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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초코숲 Jan 25. 2023

우울함의 색은 다채롭다

전포동에서 만난 작은 카페 <연화림> 방문기

평소보다 짧은 설 연휴 첫째 날, 표를 늦게 구한 탓에 해가 저무는 시간에 비로소 숙소로 도착했다. 어딘가 다녀오기엔 애매한 시간인지라 숙소가 있는 서면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그 유명한 전포도 카페거리를 구경하고 저녁을 먹으니 벌써 시간이 8시다. 다음날이 설 당일이라 평소보다 일찍 마감하는 카페들. 게다가 부산 날씨의 함정, 기온은 높지만 바람이 매섭다는 걸 과소평가해 버린 나머지 얇은 코트를 입고 다녔다.      


추위를 피하려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전리단길'에 도착했다. 언젠가부터 0리단길로 불리는 지역은 오히려 경리단길 흉내 낸다는 생각이 들어 꺼리게 되었지만, 지금은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골목 어느 길모퉁이로 들어와 시선을 살짝 올려보니, 허름한 건물 3층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지도 검색을 해보니 '연화림'이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걸 꺼려하는 모습이 을지로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 카페들과 비슷했다. 



여느 감성카페와 비슷하리라는 안일한 생각은 카페의 문을 엶과 동시에 무너졌다. 흰색과 파랑, 그리고 보라가 파스텔톤으로 어우러진 색감. 그 어떤 카페에서도 본 적이 없었던 독특함이었다. 자리를 잡고 살펴본 주문서 귀퉁이에는 이름을 적는 란이 있었다. 음료가 준비되면 이름을 불러준다는 사장님의 말에는 '이곳에 온 사람을 기억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음료와 함께 나온 냅킨. 평범한 휴지와 다를 바 없는 이 종이의 유일한 차이는 오늘 날짜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단순한 차이가 냅킨의 용도를 바꿔버렸다. 한낱 휴지조각이 공간에 대해 느낀 손님들의 방명록으로 탈바꿈했다. 차곡차곡 쌓인 공간에 대한 기억은 어느덧 카페의 역사가 되어 앨범 형태로 비치되어 있었다. 


카페의 다른 한쪽에는 시집과 책의 글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식의 공간 활용이 색다르지는 않지만, 문구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렇지 않았다. 단순히 좋은 글귀를 모아둔 것이 아니었다. 우울함, 외로움, 쓸쓸함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조금은 차갑고 쓸쓸한 그런 감정들의 모음이었다.

색감과 기록, 글귀들이 주는 감정들이 모여 하나의 메시지를 주고 있었다. 우울하지 않고는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다. 실례인지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혹시 사장님도 우울함과 싸우고 계신가요?'라고 물어보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세상의 모든 것을 우울함이라는 렌즈로 바라보고 있어, 그저 사장님이 가진 취향을 제 멋대로 왜곡했을지 모르겠다. 다만 공간에서 느꼈던 감정은 우울증을 다룬 인스타툰이나 브런치 글에서 느꼈던 그것과 유사하긴 했다.


비록 우울이라는 감정을 느꼈지만, 지금까지와 조금은 다른 점이 있었다. 누군가 '우울함'을 보며 떠올리는 색이 무엇인지 물어본다고 하면, 항상 짙은 회색을 떠올렸다. 미세먼지로 가득 찬 잿빛 하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수렁을 연상시키는 우중충한 색감과 같다. 그러나 파랑과 보라가 파스텔톤으로 조합된 이 공간에서 느낀 우울함은 조금 달랐다. 끝없이 깊게 빠져드는 우울감이 아니라, 우울함을 받아들이되 그것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의지가 함께 느껴졌다. 다른 회색인 누군가에게도 다시 색을 낼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와 함께.


만일 우울하지 않았을 때 이 카페를 방문했다면 이렇게 글을 쓸 정도로 인상적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색감이 주는 독특함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 인정하긴 싫지만, 감성을 보다 깊게 살피게 돕는 것은 우울증이 주는 몇 안 되는 이로움인 셈이다. 지금은 원래의 색이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회색과 검은색이 덧칠해져 있지만, 이 그레이 한 우울함을 블루의 우울함으로 바꿀 수만 있더라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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