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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독립을 꿈꾸며

<두 여자의 집>30대 딸과 60대 엄마의 아옹다옹 일상 돋보기

34년 동안 혼자 살아본 적이 없다. 여행갔을 때, 출장갔을 때, 친구집에서 자고 왔을 때, 연수갔을 때 등 집을 나가있던 모든 날을 끌어모아도 그 기간이 6개월이 안 된다. 딱 한 달, 연수간 선배네 집에 월세내고 들어가 살았을 때가 있었는데 그게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다. 지난 일요일 엄마가 1박2일로 수녀원에 피정을 간다고 말해주었을 때 나는 정말 기뻤다. 

 엄마는 낮 12시 30분 점심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집을 나갔다. 드디어 이 집에 나만 있다니. 다음날 아침에 출근해야겠지만, 일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혼자 집에 있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급격하게 좋아졌다. 뭘해야 이 자유로운 시간을 충만하게 보낼 수 있을까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일단 샤워를 했다. 

  조용한 집안에서 쇼파에 앉아 '미라클모닝'이라는 자기계발서를 펼쳐보았다. 아는 언니가 선물해준 자기계발서인데 반년은 읽지 않았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면 더 열심히 살아야할 것 같아 부담된다) 아침 6분이 인생을 바꾼다는 조언이 빼곡히 실려있었다. 하긴 어영부영 흘려보내는 아침 시간이 얼마나 많던가. 나는 출근 준비에만 1시간 30분이 걸리는 날이 있는 걸 알고 반성했다. 

  9월의 시작이기에 그 책의 내용은 내게도 의미있게 다가왔다. 저자는 자신처럼 아침에 운동을 하고 일기를 쓸 것을 추천했다. 하지만 그날 써야 하는 기사 발제를 해야 하고, 그날 해야 할 기사 마감이 있는 나로서는 저자처럼 조깅을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일기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 전에 드문드문 일기를 쓰고는 있지만 잘 이어가지 못 하고 있어 자책하던 터였다. 그래, 가을부터는 아침시간을 잘 활용해보자고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한 일은 일기장과 필통 등을 사러 나간 일이었다. 내일 사도 되지만 꼭 이날 사고 싶었다. 곧 

옷장에 들여놓아야 할 여름 린넨 원피스를 달랑 입고 집을 나섰다. 집 앞에는 서울에서 가장 큰(?) 지하상가가 있는데 없는 게 없다. 꾹꾹 눌러 곱게 내 마음을 기록할 일기장을 사고, 가방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펜을 정리할 작은 필통도 샀다. 저녁에 마실 맥주와 어울리는 안주도 샀다. 

 역시 엄마가 집에 없으니 저녁은 맥주로 충분했다. 오랜만에 요리를 해볼까 했지만 귀찮았다. 전에는 혼술하며 자주 안주도 만들어 먹고 그랬지만 요즘 나는 그럴 기분이 아니다. 좋은 음식을 차려 먹는 게 필요할까란 생각도 한다. (사 먹는 건 좋아한다) 

 상에는 슈퍼에서 사 온 쥐포 몇 개, 과자 한 봉지를 꺼내놓았다. TV보면서 흥얼거리며 짜고 매운 부실한 안주와 시원한 맥주를 먹는데, 그게 내겐 최고의 만찬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내가 어깨춤을 췄던가, 덩실덩실 온몸으로 춤을 췄던가 모르겠다. 그러고 뒹굴거리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TV도 켜놓고 잠들어 새벽에 꺼야했지만. 

  엄마가 집에 없어 가장 좋은 순간은 아침 일찍 눈을 떴을 때였다. 아직 모두가 깨어나기에는 이른 시간의 평온함이 나는 참 좋다. 엄마보다 일찍 일어난 적이 거의 없는 나는 아침의 부산함, 분주함이 언제나 부담스러웠다. 전날 다짐한대로 간단한 맨손체조를 하고 일기를 썼다. 오는 가을을 보람있게 보내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전날 집안 곳곳 흘리고 다닌 내 흔적을 정리를 좀 하고 부엌으로 갔다. 아침을 간단히 차려먹고 설거지를 하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서기까지, 나는 혼자 살면 이렇게 부지런해야겠구나, 부지런하게 살면 좋겠는걸, 이라고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지방 출신의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그 친구들은 매일 엄마가 그립고 엄마밥이 그립고 동네가 그리웠을테지만 나는 그런 그리움을 품고 사는 삶이 그리웠다. 혼자 살면 밥 해먹고 빨래하고 청소하느라 지친다는 친구들 말을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혼자서 해내는 삶을 부러워했다. 만 하루도 안 되는 시간 집에 혼자 있어보니 느낀 건 나는 역시 혼자 살면 잘 살 것 같다는 깨달음이었다. 독립하면 안 되냐고? 돈이 없다. 내 돈이 이 집에 묶여 있다. 아직은 엄마에게 얹혀살고 있는 늙은 캥거루이지만, 난 오늘도 내 인생의 또 한 번의 화양연화를 기다리며 독립을 꿈꾼다.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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