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보지 않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사람과 기억나는 첫 장면. 진주에서 성묘를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해 지는 남해고속도로 위에 자동차들이 붉은 띠를 그리고 있었다. 그 많은 차들 중 하나에, 그들 부부와 우리 형제가 함께 뒷좌석에 앉아있었다. 답답한 공기로 허우적거리던 예닐곱 어린이들에게 그는 부동자세로 얌전히 앉아 있을 것을 요구했다. 그 뒤로 다시는 그사람과 같은 차를 타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우리 가족은 학군이 좋다는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자가도, 전세도, 월세도 아닌 5층짜리 아파트의 꼭대기. 그들 부부가 살던 집이었다. 형편에 맞게 이사 가려는 부모님에게 그사람은 우리 형제의 교육을 이유로 자기 집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 아니 명령하였다. 그 사람의 부인은 세를 받지 못하는 사실을 언짢아했고, 낡은 그 집에서 종종 나왔던 바퀴벌레를 보는 마음으로 우리 가족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세를 내지 못한 사실에 대해 아들로서 변명하자면, 그사람 덕분에 집안이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대략 1998~1999년이니 IMF이후에 흔히 볼 수 있는 '대기업을 나온 아버지' 이야기다. 다만 여기는 자발적 퇴직이라는 점이 조금 다르다. 그사람이 만든 소규모 가구회사에 많은 가족과 친척들이 소환되었고 아버지 역시 부름에 응했다. 공대 나와 엘리베이터 회사에서 일하던 분이 집에서 캐드를 켜고, 회사 로고를 디자인했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만약에 아버지가 계속 회사에 있었다면 덜 힘들었을까? 만일 구조조정의 칼바람에 희생당했다 해도, 더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좋고 좋은 그 중소기업은 채 3년을 버티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가구공장을 살리려 하시더니, 언젠가부터는 이름 모를 공장들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몇 년 후에는 명절 말고는 얼굴을 볼 기회조차 없었다. 그 고통은 어머니에게 전가되었고, 버티기 힘들었던 어머니의 고통은 다시 나에게로 대물림되었다.
아버지는 왜 그사람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을까. 용서는 할 수 없지만 정상을 참작할 사정이 하나 있다. 3남 중 막내로 태어난 아버지는 원래는 미대에 가고 싶었다고 한다. 직업에 대한 성적 편견이 심했던 시대인지라 아버지는 그 꿈을 버리고 집안을 위해 공부에 매진해야 했다. 책상에는 졸음을 막기 위해 항상 칼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 그사람이 칼을 꽂은 사람이다. 담배를 피우지 말 것을 그사람이 명령한 덕분에, 30년 경력의 애연가는 아직도 그사람 앞에서 비흡연자인 것처럼 연기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학창 시절이 치가 떨리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적어도 학교에서는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원만하게 잘 지냈다. 다만 명절이 싫었다. 몇 시간이고 끊이지 않는 그사람의 잔소리, 음식을 만들며 어머니에게 눈치와 압박을 주는 그사람의 아내가 모든 우리 가족을 힘들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사람의 관심은 점점 성적이 오르는 나에게 집중됐다. 상담사 선생님의 말로는, 자신이 원하는 꿈을 못 이룬 아버지의 대용으로 나를 선택했다고 한다. 전교 2등을 하니 돌아왔던 "왜 전교 1등을 못한 것 같노?"라는 말은 지금 생각해도 걸작이다. 문제는 관심의 불똥이 동생을 비롯한 또래 모든 친척에게 튀었다는 것이다. 한 번은 아이들끼리 놀고 있는 곳에 나를 불렀다. 어떤 마음으로 공부해야 하는지, 공부 잘하는 방법은 뭔지를 가르쳐라고 했다. 공부는 자기가 하고 싶어야 하는 거고, 공부가 인생의 정답도 아니라는 말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사람은 어른들에게도 아이들 교육에 대해 한 소리 했던 모양이다. 나를 자식들과 비교시켜서 너무 싫었다는 친척분의 말을 들은 적 있다.
