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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없어! 차라리 지옥이 나아.

2007년 1월 7일 일요일 오전

by 노래하는쌤

“오빠...... 석현 오빠......”


해인은 가슴 한쪽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 마음을 다잡았다.

해인은 자신의 손등 위에 포개진 세희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쥔다.


“나는...... 세희야, 나 해인이야.”




2007년 1월 7일 일요일 오전 / 서울, 고대 안남병원 입원병실


세희는 해인이의 손을 천천히 빼냈다.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믿고 싶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어. 제발 보내줘.”


해인이의 목소리가 떨린다.


“세희야, 지금 퇴원하면 위험하다고 하셨어.”


“살고 싶은 생각 없어. 그냥 내버려 둬.”


“몸이 조금만 더 회복될 때까지만 병원에 있으면 안 될까?”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 미안한데...... 지인이 좀 불러줘.”


“세희야,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 나랑 지인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리고 지인이는 방학이라 광주 집에 내려갔어.”


“누가 걱정해 달래? 내가 알아서 갈게.”


세희는 수액 라인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주삿바늘이 빠지며 피가 맺혔다.

해인은 놀라 간호사 호출 버튼을 눌렀다.


“세희야, 이러지 마. 내가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신은 없어! 차라리 지옥이 나아. 살고 싶지 않아.”


“세희야, 제발 부탁이야......”


세희는 계속 퇴원을 시켜달라고 애원했다.

해인은 간호사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퇴원하시려면 담당의 진료 먼저 받으셔야 합니다.”


잠시 후, 이름이 불렸다.


“한세희 님.”


담당의는 난처한 표정으로 몇 가지를 당부했다.


“환자분이 강하게 원하셔서 퇴원 처리하는 겁니다. 대신 하루 세 끼, 소량이라도 꼭 드세요. 식사를 못 하거나 한 끼라도 거르게 되면 바로 병원에 오셔서 영양제 맞으셔야 합니다. 체중이 더 떨어지면 위험합니다.”


세희는 초점 없는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해인이가 조용히 말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빈혈약과 식욕증진제, 간수치가 높아서 우루사도 처방했습니다. 일주일 정도는 쌀죽으로 드시게 하세요. 이후엔 부드럽고 소화 잘 되는 음식 위주로요. 2주 후에 다시 내원하셔서 피검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해인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가퇴원 처리하셨으니, 다음 진료 때 정산하시면 됩니다. 약은 1층 원내약국에서 받아가세요.”




병원 밖.


해인은 자신의 점퍼를 벗어 세희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세희야, 우리 집에서 조금만 지내자. 엄마도 괜찮다고 하셨어.”


세희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너랑 내가 무슨 사이인데.”


“우리가? 무슨 사이긴 사이지. 검정고시 학원도 같은 곳으로 다녔고, 대학 동기고, 영화 동아리도 같이 하잖아. 고향도 비슷하고...... 같은 디카페인족이고...... 아, 그리고 같은 84년생 쥐띠고.”


세희는 그런 해인이의 어설픈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며칠만이라도 지내면 안 될까? 엄마가 죽이랑 다 준비해 놓으셨대.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와.”


해인의 엄마는 의료봉사와 노숙자 봉사를 하며,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쉼터를 10년째 운영하고 있다.


“불편하면 3층은 비어 있으니까 혼자 써도 돼. 그리고...... 지인이가 그러는데 네 오피스텔은 다음 주까지 비워줘야 한대.”


세희는 입을 다물었다. 병원에 실려오기 전, 집의 모든 짐을 정리했었다.

그 사실을 아는 해인은 혹시 세희가 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두려웠다.


“그럼 밥이라도 한 끼 먹고 가면 안 될까?”


해인의 진심 어린 부탁에 세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안남동, 해인의 집


4층 상가주택.

1층은 한의원, 2층과 3층은 청소년 쉼터, 4층은 가족의 거주 공간이었다.


현관 문이 열리자 해인의 엄마가 달려 나와 세희를 꼭 안아주었다.


“엄마, 학생들한테 하듯 그렇게 갑자기 안으면 세희가 놀라잖아.”


“괜찮아요, 해인이 어머니.”


“세희 양, 잘 왔어요. 쉼터 아이들은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데, 세희 양은 편하게 아줌마라고 해요.”


“네, 아주머니.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럴까?”


해인은 엄마에게 세희를 3층에 머물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엄마는 해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일단 밥부터 먹자.”


4층 식탁 위에는 따뜻한 죽이 놓여 있었다. 잔잔한 찬양이 흘러나왔다.


“세희가 당분간 쌀죽만 먹을 수 있다 해서 준비했어. 입맛 없어도 조금씩은 먹자.”


“네, 감사합니다.”


“해인이 아빠는 몽골로 의료봉사를 가셔서 몇 달은 못 오셔. 비어 있는 방은 다 치워놨으니까, 여기서 지내면 되겠지? 서해인, 넌 짐 싸서 3층으로 내려가.”


“어? 아...... 알았어.”


“세희야, 옷이랑 세면도구 다 준비해 놨어.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감사합니다.”


“해인아, 엄마 교회 좀 다녀올게. 세희 필요한 거 있으면 문자 보내.”


엄마가 나가자, 해인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세희야, 밥 다 먹었으면 방에 들어가서 쉬어. 난 내려갈 짐 챙길게.”


해인은 허둥대다 식탁 밑으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주우려다 식탁에 머리를 부딪히고, 일어서다 다리까지 찧었다.


“아야야......”


세희는 그 어설픈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해인은 그런 세희의 웃음을 처음 보았다.


그 웃음이 너무 따뜻해서, 잠시 숨이 막혔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녀에게 또 한 번 마음이 기울고 있다는 걸......


“해인아......”


세희가 조용히 말했다.


“나, 혼자 있기 싫어.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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