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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Feb 15. 2021

하마터면 저렴한 사람이 될 뻔 했습니다.

조금 이른 설 연휴를 보내고 부산에서 올라오는 길에 늘 지나치기만 했던 대구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습니다. 지인도 만나고 관광도 하기로 했죠.


생각보다 대구는 차분하고 유서 깊은 곳이었습니다. 서울의 명동과 정동 혜화동을 합쳐 놓은 것 같은 계산 성당 주변은 우리를 근대로 안내했고, 늘 그 시절 삶에 관심이 많은 아내는 연신 너무 재밌다며 다음에 꼭 또 오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수창 청춘 맨션이었습니다. 즐겨 보는 프로인 '비긴 어게인'이 방문해서 서로 떨어져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 곳이었죠. 요즘 부쩍 미술에 관심이 많아진 우리 가족에게는 또 다른 즐거운 방문이 될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그중 2층에 있던 한 예술 체험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VR을 이용한 가상현실로 밀폐된 공간에 있지만 다른 세계를 맛보는 작품이었죠. VR을 많이 접해 보지 않았던 아이들은 신이 나서 한참을 해 보았습니다. 재밌고 신기하다는 말에 저도 머리에 써 보려고 하는데 웬일인지 오른쪽 귀 헤드셋이 별다른 기척도 없이 부러져 버린 겁니다. 애들보다 제 머리가 훨씬 큰데 큰 조정 없이 바로 쓰려다가 그러긴 했지만 뚝 소리도 안 난 걸로 봐서 원래 약하다가 제가 마지막 화룡점정을 했나 봅니다.



온전히 저만 그 상황을 알고 있는 그 순간 정말 온갖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다시 끼워 넣어 볼까?
그냥 두고 가면 내가 그런지 모르겠지?
아니야. 오늘은 평일이라 방문객이 적어서 다 알 거야.
비싸면 어떡하지? 말을 해야 하나?


마음속 지옥을 몇 번을 오가고 있는데 작은 아이가 들어오더니 부서진 헤드셋을 봤습니다. 그러더니 제게 이야기합니다.


아빠. 아빠가 망가뜨린 거야? 이야기할 거지?


응. 그럼. 그렇게 바로 사무실로 내려가서 상황을 말씀드리고 죄송하다고 이야기하고 명함을 드리며 배상을 해야 하면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당황하신 관계자 분도 일단 작가님과 연락해 보시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상황은 마무리되고 그 일정을 마지막으로 수원으로 다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닷새가 지난 오늘 아침. 문득 그날의 고민과 선택, 그리고 지금의 제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날 그렇게 둘째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평안함이 가능했을까요?

"인생의 태도"라는 책에서 행복한 이기주의자라 주장하는 저자 웨인 다이어는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한 결과"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어떤 인간이라고 믿고 그렇게 행동하면 그것이 바로 나라는 거죠. 결국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도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것. 내가 가치 있는 사람들이 되려면 "나를 귀하게 여기는 선택"들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작은 아이의 도움으로 저는 VR기기값 15만 원보다 더 귀한 저 스스로를 지키는 선택을 할 수 있었고, 덕분에 지금의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수창 청춘 맨션에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연락이 온다고 해도 기꺼이 대가를 치를 수 있을 듯합니다. 그 돈은 부서진 기기값이 아닌 내 마음 값. 말하지 않고 그냥 왔더라면 계속 지옥 속에 맴돌고 있었을 내 마음을 구한 값이니까요. 여러 가지로 참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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