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15일 월요일 오전
2007년 1월 15일 월요일 오전 / 서울, 안남동 해인의 집
세희는 해인 엄마의 설득 끝에, 해인 아버지가 의료선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해인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세희야, 동아리 사람들한테는 여기서 지낸다는 말 굳이 안 해도 돼. 너 편한 대로 해.”
“괜찮아. 지인이한테는 이미 말했어. 너희 집에 있다고.”
“혹시 내가 같이 있는 게 불편하면, 너 있는 동안에 내가 태영이 자취방에 가 있을까?”
세희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서해인, 도대체 너는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너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 할 거야? 나를 얼마나 염치없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그래. 신세 지고 있는 것도 미안한데 그런 소리 하지 마.”
“신세는 무슨 신세야. 엄마랑 내가 좋아서 있으라고 한 거지.”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 좋아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세희 널 좋아해서 정말 미안해.”
그 말에 세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해인과 해인 엄마의 따뜻한 말과 배려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만례씨가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의 손맛이 담긴 따뜻한 밥을 먹는 건 처음이었다.
해인 엄마는 세희가 나박김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날 아침, 해인 엄마는 배를 썰어 넣은 나박김치를 내왔다.
“세희야, 세희가 나박김치 좋아한다길래 아줌마가 만들어봤어. 배 넣은 건 처음인데, 어때?”
세희는 숟가락을 들어 한입 떴다.
익숙한 맛이었다.
만례씨가 늘 해주던 그 맛.
눈시울이 저절로 붉어졌다.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아줌마 이래 봬도 쉼터에서 밥 해준 경력이 벌써 10년이야. 세희도 먹고 싶은 반찬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네, 감사합니다.”
“세희야, 오늘 병원 진료 가는 날이지? 아줌마랑 같이 갈까?”
“괜찮아요. 저 혼자 가도 돼요.”
“세희야, 병원을 왜 혼자 가. 당연히 나랑 가야지.”
“내가 해인이 너랑 왜……”
세희는 말을 멈추고 식탁 위의 달력을 바라봤다.
달력 한쪽에 해인 엄마의 필체로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세희 병원 가는 날.’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따뜻하게 데였다.
“아주머니, 오늘 출근하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 한의원은 월요일마다 휴진이야.”
“그럼, 같이 가도 될까요?”
“그럼~ 세희 같은 예쁜 딸 하나 있는 게 소원이었는데, 고마워 세희야.”
“엄마! 내가 세희랑 같이 갈 거야.”
“해인아, 너 오늘 태영이랑 대진이랑 쉼터 아이들 영화 보여주기로 한 날이잖아.”
“아, 맞다…… 세희야, 미안. 다음 진료 때는 꼭 같이 가자.”
세희는 해인 엄마의 차를 타고 고대 안남병원으로 향했다.
해인이가 자신이 실려 왔던 일까지 이미 말해뒀을 거라 생각했지만,
해인 엄마는 그 일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차 안에서 해인 엄마가 말을 건넸다.
“세희가 소화가 많이 안 된다며? 해인이가 말해줬어. 영양실조로 실려 갔다고…… 많이 걱정하더라.”
“네…… 네.”
“해인 고모가 소화기 전문의야. 안남병원 진료 다 끝나면 나중에 아줌마 병원에 한 번 같이 들르자.”
“네, 알겠어요.”
“그리고 세희야, 진료 끝나고 아줌마가 살 게 좀 있어서 그러는데, 집 가는 길에 백화점에 잠깐 들러도 될까?”
“네, 괜찮아요.”
미암동, 현대백화점.
진료를 마친 뒤, 두 사람은 미암동 현대백화점으로 향했다.
해인 엄마는 속옷 매장으로 들어갔다.
“어떤 거 찾으세요?”
“속옷 세트 구입하려고요.”
“어떤 분이 입으시나요? 사이즈는 아시고요?”
해인 엄마는 잠시 세희를 바라보았다.
판매원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 따님이 입으실 속옷이군요?”
“네, 맞아요.”
해인 엄마는 며칠 전부터 세희의 체형을 살폈다.
불과 2주 전, 뼈만 남았던 세희가 눈에 띄게 건강을 되찾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다행스럽고, 또 기특했다.
“세희야,”
해인 엄마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속옷가게 데려가고 싶어서 병원 같이 가자고 했어. 말도 안 하고 끌고 와서 미안해.”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사실은, 아줌마가 세희한테 더 고마워.”
“……저요?”
“우리 해인이 말이야. 서울 올라오고 나서는 나한테 부탁 한 번 한 적이 없었거든.
그런 해인이가 울먹이면서 그러더라. 세희를 우리 집에 있게 해 달라고.”
“정말요?”
“응. 태영이랑 대진이한테 물어봐도 통 이야기 안 하던 애인데……
이렇게 예쁜 세희한테는 마음을 다 주고 있더라.”
해인 엄마는 세희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해인이 녀석은 감정 표현을 잘 못 해. 아픈 것도, 외로운 것도 다 가슴에 묻고 사는 애야.”
“…….”
“해인이가 자기 이야기는 잘 안 하지?”
“사실…… 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안 나눴어요.”
“그럴 줄 알았어.”
해인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건 해인이한테 비밀로 하자.”
세희가 고개를 들자, 해인 엄마는 조용히 말했다.
“해인이한테는…… 원래 여동생이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