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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않고 낳아주셔서 고마워요.

1994년 9월 3일 토요일 오전

by 노래하는쌤


2025년 9월 3일 수요일 오후 / 광주, 리아의 집


“리아오, 현성이 삼촌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아빠 저녁에 상갓집 좀 갔다 올게.”


“어. 어디로 가는 거야?”


“함평까지 가야 돼서, 집에 오면 열두 시 넘을 거야. 먼저 자고 있어.”


“아빠, 오늘 패드 보는 날인데 뽀너스 좀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알았어. 숙제 먼저 다 하고 연락해.”


리오와 리아는 해인이 차려준 김치볶음밥으로 저녁을 먹고, 숙제를 시작했다.

해인은 외출 준비를 하며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숙제를 먼저 끝낸 리오가 리아에게 물었다.


“누나, 우리 9월 19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전에 엄마 보러 가면 안 돼? 나, 엄마 보고 싶어.”


“갑자기?”


“잠깐만 보면 되잖아. 오래 안 있을게.”


리아는 핸드폰 달력을 열어 1994년 9월을 확인했다.


“오늘이 엄마 사는 곳에서는 토요일이야. 오늘 갈까?”


“진짜? 완전 좋아! 지난번에 엄마가 우리랑 오락실 가고 싶다고 했잖아. 그럼 오락실 갔다가 떡볶이 콜?”


“오키도키!”


리아는 숙제를 내려놓고 옷장을 뒤적이며 옷을 고른다.


“누나, 숙제는 하고 가야지.”


“쫌! 숨 쉬듯 잔소리 좀 그만해. 갔다 와서 할 거야. 어차피 한 시간도 안 걸리잖아.”


리오는 방에서 엄마에게 선물하려고 준비해 둔 책갈피를 꺼내 들었다.


“서리오, 뭐 해? 얼른 가자고.”


“난 이미 준비 끝났거든!”


두 사람은 엄마의 핸드폰 회귀 버튼을 눌렀다.

순간, 빛이 번쩍이며 공기가 뒤틀렸다.

시간은 거꾸로 흘러간다.




1994년 9월 3일 토요일 오전 11시


나주, 세희의 할머니 만례씨 집


“올 때마다 신나고 신기하다니까!”


“난 올 때마다 못 돌아갈까 봐 무서워.”


“하여튼 쫄팅이, 서리오 쉿! 조용히 좀 해봐.”


조용히 다가가던 그때, 마당 쪽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세희가 잘린 나무 그루터기에 올라 동요를 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맑고 투명했다.


“와… 엄마 노래 진짜 잘 부른다.”


“그러니까. 누나랑은 차원이 다르네.”


“야! 내가 더 보다는 잘 부르거든?”


세희의 노래가 끝나자, 리오와 리아는 조심스레 사님이 할머니집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할머니?”


안방 문이 열리며 사님이 할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할머니, 천천히요! 넘어지면 안 돼요!”


리오가 달려가 사님이 할머니 품에 폭삭 안겼다.


“오메, 추석 될라믄 아적 멀었는디, 뭔 일로 와브렀냐이.”


“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어요.”


“글 안 해도 세희도 느그들 보고 싶다 했는디, 잘 왔시야. 밥은 묵었냐?”


“아… 아직이요.”


“나가 요새 머리가 바보가 되브러갔고 밥을 어쩌고 할 중을 몰러야. 그랑께 만례 동상네 가서 다 같이 묵자잉.”


사님이 할머니를 따라 세희네 집으로 향했다.

마당에서는 세희가 두 팔을 흔들며 달려 나왔다.


“언니! 오빠! 언제 왔어? 오늘 왔어? 금방 가?”


사님이 할머니가 만례씨에게 리오와 리아도 같이 밥을 먹으러 왔다고 말한다.


“동상! 우리 세윤이랑 세준이가 여즉 밥을 안 묵었단디, 역서 같이 묵어야 쓰겄는디…”


만례씨가 웃으며 말했다.


