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3일 수요일 오후
리아와 리오는 세희가 만례 씨 댁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
동시에 핸드폰의 회귀 버튼을 눌렀다.
2025년 9월 3일 수요일 오후 / 광주, 리아의 집
집으로 돌아오자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리오가 먼저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고, 리아는 숙제라도 하는 듯 책상에 앉았지만 샤프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은 한 곳, 엄마의 핸드폰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조심스레 엄마의 핸드폰을 켠 리아는 ‘브런치’ 어플을 열어 엄마의 작품 중 '오늘 일기'를 찾아 읽었다.
천천히, 한 줄 한 줄 되짚어 내려가던 리아는 스크롤을 멈췄다.
엄마가 2012년 7월 24일에 남긴 글이 눈을 사로잡았다.
2012년 7월 24일
의사 선생님께서 당장 중절 수술 후 항암 치료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지금 수술하면 생존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해인이는 울면서 제발 수술하자고 사정했지만,
이미 내 뱃속에서 심장이 뛰는 호두와 자두를 지울 수가 없다.
리아의 손이 떨렸다. 읽었던 글이었지만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리아가 문밖으로 소리쳤다.
“야, 서리오. 이리 좀 와봐.”
한자능력시험을 준비하던 리오는 책을 덮고 방문을 열었다.
“왜?”
리아는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속삭였다.
“서리오… 우리 둘을 조금만 늦게 태어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누나, 요즘 도깨비 드라마 본다고… 누나가 무슨 삼신할매라도 되는 줄 알아?”
“우리가 과거로 간 이유가 뭘까? 혹시… 엄마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건 아닐까?”
리오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그냥 대놓고 말하면 되지 않아? 나중에 결혼하면 아이를 늦게 갖으라고. 그럼 엄마도…”
“그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누나, 지금 이 상황에서 정상인 게 뭐가 있어?”
리아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빠가 정성스레 보관해 둔 엄마의 유품 상자를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상자를 여는 순간, 오래된 향기와 함께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이 퍼져 나왔다.
리아는 상자 속을 뒤적이다가 손을 멈췄다. 눈이 커졌다.
“서리오… 이거, 우리 너무 익숙하지 않아?”
유품 상자 안에는 또 다른 작은 상자가 하나 더 들어 있었다.
뚜껑을 열자 리아가 엄마에게 선물했던 보라색 방울 머리끈, 그리고 리오가 선물한 책갈피가 남아 있었다.
“누나, 이것 좀 봐.”
리오는 상자 바닥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이었다.
사진 아래에는 마치 시간에 닳아 지워진 듯한 글씨가 옅게 남아 있었다.
“대박, 이거 너랑 나잖아.”
1994년 9월 19일
사랑하는 세윤 언니랑 세준 오빠랑 패밀리랜드에서♡
리아는 숨을 삼켰다. 리오는 사진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심장은 동시에, 조용하지만 크게 뛰기 시작했다.
리아는 엄마와 리오, 그리고 자신이 함께 찍힌 스티커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 속에서 대답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한동안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 사이 리오는 작은 상자를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무언가 손끝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조그맣게 딱지 모양으로 접힌 쪽지였다. 그는 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펼쳐 나갔다.
쪽지가 모두 펼쳐지자, 익숙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리아의 필체였다.
‘엄마, 아프지 마요. 사랑해요.’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리오의 눈가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말 한마디 없이 쪽지만 바라보았다.
그때 리아가 사진을 상자에 넣으려다 손을 멈췄다. 사진 뒷면이 이상하게 까슬거렸다.
이상한 느낌에 사진을 뒤집은 순간, 하트 모양 스티커의 끝이 살짝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리아는 스티커 사진 뒤에 적힌 글을 읽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한 줄기의 눈물이, 조용히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랑하는 내 딸 리아랑 내 아들 리오랑 패밀리랜드에서♡
리아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서리오, 엄마는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었나 봐.”
리오는 숨을 들이켰다.
“언제부터…? 설마, 지금도 알고 계신 건 아니겠지?”
리아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하지만 그 말의 끝은 힘없이 떨렸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