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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초코숲 Nov 18. 2022

내 머릿속의 끊어진 퓨즈

한창 회사에서 고군분투하던 시기였다. 보고서를 쓰기 위한 참고자료가 너무 많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쥐가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텍스트를 읽어나가야 했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와 다시 자료를 붙잡으니 어지럽다. 머릿속 전구 퓨즈가 끊어진 기분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는 그럭저럭 읽어나갔던 텍스트인데, 지금은 그저 검은 글씨와 흰 종이로만 느껴진다. 이제 더 있어도 일을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처음 겪는 기분이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집에 가서 씻고, 푹 자면 다시 머리가 맑아질 거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022년이 끝나가는 지금까지, 글의 장르와 분야와 상관없이 몰입이 잘 안 되고 있다. 그렇게 유튜브를 보다 보니 나도 문해력 약한 요즘 세대가 되어버린 건지, 내가 사실은 ADHD가 아녔을는지, 별 별 생각이 다 든다. 증상만 이야기하면 코로나 후유증으로 잘 알려진 '브레인 포그 (Brain fog)와 비슷하다. 머리에 낀 안개 때문에 집중력도, 사고력도 이전보다 떨어지는 것. 


게다가 증상을 치료시키기는커녕 악화시킬 수도 있는 일들로 가득했다. 봄에는 코로나19에 걸렸었고, 여름에는 본격적으로 우울증 증상이 나타났으며,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항우울제를 꼬박꼬박 먹고 있다. 우울증으로도, 항우울제의 부작용으로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100:29:1이라는 하인리히의 법칙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머리에 쥐가 난다고 느낄 때부터 스스로를 보호했어야 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특히나 멀티태스킹이 잘 안 된다. 수능이든 어떤 시험이든, 한 과목 공부를 하면 최소 15분 이상 뇌가 세팅을 바꿀 수 있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런데 올해는 성격이 전혀 다른 업무들을 거의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업무별로 시간을 조정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상황이 그러지 못했고, 내가 주도적으로 조절하기에는 경험과 자신감이 부족했다. 어쩌면, 사실이 아니라면 좋겠지만, 너무 많은 양과 다양한 종류의 텍스트를 읽어야 했던 그때의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버린 건 아닐까. 


그나마 글을 쓸 때 집중력은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하나의 글을 쓸 때는 그 글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생각이 분산될 여지가 적어서 그럴 것이다. 머리가 고장 나기 전의 나를 다시 느끼고, 쓰고 또 쓰다 보면 머릿속에 끊어진 퓨즈가 다시 붙게 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도 내가 글을 쓰게 만드는 하나의 원동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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