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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하 Norway Oct 27. 2024

2. 에지를 주는 법

노르웨이 책빵에서 쓴 글 


설산 중턱에 덩그러니 서서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내리막길은 나에게 너무 가팔랐고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나는 자라면서 눈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일 년에 절반 가까이 눈을 보며 산다. 10월이면 첫눈이 오고, 4월까지 눈을 치우며 지낸다. 


오랜만에 자연설에 스키를 탈 수 있다고 설레어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따라 야간 스키를 타러 갔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스키장이 3개나 있지만, 좀 더 긴 슬로프를 즐기기 위해 30분을 달려 꽤 큰 스키장에 도착했다. 산을 넘어가는 긴 리프트를 탈 수 있는 곳이다. 스키어들의 로망 북유럽의 이 멋진 스키장에서 즐길 여유가 없는 나는 대책 없이 서 있었다.  


스키장의 슬로프는 일반적으로 초보자용(그린), 초중급자용(블루), 중급자용(레드), 상급자용(블랙)으로 구분되는데, 색깔이 진할수록 경사도가 높고 난이도가 어렵다. 내 스키 실력은 풋풋한 그린이고 가끔은 블루도 괜찮은 정도인데 블랙 코스는 무리다. 나는 내 수준과 능력을 잘 판단하는 편이지만, 남편은 '할 수 있다, 그냥 하면 된다'고 하는 편이다. 내 실력을 뛰어넘어 도전하는 것이 적절할까? 그날의 결과는? 좌절. OTL


블랙 코스를 내려오다가 스키가 벗겨졌다. 그 자리에서 스키를 다시 신기에는 슬로프 경사가 너무 심했고, 급경사 바로 아래쪽이라 넘어지면 다칠 위험이 있었다. 부딪히면 큰일이라 급하게 가장자리로 피했는데, 그쪽은 눈이 얼어 있어서 스키를 다시 신기도, 나머지 한쪽을 벗기도 힘들었다. 주저앉아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고 애썼다. '스키를 벗고 이 경사를 걸어 내려가야 하나?', '스키 센터에 구해달라고 전화를 해야 하나?' 아이들과 남편은 이미 도착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수준급 스키어들이 속도를 줄이며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평소에 차갑게 보일만큼 낯을 많이 가리는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망설이지 않는다. "I'm OK. 아임 오케이. Det går bra. 데고 브라." 다친 것도 아니고 부끄러워서 괜찮다는 대답만 연이어했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는 거절할 틈도 없이 내 옆에 붙어 섰다. "한쪽 스키는 에지를 주세요. 그리고 다른 쪽 스키를 신으면서 내 팔을 잡아요."


아! 에지, 정말 중요하다. 스키 실력은 결국 에지 자유 자재로 다루는 것이다. 에지가 눈에 박힐 때까지 압력을 줘야 방향과 속도를 제어할 수 있다. 나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알지만 못하는 거였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있지 않나. 배운 것이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실력이 되려면 적절한 환경에서 무한한 연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모든 배움에는 나선형이든 계단형이든 단계가 있다. 무리해서 블랙 코스를 욕심 내어서도 계속 그린 코스에 머물러서도 안된다. 


요즘은 ‘2주 완성, 3개월 완성’을 내걸고 강의를 하는 곳이 많다. 2주 만에 이론 서적 1권을 끝낼 수 있겠지만 그것을 오롯한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3개월 만에 자격증을 딸 수는 있겠지만 전문가로 떳떳하게 나설 수는 없다. 몸으로 직접 경험한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조지 제러드의 <마스터리>에서는 마스터가 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좌절이나 지루함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나아가 즐겨야 한다. 

좋은 스승이 있어야 하고, 계속 도전하면서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좌절이나 지루함을 견디기 위한 자기 의지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운동을 해본 사람은 이 과정을 안다. 어린 시절 수영 선수 생활을 했는데 하루에 적어도 6킬로에서 7킬로 정도 수영을 했다. 얼마나 기본이 중요한지, 얼마나 많이 반복해야 하는지, 그리고 스스로 무엇이 나아졌고 부족했는지 운동선수들은 그것을 몸을 움직이며 터득한다. 책상 앞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호하게 권하고 싶다. 일단 한 가지를 몸으로 마스터해 보라고. 인생의 모든 배움이 이 과정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국이 아니라 노르웨이에 머물고 있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사교육 때문이다. 노르웨이 아이들의 사교육은 예체능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수학이나 영어 학원은 없다. 우리 아이들은 악기나 미술 대신 운동 코스만 골라서 다니고 있는데 지금 배우고 있는 종목 중에 하나 정도는 성인이 될 때까지 꾸준히 실력을 쌓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운동선수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배움의 과정을 몸으로 터득하게 하기 위함이다. 달리기나 자전거여도 좋다. 몸으로 할 수 있는 것 하나를 스스로 잘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나아가 10대 후반이나 20대 부터는 어떤 분야든 적어도 하나는 마스터가 되고 싶은 것을 찾았으면 좋겠다. 남들이 알아주는 것이 아니어도 괜찮다. 남들과 다르면 더 좋다. 그게 에지다. 


에지는 자신만의 장점과 특성이며, 독창성과 혁신성을 발휘할 수 있는 무엇이다. 성공적인 배움에는 조지 제러드가 말한 좋은 스승, 피드백, 자기 의지 외에도 '나만의 에지'가 필요하다. 비슷한 실력으로 운동선수를 했더라도 은퇴 후 삶의 방향은 스스로의 에지를 얼마나 잘 세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에지는 우리들의 생김새 만큼이나 모두 다르게 발전시킬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삶이 끝나는 날까지 배우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불행이다."라고 했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배울 게 없거나, 배울 게 있어도 거부하면 그만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이가 들수록 거부하려고 해도 배워야 할 것이 (자의보다) 타의로 더 많이 생긴다. 그러니 배움을 즐겨보자. 모든 배움은 필연적으로 정체기, 좌절, 지루함을 지니고 있는데 이건 배움의 디폴트다. 그러니 그 디폴트까지 옵션으로 즐기자. 그리고 절대 잊지 말자. 나만의 에지! 나만의 에지를 찾고 그것을 자유 자재로 다루는 연습은 필수 옵션이다. 




프롤로그 - 인생 부도

1. See Far! (멀리 보라!)

2. 에지를 주는 법 (How to Sharpen Your Edge)

3. 선생님, 저 자퇴할래요. (Teacher, I Want to Drop Out)

4. 아숙업 말고 너 (Not Askup, But You)

5. 자기 검열관과의 대화 (A Conversation with My Inner Critic)

6.  우산을 쓰지 않는 용기 (The Courage to Not Use an Umbrella)   

7. 북유럽에 해가 뜬다는 것은 (When the Sun Rises in Northern Europe)

8. 빈둥거림을 취미로 하려고 (Making Idleness a Hobby)

9. 얘들아, 세상은 말이야 (Kids, Let Me Tell You About Life)

10. 텐트 밖은 노르웨이 (Outside the Tent in Norway)

에필로그 - 디폴트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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