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15일 월요일 오전
2007년 1월 15일 월요일 오전
“해인이한테는…… 원래 여동생이 있었어.”
“네?”
“처음 듣는 이야기지? 세희야, 괜찮으면 아줌마랑 카페에 들러서 차 한잔하고 갈까?”
“좋아요.”
백화점에서 속옷과 원피스 한 벌을 고른 뒤,
세희와 해인 엄마는 해인네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서울, 안남동 해인의 집 근처 카페
창가 자리.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쉬고 싶을 텐데, 아줌마 때문에 쉬지도 못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니에요.”
“아줌마가 이런 이야기를 세희 너한테 한다고 해서,
해인이의 마음을 받아달라는 건 절대 아니야.”
“……”
“그냥 세희가 해인이의 상처를 알고, 따뜻한 눈으로 봐주길 바랐어.”
“죄송해요.”
“아니야, 미안한 건 내가 해야지. 너무 갑작스럽게 부담을 준 것 같네.”
“……”
“듣고 너무 놀라지 않았으면 해. 해인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
그때 해인이 아빠랑, 해인이 여동생이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어.”
“네……?”
세희는 잠시 말을 잃었다.
손에 쥐고 있던 컵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해인 엄마는 조용히 숨을 고르더니,
지난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해인이가 국민학교 때 틱장애가 있었어.”
“틱장애요?”
“응. 말을 더듬고, 눈을 자주 깜빡였지. 처음엔 그냥 자연스럽게 사라 질 버릇인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봐. 아이들 사이에선 놀림거리가 됐어.”
“…….”
“‘왜 그렇게 눈을 깜빡이냐’, ‘말 좀 똑바로 해라’… 그런 말들이 쌓이고, 점점 괴롭힘이 심해졌나 봐. 해인이는 점점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고, 그때는 그냥 사춘기가 빨리 온 줄만 알았어.”
“네……”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해인이는 괜찮지 않다는데, 다들 겪는 시간이라고만 했어.”
“…….”
“어느 날, 집에 왔는데 항상 있어야 할 시간에 해인이가 없더라.
한참을 기다리다가 집 주변을 찾아다녔어. 해인이가… 아파트 화단 밑에서 발견됐어. 뛰어내렸대.”
세희의 손끝이 떨렸다.
“다행히 나무에 걸려 목숨은 건졌지만, 한쪽 다리가 망가졌어. 그 아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이제 안 괜찮아도 되죠?’라고 묻더라.”
해인 엄마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 일 이후로 예정돼 있던 가족여행이 있었어. 할머니 환갑이었거든. 난 병간호 때문에 못 가고, 해인이 아빠랑 여동생, 할머니만 가게 되었지.”
“…….”
“그런데… 집으로 오는 비행기가 돌아오지 못했어.”
“비행기요?”
“목포로 향하던 비행기가 추락했어. 세 사람 모두 그 자리에서….”
말이 끊겼다. 해인 엄마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때 해인이는 병원 침대에서 울지도 못했어. 자신 때문에 일정을 앞당겨서 가게 돼서 그렇게 된 거라고….”
“…….”
“그저 창문만 보더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
세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잔잔한 커피 위로 동그랗게 눈물이 번졌다.
세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서, 조용하게 눈물이 하염없이 뚝 뚝 떨어졌다.
해인의 엄마는 말없이 세희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세희야. 한 가지만 더…
해인이가… 국민학교 11살 이전의 기억이 없어.”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의사 선생님 말로는, 너무 큰 충격이라 스스로 기억을 지워버린 거래. 살기 위해서였다고 하더라.”
“…….”
“결국 병원에서 ‘해리성 기억상실’이라고 진단받았어. 그때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대. 아빠도, 여동생도, 할머니도, 2년 동안의 그때 학교 일도… 전부.”
세희의 눈가에 눈물이 점점 더 크게 번져갔다.
“아주머니, 해인이는 어떤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걸까요?”
“그 애는 기억나지 않다고만… 그저 괜찮다고만 해.”
“정말 괜찮은 걸까요?”
“서울 오기 전까지만 해도… 눈에 초점 하나 없던 아이였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러더라. ‘꼭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라고.”
“그게 누군데요?”
“세희야… 그게 너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니?”
“네?”
“세희야, 그 애는 지금도 기억 속 어딘가에서 멈춰 있는지도 몰라.”
“…….”
“아줌마가 너무 큰 부담을 준거지?”
“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요.”
“미안해. 너라면 해인이를 그 기억에서 꺼내줄 것만 같아서….
그래서 내가 네게 이 이야기를 한 거야. 미안하다.”
세희는 마음에 밀려드는 부담감으로 더 이상 묻지 못한다.
세희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숨소리 하나조차 조심스러웠다.
“아주머니, 해인이에게는…
오늘 이 이야기를 하셨다는 걸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알고 있다는 걸, 해인이가 알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렇게 할게. 들어줘서 고마워, 세희야.”
카페 창밖으로 햇살이 부서져 내려 세희의 마음을 비췄다.
잔에 남은 커피는 식어 있었지만,
세희의 마음속엔 또 다른 시간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