“오메, 성님 멀 그란 걸 물어보요. 숟가락만 더 놔블믄 된디. 같이 밥 묵게 얼릉오니라.”


“동상, 고맙네이.”


“세희야, 니도 오빠랑 언니 온짐에 밥 쪼깨 빨리 같이 묵어 불자.”


“알았다이.”


잠시 후, 식탁 위엔 굴비 열 마리와 무청시래기된장국, 계란말이, 장조림, 오징어젓갈, 나물 반찬들이 가득 차올랐다.


“우와, 잘 먹겠습니다. 할머니, 저 오징어젓갈 완전 좋아해요!”


“잘 먹겠습니다. 저는 시래기국 제일 좋아해요.”


식탁 위엔 웃음이 번졌다.


“세희야, 세준이 오빠가 옛날에 시래기국 이름을 잘 못 알아서 ‘쓰레기국’이라 했다.”


“진짜? 나도 그랬어! 할머니한테 옛날에 ‘쓸애기국’ 달라했잖아.”


한바탕 웃음소리.

시간은 느리게, 그러나 따뜻하게 흘렀다.


“세희야, 밥 먹고 오락실 갔다가 떡볶이 먹을래?”


“좋아!”




세희의 할머니 집 근처 오락실.


세희와 리오, 리아는 면사무소 옆 오락실로 향했다.

낡은 간판 밑, 희미한 불빛이 깜박였다.


“언니, 여기… 들어가도 돼?”


“그럼. 무서울 거 없어.”


오락실 안은 화려한 전자음으로 가득했다.

세희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언니, 오빠! 여기 노래방 기계 있다!”


“새로 들여놨나 보네.”


“언니! 오빠! 우리 게임하고 노래도 부르면 안 돼? 나 진짜 노래방 와보고 싶었어.”


“당연히 되지.”


세 사람은 보글보글, 비행기, 스트리트파이터 게임을 번갈아 하며 웃음소리를 쏟아냈다.

그리고 노래방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세희야, 네가 먼저 불러.”


세희는 리모컨을 눌러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을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불렀다.


리오가 리아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누나, 엄마 진짜 잘 부른다.”


리오는 예전 노래를 잘 몰라,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불렀고,

리아는 엄마가 좋아했다는 이주호의 ‘사랑으로’를 조심스레 따라 불렀다.

노래방 안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은 컵 떡볶이를 하나씩 나눠 먹으며 만례씨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걸었다.

걷던 중, 동네 남자아이가 세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세희야, 오늘 축구하는 날인데 갈래?”


“우와, 세희야, 너 축구도 해?”


리아가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세희는 몸을 살짝 숙여 리아와 리오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축구 좋아해. 근데 인원이 안 맞을 때만 나 골키퍼 하라고 부르거든. 나는 골키퍼는 하기 싫어.”


“그럼 오빠가 골키퍼 할게. 세윤이도 축구 좋아하잖아.”


“정말? 그럼 나 축구할래!”


리아는 회귀 시간을 확인하며 리오에게 속삭였다.


“1시간만 하고 돌아가자.”




나주, 금황중 운동장


세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금황중 운동장에 도착한 세희는 작은 체구임에도 날렵하게 운동장을 누비며 공을 쫓았다.


“누나, 엄마는 진짜 못하는 게 없네. 축구도 대박 잘하네!”


리오가 감탄했다.


세희와 리아는 완벽한 팀워크를 이룬다.

마침내, 세희의 마지막 역전골로 그날 경기의 승리는 세희 팀에게 돌아갔다.

세희는 리오와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리아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언니! 오빠! 나 오늘이 살면서 최고로 행복한 날이야!”


“세희야, 우리도 오늘이 살면서 최고로 행복한 날이야.”


리아의 마음속으로는 또 다른 속삭임이 흘렀다.


‘엄마, 저희도 오늘이 최고의 날이에요. 리오랑 저를 포기하지 않고 낳아주셔서 고마워요.


리오와 리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웃음과 눈물이 함께 어우러진 순간, 그들 모두 가슴 깊이 따뜻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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