조금 더 시곗바늘을 돌려보았다. 고3 시절 정말 재미있고 최선을 다해 공부했지만 평소보다 아쉽게 수능 성적이 나왔다. 재수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배치표에 맞춰 대학을 찾아보려고 했다. 이 시점에서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났다. 강남에 있는 논술 학원 등록해 뒀으니 가서 논술시험일까지 공부하라는 그사람의 통보를 전달했다. 다음날 아침으로 예매된 KTX표를 보고 처음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고, 왜 그사람이 내 삶에 훼방 놓는 걸 막지 못하냐고 말이다. 애초에 그럴 수 있었으면 나에게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올라간 대치동의 차디찬 공기를 마시며 크리스마스도, 새해에도 학사라는 이름의 고시원 비슷한 건물에서 보냈다. 그 시절 느꼈던 이 낯선 동네의 무서움은 아직까지 싸늘함으로 남아 강남으로 향하는 내 기분을 망치곤 한다.
안타깝지만 당시 내 성적으로는 논술을 준비하기보다는 원서를 쓰기 위한 정보수집에 신경 써야 했다. 결과적으로 3장의 원서 모두 탈락. 타의에 의해 재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 다시는 내 삶에 남을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독학재수를 시작했다. 스타리그 선발 재경기 캐치프레이즈였던 '스스로 구원하라'를 휴대폰 배경으로 새기고,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쉴 새 없이 문제를 풀었다. 공부를 하다가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까지 준비했던 결과는 지난해보다 50점 높아진 수능점수였다. 작년의 기억이 있어 여러 재수학원을 돌면서 상담을 받았는데, 어느새 도장 깨기가 되어 있었다. 결과가 좋아서인지 그렇게나 컸던 그사람에 대한 미움도 조금 사그라들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자 그사람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시험을 하나 쳐라고 권유했다. (물론 서울대를 왜 못 갔냐는 잔소리는 덤으로).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했다. 위험도 크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결정적으로 합격을 위한 공부 스트레스를 또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그 시험과 일에 적성과 흥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4학년이 되어, 이번에는 그사람의 요구에 응하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였던 생활비와 학원비를 그사람이 지원해 주었다. 다만 이것도 그사람의 와이프가 탐탁지 않아 하는지라, 만날 때 몰래몰래 현금으로 받았다. 그렇게 대략 700만 원 정도를 지원받았고 나는 두 번째로 공부를 하다 구역질을 하면서 합격을 했다.
그사람이 주는 마지막 퀘스트를 완료했다. 이제 더 이상 잔소리도, 요구하는 것도 없었다.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며칠 전, 동생 결혼식에서 친척들에게 인사하고 응대하지 않았고 명함도 주지 않았다는 볼멘소리를 50분간 전화로 떠들었다. 일단 결혼식에서 형제는 그런 거 할 수 있는 여유가 없고, 당시 상태는 이 글 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우울증이라고 이야기하면 전화가 2배는 길어질 것 같아 넘어가기로 했다.
여기까지 그사람과의 관계를 돌아봤을 때 정신과에서도, 심리상담에서도 절대로 그사람을 만나지 말아라고 조언했다. 의사 선생님은 그런 어른과는 만나지 않는 것이 효도라고 하셨고, 그 말을 전해 들은 상담사님은 박수를 치며 너무나 좋은 말씀이라고 보태주셨다. 누구보다도 관계를 끊고 싶었지만, 친족이라는 사실과 지원금 700만 원이 족쇄가 되었던 것 같다. 두 분은 내가 그 족쇄를 풀어도 아무 문제없다고 응원해 주는 것 같다. 그 700만 원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인지, 자신의 위신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보라는 상담사님의 말씀에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이번 설에는 못 갈 것 같네요' 통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을 예정이다. 깊이 박혀 있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고, 앞으로의 행복을 위해 그사람과 있었던 일화와 감정을 정리했다. 이런 내용은 혼자 일기장에 적어두는 게 맞지만 왠지 모르게 브런치에 올리고 싶었다. 많은 정신질환이 가까운 사이에서 온다고 하는데 그분들에게 레퍼런스(?)가 될지도 모르니까. 이런 공간에 올리는 것 자체가 감정 해소와 복수(??)니까. 내가 트로피가 되어준 값이라고 생각하자.
그사람이여. 그럼 이만. Ad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