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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라고 부르지 마.

1994년 8월 15일 월요일 오전

by 노래하는쌤

광주, 리아네 집.



“서리오! 언제까지 마음의 준비만 할 건데? 엄마 빨리 보고 싶다며!”


“누나, 진짜 못 돌아오면 어떻게 하려고?”


“야! 그럴 거면 가지 마. 너 진짜 마지막이다. 야, 쫄팅아! 가자고!”


“알았어. 가자고, 가!”


핸드폰을 들고 한참을 망설이던 리오가 드디어 결심한 듯 과거 이동 아이콘을 클릭했다.




1994년 8월 15일 월요일 오전 / 나주, 세희네 고향


“지난번에 왔을 때도 여기 시간으로는 오전 11시였는데…….”


“그럼 현재에서 여기로 오는 시간은 상관없고, 여긴 항상 오전 11시로 도착하는 거 아닐까?”


“아무래도 그런가 봐.”


리아는 리오에게 사님이할머니 댁에 먼저 들르자고 했다.


“야, 서리오! 여기서는 네가 나보다 한 살 많다고 했지? 누나라고 하지 말고 세윤이라고 불러.”


“오~ 그럼 지금 오빠라고 불러봐.”


“적당히 해라.”


리아는 자연스럽게 열린 대문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할머니! 할머니?”


집 안은 조용했다. 인기척이 없자 리아는 문가에 귀를 대보았다. 방 안에서 희미하게 TV 소리가 들린다.

리아는 현관문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다시 불렀다.


“할머니! 할머니! 저 세윤이에요.”


“누나, 사님이할머니 어디 나가신 게 아닐까?”


“방에서 TV 소리 들리는데? 한 번 들어가 보자.”


“누나! 사님이할머니도 없는데 맘대로 들어가면 어떻게 해.”


“엄마한테 그럼 먼저 가볼까?”


리아는 리오와 함께 만례씨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리오는 긴장한 얼굴로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나, 나 너무 떨려.”


“너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기서는 니가 오빠니깐 누나라고 부르지 마.


“알았어. 세윤아. 크크”


“아...... 뭔가 기분 나쁜데 어쩔 수 없지.”


만례씨 집 앞에 도착한 리아는 세희를 불렀다.

세희는 리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언니! 어? 세준이 오빠랑 같이 온 거야? 오빠, 안녕? 나 세희야.”


“안녕하세. 아...... 안녕?”


“둘 다 얼른 들어와. 할머니가 세윤언니랑 세윤오빠 온다고 평소보다 맛있는 음식 더 많이 해놨어.”


만례씨집 거실에 상다리가 휘어지게 음식이 차려져 있다. 지난번에 왔을 때처럼 음식 종류가 다양하다.


“세희야, 사님이할머니는 어디 가셨어?”


“사님이할머니 우리 할머니랑 새벽부터 음식준비하고 피곤해서 한숨 주무신다고 조금 전에 가셨는데? 왜?”


“집에 안 계시는 것 같아서.....”


“그래? 이따가 12시쯤에 점심 같이 드시러 오신다고 하셨으니깐 기다려보자.”


“응.”


리아는 어제 소품샵에서 산 머리띠와 머리끈을 꺼내 세희에게 건넸다.

보라색 꽃무늬 방울 머리끈과, 작은 리본이 달린 머리띠였다.


“우와, 언니 나 보라색 좋아하는데? 내가 보라색 좋아한다고 말했었나?”


'엄마가 쓴 글에서 봤어요. 어릴 적부터 보라색 좋아했다고 써져 있더라고요.'


리아는 속으로 중얼거리다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응? 어, 세희야. 내가 양갈래로 머리 묶어 줄까?”


“응, 좋아.”


세희는 신이 나서 꼬리빗과 탁상거울을 들고 왔다.

리아는 세희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고 양갈래로 묶어줬다.

세희는 거울을 보며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았다. 묶은 머리 위에는 보라색 리본 머리띠가 반짝였다.


“예쁘다! 세희, 진짜 잘 어울려.”


세희는 환하게 웃으며 리아에게 엄지를 들어 올렸다.

그 사이 리오는 온 방을 기웃거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집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우와, 나 언니처럼 머리숱 많은 사람 처음 봐. 그리고 내가 본 사람 중에 언니가 머리카락 제일 길어.”


“크크 허리까지 길러보려고, 내가 아빠 닮아서 머리숱이 많아.”


“성원이 삼촌도 머리숱이 많았었나 보구나.”


“어? 어.”


'성원이라는 분이 세윤이, 세준이란 분의 아빠라고 하셨는데 왜 돌아가신 건지 물어볼 수가 없네.'


“언니, 혹시 나도 언니 머리 묶어봐도 돼?”


“당연하지!”


세희는 정성스럽게 리아의 머리를 묶어준다.

세희는 머리를 묶어주면서 재잘재잘 동화책 이야기를 즐겁게 한다.

라푼젤 머리모양을 말하면서 다른 사람 머리를 오늘 처음으로 묶어봤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긴 머리를 땋아 보고 싶었다고 리아에게 말한다.


“세희야, 머리 땋아보고 싶었으면 언니 머리 땋아봐도 돼.”


“나, 머리 땋는 거 오늘 처음인데 언니 머리 예뻐서 자신감 생겨!”


“얼른 땋아봐. 잘할 것 같아.”


“진짜? 언니 정말 고마워.”


세희는 잠깐 설명만 듣고도 곧잘 머리를 땋았다.

머리를 다 땋고 나서 세 사람은 공기놀이를 시작했다.

리오는 ‘아리랑’을 하며 공기 실력을 뽐냈다.


“세준 오빠, 공기 진짜 잘한다! 공기의 신 맞네!”


그렇게 깔깔거리며 놀고 있는데,

12시가 다 되어갈 무렵 현관 쪽에서 만례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희야! 세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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