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언니처럼 예쁜 딸 낳고 싶어.

1994년 8월 15일 월요일 오후

by 노래하는쌤

1994년 8월 15일 월요일 오후 / 나주, 세희의 고향


세희의 할머니 만례씨집.


만례씨 집에 도착하자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다섯 시쯤. 리오는 리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누나, 집엔 몇 시에 갈 거야?”


“나도 생각 중이야. 일단 기다려보자.”


그때 마당에서 만례씨가 불렀다.


“저녁밥 때가 다 됐응께, 집에 와서 좀 더 놀다가 저녁 묵고 가그라.”


리아는 리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녁 먹고 사님이할머니 집에 가서 방법을 찾아보자.”


“네, 먹고 갈게요.”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현관 앞 평상에 종이인형 세트가 놓여 있었다.


"우와! 미미 종이인형이다."


만례씨가 웃으며 말했다.


"아따, *백영사할매가 갔다 놨능갑고마 그때게 그라고 난리를 쳐블든만 미안혔능갑네."


세희가 신나서 리아의 손을 잡았다.


"언니, 밥 먹기 전까지 같이 인형놀이 할래? 다른 거 하고 놀아도 돼."


리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해맑게 웃는 세희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인형놀이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검도나 축구 같은 몸으로 하는 게 훨씬 재밌는 아이였다.


“그래, 세준이 오빠랑 같이 하자.”


리오가 인형놀이를 하자는 말을 듣자 리아의 어깨를 몰래 툭툭 쳤다.

리아는 눈빛으로 ‘좋게 말할 때 가만히 있어’라고 위협 아닌 위협을 보냈다.


리오가 화장실에 간 사이, 세희가 리아에게 비밀스럽게 말했다.


“언니, 우리 집에 바비 인형 새 거 두 개 있어. 친구 생기면 같이 놀려고 아껴뒀던 거야.”


세희는 작은방으로 들어가 인형을 들고 왔다.

비닐도 뜯지 않은 새 인형이었다. 하나를 뜯어 리아에게 내민다.


“언니한테만 말하는 비밀인데… 나 3학년 때까지 밤에 쉬해서 기저귀 했거든.”


“진짜? 나도 그랬어. 아빠가 내가 워낙 튼실해서 나한테 맞는 기저귀 찾느라 고생하셨대.”


“정말? 나 이제 쉬 안 해서 할머니가 축하한다고 바비 인형 사주신 거야.”


“할머니 선물인데, 이렇게 예쁜 걸 나 줘도 괜찮겠어?”


“괜찮아. 그리고 언니가 더 예뻐. 나도 나중에 결혼하면 언니처럼 예쁜 딸 낳고 싶어.


리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 엄마는 이미 예쁜 딸을 낳았어요. 그리고 그냥그냥 아들도요…’


“세희야, 네가 더 예뻐.”


화장실에서 돌아온 리오까지 셋은 함께 인형놀이를 했다.

부엌에서는 사님이할머니와 만례씨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님, 오늘 낮잠 할 차 안자블어갖고 더 피곤하겄소. 얼렁 묵고 일찍 들어가서 주무시오."


사님이할머니는 치매약을 먹기 시작한 뒤로 초저녁잠이 많아졌다고 한다.


리아는 리오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 먹고 사님이할머니 댁에 가서, 할머니 주무시면 회귀하자.”


"언니, 다음에는 또 언제 올 거야?"


"응? 세희야, 잠깐만 언니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리아는 잠시 망설이다 화장실로 들어가 가방을 열었다.

안쪽에 숨겨둔 핸드폰으로 1994년 달력을 확인했다.

9월 추석 연휴를 보고 다시 2025년 달력과 비교한다.


‘9월 19일 금요일, 아빠 쓸독모임 있는 날… 그날이면 되겠다.’


리아는 돌아와 세희에게 말했다.


“세희야, 다음 달 추석 때 다시 올게. 추석에는 뭐 해?"


"할머니랑 추석 전날 아침에는 전 부치고 오후에는 아무것도 안 해."


"세희야, 언니랑 오빠랑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광주에 있는 패밀리랜드 가보고 싶었는데 안 되겠지?"


"왜 안돼?"


"너무 먼 것 같아서, 여기서 버스 타면 1시간이나 걸려."


"1시간이 먼 거리구나."


리아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리아는 토요일만 되면 버스를 타고 환승도 하고 여기저기 다니느라 1시간이 먼 거리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었다.


"응, 작년에 할머니가 거기 동물원 옆에 상사화 꽃구경 가기로 했었는데 내가 아파서 못 가셨어."


"그래? 그럼 추석에 할머니들이랑 같이 갈까?"


세희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엌으로 가서 만례씨에게 추석전날 광주 패밀리랜드를 가자고 한다.


"그래블자, 팽야 추석이라고 올 사람도 없는디 가블믄 쓰겄고만."


"사님이할매요, 할매도 같이 가장깨요."


"성님, 손지들허고 내랑 도시락 싸브러갖고 가븝시다."


사님이할머니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저녁이 차려졌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풍성한 밥상을 나누었다.

만례씨는 생선을 발라 리아와 세희 밥 위에 얹어주고,

사님이할머니는 리오 앞에 반찬을 챙겨주었다.


그러던 중 만례씨가 껄껄 웃었다.

리아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입술 오른쪽엔 밥풀이 붙어 있고, 왼쪽엔 김 조각이 붙어 있었다.

얼굴 가득 웃으며 열심히 먹는 리아를 보고 모두 웃음이 터졌다.


"와따 성님, 나가 세윤이 묵는 것을 봐븐께 겁나게 오져븐당깨, 오져 죽겄당깨요."


"세희야, 오져븐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세희가 깔깔대며 속삭였다.

"크크 오진다는 말은 엄청 엄청 하늘만큼 땅만큼 좋다는 뜻이야."


"내가 먹는 게 왜 저렇게 좋으신 거야?"


"언니가 잘 먹는 모습이 예뻐서 그런 거야. 나 우리 할머니가 소리 내서 웃는 거 처음 봐."


식탁 위에 웃음이 피어났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꽃 이야기로 번졌다.


세희와 만례씨는 상사화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세희는 수국도 좋아한다고 했다.

리아도 상사화를 제일 좋아한다고 하자, 세희는 손뼉을 치며 리아와 비슷한 게 많다고 하면서 좋아한다.

세희가 리오에게 무슨 꽃이 좋냐고 묻자, 리오는 가장 기본적인 꽃 장미가 좋다고 한다.

사님이할머니도 장미꽃이 제일 좋다고 한다.


"패밀리랜드 동물원 옆에 상사화도 예쁜데 놀이동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장미정원도 있어."


"추석 때 우리 다 같이 꼭 가자."


저녁식사가 끝난 후 리오와 리아는 사님이할머니집으로 온다. 사님이할머니는 많이 피곤하셨는지 저녁약을 드시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자리에 드셨다.


"누나, 자고 일어난 후에 우리 없다고 걱정하시는 거 아닐까?"


"엄마가 그러는데 다음날 아침이 되면 또 기억을 못 하신다고 했어."


"그래도 편지라도 써 놓고 갈까?"


"그래, 추석에 온다고 써 놓고 가자."


리아는 조용히 편지를 썼다.


‘할머니, 추석에 또 올게요. 꼭 기다려요.’


그들은 편지를 머리맡에 두고, 핸드폰의 회귀 버튼을 눌렀다.


만례씨는 남평 5일장이 열리는 날 남평장에 가서 상사화모종, 장미모종, 수국모종을 사가지고 온다.


*백영사 : 문방구이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