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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곁에 둘 자신이 없어.

2007년 2월 12일 월요일 오전

by 노래하는쌤

2007년 2월 12일 월요일 오전 / 서울, 안남동 해인의 집


해인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세희의 건강은 눈에 띄게 회복됐다.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얼굴 표정도 밝아지고, 목소리에도 힘이 실어졌다.


아침이면 해인의 엄마는 “우리 세희 얼굴에 생기가 돌아서 좋다”며 웃었다.

그 말에 세희도 따라 웃었지만, 마음 한편엔 언제부턴가 묵직한 무언가가 드리워져 갔다.


그날은 2월 중순, 겨울 햇살이 유난히 환하게 집안으로 비추던 날이었다.


“세희야, 내일이 병원 가는 날이지?”


“네. 4주가 이렇게 빨리 갈 줄 몰랐어요.”


세희는 무심코 식탁 위 달력을 바라봤다.

달력 한쪽에, 해인 엄마의 필체로 적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세희 병원 가는 날.’


그 글씨를 보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따뜻하게 데워졌다.

세희는 그 따뜻함을 밀어내듯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작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주머니… 저 이번 진료 끝나면 고향에 내려가려고요.”


“왜? 갑자기? 무슨 일 생긴 거야? 언제 올라오는데?”


“잠깐이 아니라, 당분간은 거기서 지내볼까 해요.”


해인 엄마는 놀란 눈으로 세희를 바라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말했다.


“해인이 아빠 오기 전까지 여기서 편히 있어도 된다고 했잖아.”


“아니에요. 해인이한테는 제가 이야기할게요.”


“… 그래. 병원엔 아줌마가 같이 가도 될까?”


“네. 감사합니다.”


병원 진료 결과는 좋았다.

의사는 세희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해인 엄마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진료가 끝나고 돌아온 세희는 방 안에 앉아 한참을 창문만 바라봤다.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 수는 없어. 이제는 떠나야 해.’


그 생각이 마음속에서 조용히 맴돌았다.

오후, 동아리방에 다녀온 해인은 세희가 엄마와 함께 병원에 다녀온 걸 알고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내가 같이 가고 싶었는데. 나도 걱정돼서…”


“미안해. 오후 진료 예약이었는데 오전으로 일정이 바뀌었어.”


“그럼 세희야, 시간 되면 나랑 카페에 갈래? 나 너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해인의 말에 세희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그래.”




서울, 안남동 해인의 집 근처 카페 안.


유리창 밖엔 부드러운 눈발이 흩날리고, 카페 스피커에선 팝송이 잔잔히 흘러나온다.


“엄마가 너 많이 좋아졌다고, 정말 기뻐하시더라.”


“고마워. 아주머니도, 그리고 해인이 너한테도.”


“그건 다 세희 네가 밥도 잘 먹고, 약도 잘 챙겨 먹은 덕이지.”


“아니야. 그런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할 이야기라기보다 사실, 세희 너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서…”


해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해인의 손에는 '기억 속으로 걷기' 책 초판이 들려있다.


“지인이한테 들었어. 네가 이 영화 제일 좋아한다며.”


세희는 책을 받아 들고 미소 지었다.


“고마워, 해인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해인은 세희의 눈빛을 살폈다. 어딘가 먼 곳을 향해 있는 듯했다.


“해인아.”


“응?”


“나, 오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무슨 말인데?”


세희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말했다.


“나… 할머니가 사시던 집으로 내려가려고 해.”


해인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왜?”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내려가서 다시 글을 써보려고.”


“세희야…”


해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울엔 이제 안 오는 거야?”


“아마도, 당분간은. 나 이제 괜찮으니까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럼 내가 만나러 가면 안 돼?”


“해인아, 미안해.”


그 한마디에 해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해인이 말없이 세희를 바라본다. 해인의 목소리가 떨린다.


“세희야, 나 아직 너에게 할 말도, 해주고 싶은 것도 많단 말이야.

너 없으면… 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 같아.”


세희는 고개를 숙였다.


“해인아, 넌 그동안도 충분히 잘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아니야! 세희야, 너 오고 나서 내가 처음으로 마음 다해 웃었어.

처음으로 누군가랑 밥 먹는 게 즐거웠다고.

그런데 이제 또 혼자 두고 가면… 난 진짜 견딜 자신이 없어.

미안해. 너를 좋아하지 않겠다고 한 말 지키지 못할 것 같아.”


해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세희는 그런 해인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손끝이 저릿하게 떨렸다.


“나도 너랑 아주머니랑 지내는 동안 행복했어. 하지만… 난 아직 누군가 곁에 둘 자신이 없어.”


“글 쓰는 동안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옆에 있을게.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그냥… 옆에만 있게 해 줘.”


해인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서 이마를 살며시 붙이고 고개를 숙인다.

세희는 천천히 해인의 이마를 들어 올린 후 해인의 눈을 바라본다.


“해인아, 네가 내게 준 시간들이… 나에게 큰 힘이었어.

그래서 더는 너한테 기대면 안 될 것 같아.”


해인은 주저앉듯 의자에 몸을 기대며 울음을 삼켰다.


“왜… 왜 꼭 떠나야 해…”


세희는 조용히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희미한 눈발이 카페 창에 부딪혀 흩어졌다.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자. 그때는 내가 너를 찾아갈게.

그때는 내가 먼저 너에게 걸어갈게.”


해인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세희는 오른손을 펴서 해인에게 내밀었다. 해인은 세희가 내민 손을 가볍게 쥔다.

해인의 왼손 검지손가락과 중지손가락을 세희는 힘을 주어 쥐었다가 스르르 힘을 뺀다.

세희는 해인에게 마지막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해인아… 고마워.”


해인을 뒤로하고 세희는 카페에서 먼저 일어난다.

카페 문이 닫히며, 카페문에 달린 종에서 종소리가 맑게 울렸다.

그 소리가 멀어질수록, 해인의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천천히 부서졌다.


‘세희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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