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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하 Norway Oct 13. 2024

노르웨이 가을, 길을 걷는 법

아티스트 웨이 - 아티스트 데이트


가을이에요. 노르웨이에도 가을이 왔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20분 정도 산책을 합니다. 보통은 하늘을 보며 걷는데 요즘은 땅을 더 많이 봅니다. 낙엽들의 색깔, 모양이 하나하나 다르고 길바닥에 제각기 자리 잡은 모양새를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낙엽이 떨어진 길을 걸으면 걸음, 걸음마다 바람결이 만들어져요. 그러면 낙엽들이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부스스 흔들리지요. 낙엽들의 아침을 깨우는 것 같아서 묘한 웃음이 지어져요. 일부러 낙엽이 쌓인 곳들만 밟으며 걷기도 합니다. 스스슥 거리며 부비는 소리가 이부자리에서 칭얼거리는 아이같기도 합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또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젖은 낙엽과 축축한 아스팔트의 차가움이 발끝에 전해지고,  가려둔 발목에 아침 공기가 차올라요. 가끔은 진해진 색깔로 신발 위에 안착한 낙엽 하나가 제 발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기도 합니다. 안아달라고 칭얼거리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저는 짧은 산책을 합니다. 노르웨이 숲길을 걷는 아침의 여유가 부러우시다고요? 고백하자면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20분입니다. 때로는 15분이 되기도 하고요. 시간이 순삭하고 지나가 버리는 아침이에요.


5년 전, 가족들의 일상을 챙기며 시작하는 아침이 싫어서 모닝 스트레칭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아침잠을 줄여서 내 시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조금 억울했는데, 그 수고를 5년 넘게 하다 보니 만족감이 꽤 크더라고요.


'나는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야, 나는 아침마다 나를 보살피는 사람이야.'


매일 아침 반복되는 미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점심 도시락을 싸야합니다. 가족 모두가 시간의 압박을 견뎌야 하는 아침이지요. 그 시간을 무사히 해내고 집을 나설 때, 비로소 길고 편안 숨을 쉴 수 있습니다. 길을 나선 어느 날, 생각했어요. 아침마다 걸어야 하는 이 길이 가야 하는 길이 아니라 나를 위한 길, 걷고 싶은 길이었으면 좋겠다.


‘빠듯한 시간과 변덕스러운 날씨를 탓하고 싶지 않다. 그 모든 것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아침을 가지고 싶다.‘


그래서 줄리아 카메론이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에서 알려준 방법을 살짝 비틀기로 했어요. 시키는 대로 하는게 아니라 나에게 맞는 아티스트 데이트를 하기로 했지요. 일단 집을 나서는 순간, 바로 '아티스트 데이트'를 떠올립니다. 버스나 자전거를 타지 않고, 두 발로 정직하게 걷습니다.


'이건 아티스트 데이트다. 나와의 데이트다. 나를 보살피는 시간이다. 바람 소리와 새소리를 듣자.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고 나무를 보자. 나에게 매일 다른 아침의 풍경을 선물하자. 비가 와도 좋고, 바람이 불어도 다른 날이라 좋다.'


아티스트 데이트를 알게 되고, 아침 산책을 시작한 후에 처음으로 노르웨이 가을이 좋아졌어요. 이곳에 산 지 10년이 되었는데 이제서야 노르웨이 가을이 보여요. 항상 노르웨이 가을은 어둡고 축축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가을은 겨울이 오기를 견뎌야 하는 계절이라고.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가을은 창의적인 친구들로 가득한 계절이에요. 봄날엔 자그마해서 몰랐고, 여름엔 다 비스무리한 초록이어서 몰랐던 거죠. 가을이 되니 수 많은 잎들이 각기 다른 붉음과 노랑, 주황으로 그라데이션 능력을 뽑내요. 아티스트가 따로 없어요. 그렇게 각자의 색을 뽑내다가 결심이 굳혀지면 낙하를 시작해요. 그리고 마을길을 캔버스 삼아 매일 다른 그림을 그리지요.


사실은, 글을 쓰고 싶은 이유가 따로 있어요. 원래 ‘아티스트 데이트’를 제대로 하려면 그동안 하지 않았던 일, 하고 싶었던 일, 어린아이 같은 장난을 해봐야 하거든요. 오늘은 우연히 그 아이 같은 짓을 한 날이에요. 다니던 길 중간쯤에 발이 젖을까 피해 다니던 웅덩이가 있거든요. 오늘은 거기서 놀고 싶은 거예요. 들어갔다 나왔다를 해보고 빙그르르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발끝을 웅덩이에 넣고 사진을 찍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각도로요. 처음엔 프레임에 들어 온 낙엽과 물의 조화가 좋았는데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니 그 물에 하늘이 비치고, 나도 보였어요.


사진 속 나를 마주하고는 타임머신을 탄 듯 마흔의 나로 돌아 왔어요. 그리고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이 순간 기분이 좋았는지 나에게 질문했어요. 의식하고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나도 나를 잘 알 수가 없거든요.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계절을 더 예민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기뻤고, 가을에 태어났기에 이유 없이 가을을 좋아했던 아이가 나였다는 걸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나 이렇게 놀았어. 이렇게 놀 줄도 알아.'라며 뽐내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마을길 곳곳에 소복하게 낙엽이 쌓이고 있습니다. 오늘의 가을은 어제보다 더 소복해졌고, 내일의 가을은 오늘보다 더 소복해질 거예요. 곧 발목까지 가을이 차오를 것 같네요. 차오른 가을과 놀 거리를 또 찾아봐야겠어요.




아티스트 데이트는
돈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다.
꼭 지켜야 할 것은
시간을 낸다는 것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아티스트웨이>, 줄리아 카메론

시간이 없다면
해야만 하는, 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을
아티스트 데이트로 바꾸세요.
생각만 바꾸면 됩니다."
- 미니린. 노하작가.


함께 또 꾸준히 글을 씁니다.



작가 소개 : 미니린 (노하Kim)

뉴아티북클럽 출간작가 | 북유럽 노르웨이 거주 10년 차. 노르웨이와 한국 그 어디쯤에서 방황 중입니다. 어떤 일을 새롭게 기획하고, 함께 도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엄마, 작가, 샘으로 살았고 작가 크리에이터로 살고자 합니다. <노르웨이 엄마의 힘>, <전자책 글쓰기 셀프코칭> 등을 쓰고, 무엇이든 계속 쓰고 있습니다.


https://litt.ly/minirin_no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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