서울로 다시 가지 왜 여기 와서 난리들인지」라는 투덜거렸던 적도 있었다. 물론 불평을 제기하는 쪽도 나름 사정 이 있으니 그랬을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내가 살던 노형동도 이주민과 원주민 간 교육문제가 발생한다고 하니 이런 갈등은 이주민들이 많은 곳의 숙명인가 싶다.     



재하는 하루 종일 놀다 와서인지 씻고 멍하니 페파피그를 좀 보다 잠이 6시쯤 들었다. 저녁도 먹지 않았다. 아마 안 깰 듯싶었다. 우리도 기운이 없어 나가 삼겹살 하나 포장해와서 먹었다. 내일은 감귤체험을 해야 하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했는지 농장에 노예로 끌려가서 울며 귤을 따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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