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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은 불가능하다고 하셨어.

2009년 2월 16일 월요일 오후

by 노래하는쌤

2009년 2월 16일 월요일 오전 11시 / 나주, 세희의 할머니 만례씨집


“바보야, 그렇게 바로 대답하면 어떻게 해. 먼저 밥 먹자.”


세희는 웃으며 해인을 식탁으로 불렀다.

갓 떠낸 수제비는 고소한 육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해인은 ‘맛있다’는 말을 반복하며 세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식사를 마친 세희는 만례씨와 늘 마시던 꽃무늬 찻잔에 커피를 내려 두 잔 들고 온다.

해인은 잔을 받으며 조심스레 세희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작은 용기를 내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세희야, 나는… 오늘도 좋고, 내일도 좋아.”


세희는 당황한 듯 커피잔을 들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데이트 한 번 제대로 안 해봤는데 괜찮겠어?”


“결혼하고 나서 하면 되지. 실컷.”


세희는 입술을 깨물며 숨을 고른다.


“… 해인아, 너를 어떻게 하면 좋니.”


해인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네가 드레스 입은 모습도 보고 싶은데.”


세희는 대답 대신 해인 엄마의 안부를 물었다.


“아주머니는 잘 지내셔?”


“응. 여전히 정신없으셔. 근데… 세희 너,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세희는 뜨거운 커피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나도 아주머니 생각… 정말 많이 났어. 해주시던 음식도 그립고.”


“아버지도 궁금해하셨어. 너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세희는 질문하려던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세희가 망설이는 걸 본 해인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알고 있었겠다. 지금 아버지는… 엄마가 재혼하신 분이셔.”


“응. 아주머니가 말해주셨어.”




2009년 2월 16일 월요일 오후 / 나주, 세희의 할머니 만례씨집 안방.


두 사람은 그동안 묻혀 있던 이야기들을 숨 돌릴 틈 없이 쏟아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해인이 벽시계를 슬쩍 보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기차 시간 맞추려면… 30분 뒤에는 가야 할 것 같아.”


“내일 약속 있어?”


“아니. 교수님 세미나 가셔서… 다음 주까지 방학이야.”


세희는 잠깐 고민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럼…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나랑 같이 서울에 올라갈래?”


해인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자고 가라고?”


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 서재방에서 자.”


“자는 건 괜찮은데… 네가 불편하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해인은 이미 기차표 예매 페이지에서 환불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세희는 작은방으로 들어가 새 칫솔과 편한 옷을 가지고 나왔다.


“이 잠옷 할머니가 사주신 건데… 제일 큰 게 이거밖에 없어. 갈아입고 와.”


해인은 쑥스러운 듯 옷을 들고 서재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꽃무늬 잠옷을 입고 어색하게 서 있는 해인을 본 세희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작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미안해, 웃어서.”


“세희야, 너 웃으면… 진짜 예쁘다.”


세희는 얼굴이 붉어져 시선을 피했다.

대신 시계를 보고 화제를 돌렸다.


“벌써 저녁밥때네. 배고프지? 내가 밥 차릴게.”


세희가 부엌으로 향하고 방 안에 혼자 남은 해인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책장 위에는 세희가 좋아하던 책과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한 권의 책에서 멈췄다.


‘워크 투 리멤버’ 해인이 세희에게 선물한 책이었다.


해인은 조심스레 책을 꺼내 페이지를 넘겼다.

책 안쪽에 자신의 글씨가 보였다.


세희야, 나에게 너는 따뜻한 햇살이야.


바로 아래 세희가 작게 쓴 글씨가 보였다.


해인아, 나에게 너도 따뜻한 햇살이야.
… 아무래도 나, 너를 사랑하나 봐.


해인은 그 자리에 멈춘 채 책장을 조용히 감쌌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세희의 그 따뜻한 고백에 해인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희는 금세 저녁밥을 준비해 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서 가지고 온다.


“해인아, 네가 두부조림을 가장 좋아한다고 해서 만들었어.”


해인은 상 위에 오른 반찬들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눈을 크게 뜬다.


“우와…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요리 잘하는 사람’이었어.”


해인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세희는 말없이 지켜본다.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작은 소리만 방 안에 고요하게 퍼진다.

그러다 세희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해인아, 나… 서울에서 아주머니랑 병원 다녀온 이야기, 들었어?”


해인은 고개를 들어 세희를 바라본다.


“응. 그때 말했잖아. 네 건강 많이 좋아졌다고. 엄마가 정말 좋아하셨잖아.”


세희는 잠시 손끝을 모아 쥐었다가, 다시 천천히 펼친다.


“혹시… 그때 아주머니랑 산부인과 진료도 같이 받았다는 이야기는… 안 하셨어?”


해인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춘다.


“산부인과… 진료를 받았어?”


“응.”


세희는 숨을 가다듬는다.


“해인아, 만약…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면… 넌 어떨 것 같아?”


해인은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난 상관없어. 세희 너만 있으면 돼. 그걸로 충분해.”


그 말에 세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담아두었던 눈물이 금세 차오른다.


“그때 병원에서 검사받고…

다른 검진도 필요하다고 해서 아주머니랑 산부인과에 같이 갔었어.”


세희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내린다.


“의사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말하셨는데…

난치성 질환이라고 했어. 조기 폐경… 때문에 임신은 불가능하다고 하셨어.


순간 공기가 아래로 가라앉은 듯 정적이 흘렀다.

해인은 아무 말 없이 세희 쪽으로 손을 뻗어 가볍게 그녀의 손등에 포갠다.


“괜찮아. 세희야, 정말 괜찮아. 난… 너만 있으면 돼.”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해인의 무심한 듯 단단한 사랑 앞에서, 세희의 가슴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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