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딸이 말했다. “엄마 그건 에바야”

by 김노하 Norway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단순한 휴일이 아닌, 우리의 설이나 추석 같은 큰 명절이다. 대개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 일주일에서 이주일 가량 긴 휴가를 보내는데, 평소 멀리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파티를 즐긴다.


어렸을 적 나도 명절 연휴가 되면 큰집에 친척들이 모여 북적거리는 시간을 보냈었다. 명절이 기다려졌던 건 사촌들과 같이 놀 수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연락하는 사이도 아닌 사촌들도 있었지만 잠시 서먹하다가 금세 어울려 놀곤 했다.


해외에 살다 보니 그런 명절 분위기를 느끼기가 어렵게 되었다. 다 함께 모일 수 있는 큰집도, 같이 놀 수 있는 사촌들도 없이 두 딸들이 자라고 있다. 다행히 아주 외롭게 지내지는 않는다. 가까이 지내는 한국인 가족들이 친인척이 되어 주고, 노르웨이의 ‘히떼(hytte)’ 가 큰집의 장소를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히떼는 노르웨이어로 시골 별장을 의미한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주말이나 연휴가 되면 히떼에서 휴식을 취하며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우리 가족은 노르웨이 명절 연휴가 되면 가깝게 지내는 한국인 가족들과 산속 히떼로 여행을 계획한다. 어린 시절 느꼈던 그 다정한 북적거림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큰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만 12살이 된 큰딸은 올해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엄마는 사춘기에 어땠어? 여드름이 많이 났어?"

"아빠는 할머니한테 반항했어?"

어릴 때는 하지 않던 새로운 질문들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춘기를 보내게 될까!? 스스로도 궁금하겠지만 부모도 궁금한 아이의 사춘기다.




노르웨이에서 자란 아이들은 (좋게 해석하면) 독립적이고 자기 의지가 강하다. 부모들도 아이들의 결정을 존중한다. 그래서 청소년 시기가 되면 가족들이 히떼 여행을 가도 집에 남아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혼자 있는 것이 좋은 나이니 그럴 법도 하다. 아직까지 큰 딸은 히떼에 가고 싶지 않다고는 하지 않았다.


두 집이 가든 세 집이 가든 큰 딸의 포지션은 골목대장이다. 다른 집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아서 늘 놀이를 주도하고 어린 동생들을 돌본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어울려 놀려는 움직임이 적어졌다. 집에 손님들이 와도 한 번 거실 의자에 앉으면 일어날 줄을 모르고, 밤이 되면 방에 들어가 혼자 있고 싶어 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는 날부터 무릎과 발목이 아파서 쉬고 싶다는 말을 연이어했다. 나는 아이가 스키를 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보통 히떼 여행을 가면 매일 스키를 타러 나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일단 하루 이틀 정도 쉬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히떼에 도착한 다음 날, 다들 옷을 입고 스키를 타러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나와 큰 아이도 일단 옷을 입었다.


“엄마, 나 무릎을 굽히면 아파. 스키는 에바야.”

“에바!? 그게 무슨 뜻이야? 아아... 기억났다. 무리란 말이지?”

에바는 게임 유튜브 채널에서 듣고 배운 한국말이다.

“엄마도 오늘 스키 안 타고 싶어. 햇빛이 좋으니 히떼 앞에서 잠깐 바람 쐬고 들어오자.”

“엄마도 안 탈 거야? 좋아!”


다들 출발하고 조용해진 히떼에서 나왔다. 큰 아이는 비탈진 곳에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눈 위에 드러누웠다. 아이가 웃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둘 만의 고요한 시간을 보냈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자기만의 세계를 즐기는 것 같았다. 눈 위를 뒹굴고 춤을 추기도 했다.


다음 날은 머리가 아파서 스키를 쉬었다. 여행 넷째 날이 되었다.

"엄마, 오늘은 나도 스키 타러 나갈래."

딸아이가 말했다. 드디어 오늘이란 느낌과 의지가 얼굴에도 느껴졌다.


사회정서학습(SEL)의 핵심: 자기 조절과 자율성

어른이 되니 습관적으로 아이가 무기력해 보일 때 내가 나서서 그 동력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해야지"

"남들 다 하는데 너만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니"라는 말들이 먼저 떠오른다. 갈등을 유발하는 말들이다.


최근에 사회정서학습(Social Emotional Learning, SEL)에 대해서 공부하고 노르웨이 교육 문화에 대해서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다짐한 것이 있다. 아이 앞에서 내 의견을 일단 잠시 내려놓고 먼저 들어보자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사회정서학습이란 단순히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사교 기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스스로를 조절(Self-regulation)하며, 마침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결정(Responsible Decision-Making)하는 일련의 과정을 포함한다.


아이가 "무릎과 발목이 아프다"라고 했던 것은 신체적인 통증인 동시에, 변화하는 자신의 감정과 컨디션을 보호하려는 마음의 신호였을 것이다. 그때 내가 만약 "엄살 부리지 마"라고 다그쳤다면 아이는 자신의 돌볼 기회를 잃었을지 모른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아이에게 '자신만의 속도'를 허락할 때, 아이는 비로소 '자율성'이라는 엔진을 돌리기 시작한다.


스스로 결정하고 움직였을 때 느끼는 효능감은 부모의 백 마디 잔소리보다 훨씬 강력한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고 믿는다. 기다림과 참을성은 아이가 아니라 나부터 길러야 하는 것이라는 것도 다시 기억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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